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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68)화 (68/177)

#68.

데미안은 스티그 섬에서 추출한 흙을 숫자가 적힌 유리병에 옮겨 담았다.

원래였다면 더 빨리 전송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다치는 바람에 일이 늦어졌다.

눈치 빠른 엘레나는 제 상처가 얕지 않다는 걸 간파하고 답신을 보냈다.

[당신이 다치면 곤란한 건 나예요. 쓸데없이 아파서는.

사지 멀쩡하게 돌아오지 않으면 남은 다리도 부러뜨릴 줄 알아요.]

남이 보면 다소 살벌한 전서였으나 그 속에 서툰 걱정이 묻어 있다는 걸 데미안은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매정한 듯하면서도 여린 면이 있으니까. 그게 또 사람을 애타게 하곤 했다.

그는 편지를 보고 실없이 웃는 때가 많았다. 어깨 흉터에 장미를 그려 넣겠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에단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데미안은 홀로 큭큭거렸다.

그는 그 반응을 보고 싶어서라도 장미 문신을 새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행히 스티그 섬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어 조만간 대공령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지난번에 구출해 낸 아이가 성녀로 밝혀진 덕에 오염을 없애는 게 수월해진 덕이었다.

아이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염을 없애 저가 성녀임을 드러냈다. 신관들이 경이로워할 정도로 엄청난 신성력이었다.

뒤늦게 오염을 없앤 탓에 아쉽게도 스티그 섬은 죽어 버렸지만, 이후에 있을 오염을 막을 수 있는 전력이 생긴 덕에 근심도 던 상황이었다.

혹여나 로에나를 희생시키려 들면 어쩌나, 고민하던 것도 말끔히 해결되어 대공은 후련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아이가 신관을 따라가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었다.

생명의 은인인 대공만을 졸졸 따라다니는 탓에 신관들도 애를 먹고 있었다.

이대로 억지로 떼어 내 신전으로 보내기엔 아이가 고집스럽게 버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가는 엘레나의 경멸 어린 눈빛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그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또 다른 사생아를 데려왔다 여길 테니까.

그 정도의 신뢰, 아니 불신밖에 쌓지 못했다는 것이 쓰리지만 자초한 결과인지라 대공은 시름만 깊어졌다.

게다가 최근 성녀를 노리는 움직임까지 있던 터라 대공의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때마침 자객들을 심문하던 에단이 막사에 들어와 거수경례했다.

“배후는?”

“아직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성가시기는.”

대공은 직접 심문할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장갑을 꼈다. 에단이 그 의도를 알아채고 대공을 자객들이 갇혀 있는 막사로 안내했다.

대공은 피떡이 되고도 입을 열지 않는 자객들에게 낮게 뇌까렸다.

“입을 열지 않으면 후회할 텐데.”

그러자 자객들 중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고함쳤다.

“헛소리 마라! 입을 열든 열지 않든, 우리를 죽이는 건 매한가지라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알고?”

“같은 죽음이래도 어떻게 죽느냐는 다를 텐데. 이왕이면 단칼에 절명하고 싶지 않아?”

대공의 잔악한 물음에 자객들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결국 죽이기는 한다는 건데, 곱게 죽일지 잔혹하게 죽일지는 입에서 나오는 내용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었다.

자객 하나가 눈에 띄게 와들와들 떨자 덩치 큰 자객이 소리쳤다.

“조직에 관해 입을 벙끗하는 날에는 죽어서도 저주를 받을 거다!”

“조직?”

대공이 피식 웃으며 덩치 큰 자객의 턱에 검을 겨누었다.

“대체 어떤 조직이 감히 하델루스의 막사를 침범해 납치극을 벌이려 하지?”

“황실의 개는 알 것 없다!”

“푸흐.”

대공은 저를 개 취급하는 자객의 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몹시도 살벌했다.

대공의 주변으로 검은 오러가 휘몰아치는가 싶더니 검 끝에 모였다.

“그거 아나? 어둠 속성은 오감을 마비시켜 상대를 고문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걸.”

“크흑!”

자객이 검은 오러에 반응해 몸을 비틀었다. 알싸한 통증이 코에서부터 눈과 입, 귀를 통해 여과 없이 밀려들어 왔다.

어둠 속성은 말 그대로 짙은 밤과도 같은 죽음을 선사하는 마법이었다.

상대의 오감을 마비시켜 서서히 고통받다 죽게 하는 힘.

공격에 특화된 그 힘은 고문에도 효과적이었다. 기도가 막히고 피가 머리에 쏠리는 느낌에 자객이 거품을 물듯 눈을 까뒤집었다.

이를 보는 다른 자객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던 찰나.

“헙!”

돌연 곁에 있던 자객들이 목을 부여잡으며 고통에 신음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들의 흰자위가 검게 물드는가 싶더니 픽 쓰러졌다.

“이게 무슨!”

에단이 쓰러진 자객을 확인하곤 아연실색했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절명한 탓이었다.

