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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70)화 (70/177)
  • #70.

    대공에게 보냈던 키나가 무사히 성에 도착했다.

    어디든 박고 보는 키나라서 미리 안전한 착지용 쿠션도 구비해 두었더니 귀신같이 쿠션에 착지했다.

    키나가 온순하게 다리를 맡겨 편지를 뜯는 도중 붕대를 발견했다.

    “다쳤네?”

    깍깍.

    키나가 고자질하듯 붕대를 부리로 입질했다. 보나 마나 착지하다가 어딘가에 긁힌 모양이었다.

    이 아이를 어찌할꼬.

    짠한 맘에 다리를 호호, 불어 주곤 편지를 뜯었다.

    [보고 싶다고 그토록 성화를 부려 대니 일찍 가 보도록 하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 아마 열 밤만 자면 도착할 거다.

    혹시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다오. 지나는 길에 사다 줄 수도 있으니.]

    아버님이 기분이 좋은가. 갑자기 웬 선물 타령이실까?

    게다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전 편지까지만 해도 상황이 심각하다고 했었는데.

    자초지종을 듣질 못해 역전된 상황이 알쏭달쏭할 뿐이었다. 게다가 더더욱 의아한 건 다음 구절이었다.

    [상황은 해결했으나 스티그 섬은 이미 오염에 크게 노출돼 죽은 땅이 되는 건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다른 곳으로 번질 위험은 막았으니 네가 나서야 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거다.]

    “그럴 리가 없는데.”

    스티그 섬은 시작에 불과했다. 원작에서는 스티그 섬을 시작으로 해서 산발적으로 대륙 곳곳에 오염이 퍼지기 시작했으니까.

    특히 하델루스령은 큰 피해를 입는 곳 중 하나였다.

    그 과정에서 내가 오염에 노출돼 전염병으로 요절하는 게 원작 내용이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내가 정령사임을 밝히는 것까지 염두에 둔 입장에선 물음표가 던져지는 결과였다.

    이렇듯 안심해도 되는 상황이 아닌데 대공은 지나치게 여유로워 보였다. 마치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수집한 흙은 내가 직접 가져갈 예정이니 운반에 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죽은 땅에서 추출한 흙이니만큼 안전하게 가져갈 테니 내 걱정은 말고.]

    “흐음.”

    나는 제 걱정은 말라며 끝난 대공의 편지를 한참이고 들여다봤다. 도대체 스티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직접 상황을 확인할 수 없어 답답해하고 있는데 누군가 서재 문을 노크했다.

    “작은 마님, 아실입니다.”

    “들어와.”

    내가 시크릿 방을 잘 닫은 채 출입을 허가하자 아실이 서재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지난번에 사람을 찾아 달라 부탁하셨던 건에 관해 중간보고를 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아.”

    나는 그제야 아실에게 메이벨을 찾아봐 달라고 했던 걸 떠올렸다.

    “찾았어?”

    내 질문에 아실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스터스 고아원에는 메이벨이라는 여자애가 없다고 하는군요. 혹시 몰라 인근 고아원을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없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메이벨이 없다는 말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혹시 내가 고아원 이름을 헷갈렸나, 하기에는 인근 고아원에도 없다지 않은가.

    여자 주인공이 사라졌다. 분명 이때쯤엔 고아원에서 자라야 할 아이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저 잘 지내는지 확인하려던 게 오히려 꺼림칙함을 남길 줄이야.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아실이 말했다.

    “우선 정보원을 이용해 다른 지역도 수색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이름 이외에 단서가 될 만한 정보가 더 있을까요?”

    “머리 색이 독특한 은발이야. 눈은 금색이고.”

    “그런 인상착의라면 찾는 데 용이하겠군요.”

    아실이 수첩에 정보를 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그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아실, 전에도 말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예.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아실이 믿음직한 심복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다독였다.

    내가 다짜고짜 비밀리에 사람을 찾아 달라고 해서 궁금한 게 많을 텐데도 아실은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나는 아실의 그러한 점이 좋았다.

    “응. 고마워.”

    “혹시 더 부탁하실 일이 있으실까요?”

    “아냐. 그거면 충분해.”

    “예. 그러면 다음에는 좀 더 유용한 정보를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실이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또다시 혼자가 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메이벨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원작과 달라진 게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등장인물이 위치를 이탈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아키드가 원작과 달리 발작을 일으키게 된 상황도 불안감을 부추겼다.

    ‘뭔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던 걸까?’

    꺼림칙한 기분에 잠겨 있을 즈음, 헨리가 도착했다.

    “로에나 님.”

