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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71)화 (71/177)
  • #71.

    감동과 혼돈의 도가니 같은 팬 미팅이 끝나고 헨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정령이 손수 배웅까지 해 주자 감격에 찬 표정으로 또 한 번 코피를 터트리는 헨리를 보았을 때의 기분이란.

    ‘어쩐지 남 일 같지 않네.’

    나는 처음 아키드를 만났던 때를 떠올리며 작게 미소지었다.

    나도 헨리처럼 격동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었다.

    물론 아키드 앞에서 코피를 흘리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었다. 만약 그랬다면 두고두고 이불킥을 했을 것이다.

    ‘아직 하델루스령엔 오염이 퍼지지 않았다니 다행이기는 한데.’

    나는 헨리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우선 헨리에게 지금처럼 몇몇 지역을 특별히 관찰해 달라 지시했다.

    원작에서 죽은 땅이 된 지역을 집어 준 것이었다.

    오염의 조짐이 있을 때 미리 가서 정화를 시도한다면 정체를 들킬 위험도 없을 테니까.

    설령 들킨다 해도 하델루스령 안에서의 일이니 대공이 외부로 퍼지지 못하도록 수를 써 줄 것이었다.

    그렇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구비해 둔 후 대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도 역시나 아키드의 마법 수업을 염탐하는 나를 본 해링턴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이제는 포기했는지 더는 무어라 하지도 않았다.

    아마 아키드가 내가 있어도 제법 집중하는 덕인 것 같았다.

    아키드는 프로디움에서의 발작 이후로 아직까진 이렇다 할 문제는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워낙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발작이니만큼 주의를 요구했다.

    미각성 발작은 말 그대로 각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몸이 되어 스스로 버티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에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이점은 있으나 발작이라는 커다란 페널티가 있었다.

    유사시엔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어 더더욱 걱정스러웠다.

    보아하니 엘레나가 제로니스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아키드의 상태를 살피는 것 같았다.

    조만간 수도에서 정기 회의도 있으니 그때 황실에 들르게 될지도 몰랐다.

    아키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해링턴 백작에게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고생이 많아요, 해링턴 백작.”

    “대공자비님도 참 꾸준하십니다.”

    “원래 덕질은 꾸준히 해 줘야 하거든요.”

    “그렇습니까?”

    해링턴 백작이 흰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심드렁히 대꾸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유한 반응이었다. 이제 보니 얼굴도 조금 해쓱한 것 같고.

    “무슨 일 있어요?”

    “요 근래 처리해야 할 일이 자꾸 늘어서요.”

    백작이 짙은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대답했다.

    “처리할 일이요? 은퇴하신 거 아니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은퇴한 노인네한테 애 돌보기를 시키다니요. 누가 하델루스의 핏줄 아니랄까 봐, 대공 전하도 예외 없이 이 늙은이를 괴롭히는군요. 대공자님의 스승으로 부르셨을 때부터 알아채고 진작 도망쳤어야 했는데.”

    해링턴 백작이 그간 데인 것들을 떠올리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대공이 따로 뭔갈 명령한 모양이었다.

    은퇴하고서도 가신 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가 다소 안타까웠으나 내 소관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그의 말에서 의문점이 생겨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애 돌보기를 시키셨다고요?”

    내 질문에 해링턴 백작이 아차, 싶은 얼굴로 시치미를 떼었다.

    “그만큼 귀찮은 일을 시키셨다는 뜻입니다.”

    “흐음.”

    내가 눈을 가느스름히 뜨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해링턴 백작이 시선을 피했다.

    “저는 그럼 이만.”

    그러곤 누가 봐도 다급하게 짐을 챙겨 사라졌다.

    그 행동이 몹시도 수상쩍었으나 추궁하기엔 이미 그가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아이라.’

    원작에선 아키드의 동생이 태어났다는 내용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대공의 사생아는 아닐 터.

    대체 누구길래 대공이 해링턴 백작에게 맡긴 걸까?

    백작이 흠칫하며 도망치는 걸 보면 업무상 비밀인 것 같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워낙 공사다망하신 대공이니 내가 관여할 일도 아니겠지.

    내가 막 백작에게 흥미가 떨어질 무렵, 아키드가 아실과 함께 방에서 나왔다. 아실이 아키드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예. 차질없이 진행하겠습니다.”

    아실이 나에게도 가볍게 묵례하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아키드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뭘 준비해요?”

    “정기 회의 일정 때문에 아버지께서 먼저 수도로 가게 돼서요. 그 일로 일정을 조율했습니다.”

    “네? 수도로 바로 가셨다고요? 서신에선 성에 들렀다가 함께 갈 거라고 하셨는데.”

    “중간에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우리도 곧 수도로 출발할 테니 거기서 만나는 게 빠를 거고요.”

    “오신다고 해서 피켓도 새로 만들어 뒀는데…….”

