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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69)화 (69/177)
  • #69.

    쪽지를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새의 공방이 수차례 벌어질 무렵이었다.

    “아야야.”

    메이벨의 앓는 소리에 그제야 메이벨이 키나에게 몸통 박치기를 당했던 걸 기억해 낸 대공이 고개를 돌렸다.

    메이벨은 여전히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대공님……” 하고 흐느꼈다.

    순간적으로 로에나의 전령새가 다치는 것만 생각했지, 성녀가 넘어졌다는 건 신경도 쓰지 못했다.

    로에나가 제 물건에 유독 집착하는 걸 알기에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데미안이 제 과실을 떠올리곤 메이벨을 일으켜 옷을 털어 주었다. 메이벨의 손바닥은 넘어지며 생긴 상처와 흙으로 가득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살뜰히 키나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새와 같이 의무실에 가야겠구나. 마침 저 녀석도 다쳤거든.”

    “저는 괜찮아요.”

    “괜찮기는. 손바닥에 피가 나잖아.”

    대공이 얼른 손수건으로 메이벨의 상처를 지혈했다. 곁에선 붉은 새가 깍깍, 기분 나쁜 울음을 내뱉고 있었다.

    “치료는 싫다는 거냐. 내 머리 좀 그만 뜯어. 확 잡아먹어 버린다.”

    대공은 제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부리로 쪼는 건방진 새에게 위협만 할 뿐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아는 새라도 되는 걸까.

    메이벨이 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리에 쪽지가 있는 걸 보면 누군가의 전령새인 듯했다.

    그리고 새에게 작은 생채기가 난 것에도 극성을 부리는 걸 보면 중요한 새인 것 같았다.

    실상은 키나의 주인이 로에나여서이지만 그녀와 만난 적이 없는 메이벨이 그걸 알 턱이 없었다.

    의무실에 도착하자 대공이 치료를 빙자해 키나에게 반강제로 편지를 뺏는 데 성공했다.

    살다 살다 편지를 주지 않으려는 전령새는 처음이었다.

    대공은 다음에 로에나를 만난다면 이 빌어먹을 새는 팔고 새로운 전령새를 키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할 참이었다.

    원한다면 최고급 족보의 새를 구해 줄 요량도 있었다. 품에 편지를 소중히 넣은 대공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새와 메이벨이 치료를 마치자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메이벨이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같이 있어 주세요.”

    메이벨이 아까와 동일한 요구를 하며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대공은 망설이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일이 목전에 있는 탓이었다.

    “안 돼.”

    “왜요?”

    “읽어야 할 중요한 문서가 있어.”

    실상은 로에나의 편지를 한시라도 빨리 읽고 싶어서였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대공의 근엄한 반응에 메이벨이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아까 전령새가 보낸 쪽지요?”

    “그래. 그거.”

    대공은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대강 대답하고는 메이벨을 제게서 떼어 놓았다.

    “그럼 이만.”

    그러곤 메이벨이 다시 붙잡을 새도 없이 홀연히 의무실을 나가 버렸다.

    메이벨이 대공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뒤이어 뒤뚱뒤뚱 걸어 대공을 쫓는 붉은 새를 보았다. 날개는 뒀다가 뭐에 쓰려고 걸어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까 보니 착지도 형편없던데.

    메이벨이 새를 서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언뜻 이를 으득으득,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들은 의원이 의아함에 뒤를 돌았지만 그때는 메이벨이 감쪽같이 표정을 감춘 후였다.

    * * *

    임시 처소로 돌아온 대공은 곧장 로에나의 편지를 뜯었다. 성가신 키나는 이미 새장에 가둔 후였다.

    깍깍거리며 농성을 벌였으나 대공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편지를 주지 않으려 씨름하던 걸 생각하면 저 정도 처벌도 약과였다.

    거듭 시끄럽게 굴자 대공이 키나를 한 번 서늘히 째려보았다. 그러자 눈치 빠른 키나가 시선을 슬쩍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영악하기 그지없는 새였다. 대공이 다시금 서신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 키나가 무사히 당도했다니 다행이네요.

    소식이 전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잠시 걱정했답니다. 키나가 아직 비행에 서툴거든요.]

    “서툴다 뿐인가 착지도 엉망인데.”

    대공의 혹평에 키나가 새장에서 발광하며 깍깍거렸다.

    [전령새를 어디서 샀냐고요?

    실은 제가 이번에 마도구 사업을 하나 벌이게 되었거든요. 그게 제법 잘 돼서 전령새가 필요하던 차에 아키드 님이 선물해 주었답니다.

    아키드 님은 어쩜 이렇게 자상하고 섬세하신지 몰라요. 역시 아버님을 닮아서겠죠?]

    “이런. 큰일 날 뻔했군.”

    대공은 전령새를 선물한 게 아키드라는 사실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전 편지에 전령새를 어디서 샀냐고만 물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아키드의 선물인 줄도 모르고 키나를 욕하고 바꾸라 했다면 로에나가 제 남편이 준 선물을 욕했다며 노발대발했을 테니까.