    “어서 와.”

    내가 소파에 앉으라 손짓하자 헨리가 깍듯이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지난 사건으로 여태 정령을 보지 못한 그는 목마른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면서 시치미를 떼고 본론부터 물었다.

    “어떻게 됐어?”

    “확인해 봤지만 아직 오염의 징조가 나타나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래?”

    나는 안심한 얼굴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스티그 섬에 오염이 시작됐다는 말을 들은 후, 은밀히 헨리에게 하델루스령을 살피라 지시했다.

    혹여 오염의 조짐이 있으면 재빨리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원작에서처럼 걷잡을 수 없는 오염이 퍼지도록 둘 수 없으니까.

    자칫 방심하고 있다가 목숨을 위협당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게 정령사의 힘이 발현된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장 필요한 때에 필요한 힘이 생긴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걸리는 구석이 많았다.

    해서 내 나름대로 원작의 변형에 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죽음이 예정된 몸이라 더더욱 방심하면 큰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는 순찰을 맡기기에 적합한 인재였다. 오랜 시간 정령을 쫓아 방랑하던 짬이 어디 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내게는 그를 굴릴 만한 아주 매력적인 미끼도 많았다.

    “오히려 로에나 님이 정령과 계약한 덕택으로 수혜를 입은 지역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계약 여파로 정령의 힘이 묶이는 시간이 길어져서인 듯하고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정말 대단한 힘입니다. 이렇듯 땅이 기름진 모습은 태어나 처음입니다.”

    누가 정령 덕후 아니랄까 봐 정령에 관한 찬사를 잊지 않는 그였다. 뒤이어 정령에 관한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하니 졸음이 다 몰려왔다.

    내가 덕질하는 분야가 아니면 흥미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어머머, 얘가 정령 볼 줄 아네.

    ― 그치, 우리가 좀 대단하지. 에헴.

    ― 쟤네 집 어디야? 별 뜻은 없고 집 앞에 들러 축복이라도 해 줄까 해서.

    정령들은 헨리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으스대며 깨춤을 추듯 헨리 주변을 돌았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정체를 밝혀낸 불한당이라며 싫어하더니 이젠 좋다고 난리다.

    저 모습을 헨리가 보았다면 정령이 묘기를 부리려 하는 것 같다고 눈을 빛내리라.

    나는 시야를 어지럽히는 정령들을 외면한 채 거듭 강조했다.

    “그래도 혹시라도 수상한 지점이 발견되면 오늘처럼 직접 오지는 못하더라도 재빨리 전서를 띄워야 해. 늦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예. 물론입니다.”

    헨리가 냉큼 대답하는가 싶더니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언제쯤 보여 주실 건가요?”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훤히 보였다.

    그에게 이 일을 시키는 조건으로 정령과 만나게 해 주기로 한 걸 당장 시행하라는 것이겠지.

    지난번에 성덕을 목전에 두고 실패했던 전력이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꽤 신중한 모습이었다.

    “걱정 마, 안 잊었으니까.”

    나는 그게 우스워 피식 웃으며 정령을 소환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춤추고 즐거워하던 정령들이 실체화되자마자 점잖은 척하며 헨리에게 모여들었다. 대단한 팬 관리였다.

    나는 정령들의 가식적인 태도를 흐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야 목소리를 듣고 환상이 와장창 깨졌다지만, 일단 남들 눈엔 대단한 정령들이셨다.

    “헙, 허억!”

    헨리가 입을 틀어막고 콧김을 훙훙, 뿜기 시작했다. 얼굴까지 벌게지는 걸 보면 감격하다 못해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거 같다.

    ― 어쩐지 표정이 음흉해. 얼굴색도 이상하고.

    ―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의원, 의원!

    정령들은 저 표정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헛발을 짚었다. 나는 헨리를 위해 한마디 덧붙였다.

    “헨리, 정령들이 너 표정 이상하대.”

    “헙.”

    헨리가 정령들의 지적을 받고 심호흡을 후후, 내뱉었다.

    잠시 후 겨우 본래의 얼굴색으로 돌아온 헨리가 떨리는 손을 정령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정령이 인심 쓰듯 손가락에 안착했고, 헨리가 또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좋은가, 진즉 보여 줄 걸 그랬나, 하고 미안해지던 찰나. 나는 헨리를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헨리!”

    “예?”

    헨리가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경악해 인중을 손으로 톡톡, 가리키자 헨리가 어벙한 얼굴로 코를 쓱 매만졌다.

    “어라.”

    헨리가 묻어난 피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의 코에서 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렀다. 코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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