    지난번의 열렬한 반응에 힘입어 이번에는 그림까지 그려 넣은 야심작이었다. 한데 볼 사람이 이곳에 안 온다니 허탈했다.

    ‘거짓말쟁이…….’

    편지로는 선물도 보내 주겠다며 온갖 허풍은 다 떨었으면서. 물론 그만큼 중요한 사안인가 싶어서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상처는 잘 아무셨으려나.

    원래는 한 달이면 된다던 출장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두 달이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그간 대공의 빈자리를 어렴풋이 느끼던 나는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우린 언제 출발하는데요?”

    “주말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아마 시녀가 알아서 짐을 챙겨 두었을 겁니다.”

    “그렇구나.”

    내 생은 북부에서 시작해 북부로 끝날 줄 알았는데, 수도로 가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물론 아키드의 발작 때문에 슬쩍 끼어 가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대공 부부만 오갔을 여정이었으니까.

    원작의 주 무대였던 수도로 갈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던 찰나, 아키드가 청천벽력같은 말을 내뱉었다.

    “수도에 도착하면 당분간 에셀 공작가에서 머물 것 같습니다.”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서 갑자기 왜 악녀의 가문이 나온단 말인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아키드가 말했다.

    “그게, 별장의 수도관이 고장 나서 수리 중이라고 합니다. 다른 호텔에서 묵자니 보안 문제가 있고…….”

    그 순간 내 뇌리로 에셀 공작이 북부를 떠나면서 거듭 강조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다음에 수도로 오게 되면 꼭 에셀 성에 놀러 오거라. 내 딸이 또래 친구에 목말라하거든.’

    이런 식으로 악녀와 조우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모자라 악녀의 소굴로 들어가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키드 역시 표정이 좋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그가 조금 내키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도 다른 방편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만, 황태자 전하와 은밀히 만나기에 에셀 공작가 만한 곳이 없어서요.”

    그것도 그랬다. 에셀 공작가는 대대로 황실파 가문인 데다 소공작은 제로니스와 절친한 사이였다.

    사람의 이목을 피하면서 은밀히 황태자를 만나기에 에셀 공작가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 문제라면 나도 더는 악녀의 소굴로 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아키드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내가 무얼 마다할까.

    “전하를 뵐 생각을 하면 에셀 공작가에 머무는 편이 더 낫겠네요. 우리가 온 목적도 노출하지 않을 수 있고요.”

    “그렇기는 한데……. 역시 잘한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껄끄러운 사람의 집이라.”

    아키드가 굳은 얼굴로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언뜻 눈빛에 서늘함이 깃들었다.

    나는 악녀의 가문인 걸 알아서 그렇다 쳐도 아키드의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껄끄러운 사람이라뇨?”

    “에셀 소공작 말입니다. 지난번에 로에나를 보던 눈빛이 음흉하던 게 생각나서요. 지금도 사실 좀 고민이 됩니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어떨까, 하고.”

    “아.”

    그러고 보니 에셀 공작가에는 에드워드도 있었다.

    물론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라 성을 자주 비울 테지만 오가며 마주치는 건 피할 수 없을 터.

    나는 지난번에 새빨개진 얼굴로 어버버거리던 에드워드를 떠올렸다. 원작에서의 이미지와 달리 숙맥이던 모습이라 조금 신선했었지.

    아키드는 그와의 첫 만남이 꽤나 불쾌했기에 에셀 성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가 은연중에 내 손목을 노려보는 걸 보면 거의 확실했다.

    나는 아키드가 에드워드를 신경 쓰지 않기를 바라는 맘에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에셀 소공작은 신경 쓰지 마세요. 워낙 단순한 사람이라 아마 그때도 별 뜻 없이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역효과였다. 아키드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낮게 물었다.

    “그걸 로에나가 어떻게 압니까?”

    “네?”

    “소공작을 굉장히 잘 아는 사람처럼 말씀하시기에.”

    아키드의 읊조리는 말에 나는 아차, 하며 눈을 도르륵 굴렸다.

    생각해 보니 쓸데없이 에드워드를 잘 아는 듯한 발언을 한 탓이었다. 나는 냉큼 머리를 굴려 수습했다.

    “오, 오라버니가 말해 줬었어요. 동기 중에 몸부터 나가는 생각 짧은 놈팡이가 하나 있다고요.”

    “그렇군요.”

    “네에, 오라버니들이 아주 질색을 하셨어요. 뇌에 근육만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요.”

    나는 일부러 에드워드 에셀을 혹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키드가 아까보다는 수그러진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에셀 성에서 또 그자가 무례하게 굴면…….”

    “정강이를 차 버릴게요!”

    내가 우렁차게 대답하자 아키드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호선을 그렸다.

    “네. 그러면 돼요.”

    싱그러운 미소이건만. 어쩐지 죽을 뻔한 사람 하나를 살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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