    이미 아키드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며 열성적으로 내조하는 며느리에게 남편인 아키드를 욕하는 건 금기나 마찬가지임을 대공은 잘 알았다.

    다이어리 사건으로 얼추 로에나의 특성을 파악했다고나 할까.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로에나에게 미움을 살 뻔했던 대공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편지를 마저 읽었다.

    [키나는 참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아직 착지를 제멋대로 하는 터라 저택 유리를 많이 깨 먹기는 하지만 그래도 귀엽고 똑똑한 아이임이 분명하답니다.

    물론 조금 실수가 잦기는 해요. 지난번엔 슈리에게 몸통 박치기를 해서 슈리가 종일 앓았어요. 하필 옆구리를 가격한 탓에 큰 멍이 들었거든요.

    혹여 키나가 아버님께 몸통 박치기를 해도 용서해 주세요. 워낙 갑자기 성장한 터라 자기 덩치가 크다는 걸 가끔 까먹더라고요.]

    역시 한두 번 하던 몸통 박치기 솜씨가 아니라더니.

    대공은 처음 키나가 찾아왔을 때 습격인 줄로 오해했던 걸 떠올렸다.

    키나의 다리에 묶여 있던 편지에서 로에나의 사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목을 베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로에나의 사인을 먼저 보고 피해서 망정이었지, 그것도 모르고 아키드가 선물한 새를 죽였다면 로에나가 평생 저와 말을 안 하겠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다시 오싹해진 대공이 자신의 팔을 쓸어내렸다. 여러모로 주의가 필요한 새였다.

    게다가 누가 로에나의 전령새 아니랄까 봐 주인을 닮은 붉은 깃털은 파란 하늘 위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했다.

    전령새로서 부적합한 색깔이지만 로에나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걸 선물한 상대가 마음에 들어서인 거겠지만.

    대공은 아키드가 왜 그 새를 선물했는지를 단번에 짐작하며 혀를 내둘렀다.

    새삼 제 아들이라는 게 실감이 되었다. 분명 저 붉은 털을 보고 로에나를 떠올려서 선물한 거겠지.

    그는 과거 금색 카나리아를 엘레나에게 선물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엘레나의 반응은 참 재미있었다.

    누가 전령새를 금색 털을 지닌 새로 쓰냐며, 황족인 거 광고하고 다니라는 거냐며 윽박을 질렀더랬지.

    그러면서도 착실히 제 방에서 키우던 걸 생각하면 엘레나도 마음에 들기는 한 모양이었다.

    지금이야 유명을 달리한 새이지만 한동안 엘레나의 곁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대공은 그 시절을 잠시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 깍깍거리는 키나의 다리에 난 생채기를 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는 저 망할 새를 받아 내는 연습을 해 두어야겠다.

    피했다가는 다리나 날개가 부러져 제 며느리를 슬프게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한참 키나를 빙자한 아키드의 찬양이 끝나고, 드디어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러한 서두가 일상인지라 대공은 그러려니 했다.

    아마도 전령새를 샀냐는 질문도 은근히 기대했던 게 분명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간단한 질문에 한 페이지를 소모하진 않았겠지.

    [아프신 곳은 괜찮아지셨다니 다행이에요. 제가 괜히 무리한 요구를 해서 아버님께서 위험을 무릅쓴 건 아닌가 염려돼요.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주세요. 아버님이 아프면 로에나도 맘이 아프니까요.

    지난번에 아버님께서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이코, 내 심장’ 하며 주저앉았다니까요?

    아프지 마세요, 아버님.]

    “흠.”

    대공이 입가를 쓸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실없이 웃지 않으려 근엄한 척 흠흠거렸지만 이미 표정은 녹녹하다 못해 흐물흐물거렸다. 키나가 이를 흐린 눈으로 보며 깍깍, 울었다.

    어쩜 이렇게 입에 넣고 굴리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하는 건지.

    제 며느리라지만 정말 야무지고 귀엽지 않은가?

    대공은 근처에 아실이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가 있었다면 저 대신 로에나를 칭찬하여 가려운 구석을 긁어 주었을 텐데 말이다.

    데미안은 새삼 그 동그란 얼굴을 못 본 지 꽤 되었다는 것에 낮게 침음했다.

    이제 일도 마무리되었으니 조만간 토끼 같은 자식 내외와 조금 무섭지만 그리운 아내의 곁으로 갈 수 있을 터.

    [보고 싶어요, 아버님!]

    대공은 말미를 거듭 읽으며 느른히 미소 지었다. 보고 싶다는 말이 이렇게 듣기 좋은 단어였던가.

    편지하지 않는다고 타박한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일을 잊지 않고 이리 먼 곳까지 편지를 보내니 기특했다.

    특히 전령새가 생겼다며 제게 먼저 자랑한 건 어쩐지 어깨가 으쓱여졌다.

    물론 로에나가 시아버지를 구슬리기 위해 한 거짓말이었지만 데미안으로선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기특하니 선물이라도 사 갈까.”

    대공이 돌아갈 궁리를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침 지나는 길에 유명한 관광지가 있으니 특산품이라도 사 갈까 싶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통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하델루스 성이 더더욱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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