대공이 괴롭히던 자객 역시 거품을 물기도 전에 절명했다. 어둠 마법 때문이 아닌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서였다.

“하?”

대공이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와 같은 현상을 본 게 오늘 처음이 아닌 탓이었다.

분명 아키드에게 불법적인 일을 시키던 신관을 붙잡았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비리 신관을 고문하던 중에 그도 이처럼 흰자위가 검게 물들며 죽어 버렸으니까.

“구린내가 나는데.”

대공이 찝찝한 기분으로 시체들을 훑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같은 증상으로 죽는 이들을 목격했다. 그것도 각자 다른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돌연사하는.

그들의 시체에서는 하나같이 불길한 기운이 풍겼다.

이렇다 할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순간에 느껴지는 꺼림칙한 기운은 그때와 지금 말고는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마약 및 불법 약물 사건은 이미 배후까지 밝혀져 종결된 사건이었다.

당시 아키드를 발견한 일로 정신이 없던 대공은 그 직후 사건에서 빠진 터라 후에 어떻게 처리된 건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잘 끝났다고 하기에 잊어버렸는데. 설마 진짜 배후가 따로 있었고, 아직도 활보하고 있던 것일까.

하긴 그 정도 규모의 밀매를 별 볼 일 없는 남작 가문에서 홀로 주도했다고 판결 났을 때 의아하기는 했었다.

신관까지 엮인 주도면밀한 밀매업이었던 만큼 대공도 미심쩍은 구석을 느꼈으나 이미 북부로 복귀한 터라 그쪽에는 아예 관심을 끊었었다.

그랬던 사건과의 연결점을 스티그 섬에서 만난 자객에게서 발견하다니.

대공이 당시 사건을 되새길 무렵이었다. 시체를 확인하던 에단이 소리쳤다.

“대공 전하, 이걸 좀 보십시오.”

그가 가리킨 건 시체의 목덜미에 그려진 낮은음자리표 문신이었다. 복면을 목에 걸고 있던 터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표시였다.

“저건.”

대공은 그때 죽었던 신관에게도 같은 표식이 있던 걸 떠올리며 비식거렸다.

아무래도 그가 사건에서 손을 뗀 이후, 누군가 배후를 은폐한 것 같았다.

‘간도 크게 감히 내 아들을 건드린 것도 모자라 이젠 내 영역까지 침범해?’

대공이 실실 쪼개기 시작하자 에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공이 저렇듯 미친 웃음을 지을 때면 무언가 일이 많아지는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단, 저 표식이 있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와.”

“어디서 말입니까.”

“그건 이놈들 소재지를 파악하다 보면 알 수 있겠지.”

결국 발로 뛰어서 알아 오라는 뜻이었다. 에단은 또다시 과로할 위기에 처한 제 처지를 한탄했다.

아키드의 스승으로 있을 때만 해도 천국이었는데, 하필 이런 거지 같은 섬에 끌려와서는 또 야근이었다.

에단이 명을 받들고 사라진 후 대공은 한참을 시체 주변에 머물다 막사를 나왔다. 그가 막 임시 처소로 들어서려는 찰나.

“대공님?”

낭랑한 음성과 함께 은발의 소녀가 대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잠옷 바람으로 나온 것을 보니 또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대공이 성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메이벨, 왜 나와 있지?”

“나쁜 사람들은 잡았어요?”

“그래.”

“무서워요. 또 나쁜 사람이 메이벨을 잡아가려 하면 어떻게 해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있는 한 이 막사 안에서 너를 납치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대공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메이벨이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그녀가 대공의 바짓자락을 슬쩍 붙들며 말했다.

“그래도 무서운데 같이 자면 안 돼요?”

“그건 안 돼.”

“왜요?”

“그야 귀찮…….”

대공이 성가신 듯 메이벨을 떼어 놓으려는 찰나였다.

깍.

익숙하고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부터 웬 붉은 새가 막사로 돌진하는 게 눈에 띄었다. 대공이 새를 알아보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메이벨이 멀어진 대공을 멀거니 바라볼 무렵이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거대한 붉은 새가 메이벨을 향해 돌진했다.

“어, 어어.”

메이벨이 당황해 머뭇거리는 사이 속도 조절에 실패한 키나가 그대로 메이벨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다.

“꺅!”

퉁―!

메이벨은 붉은 새의 위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키나 역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안 돼!”

하델루스 대공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그가 헐레벌떡 다가간 상대는 메이벨이 아닌 붉은 새였다.

“대공님?”

메이벨은 넘어진 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붉은 새의 안위만을 살피는 대공을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대공은 메이벨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키나가 다친 곳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이윽고 다리에 긴 생채기가 난 것을 확인한 대공이 낮게 욕지거리를 했다.

“젠장, 다치면 로에나가 상심할 텐데. 착지 연습은 대체 왜 안 하는 건데?”

깍깍.

키나가 반항하듯 목청을 높이자 대공이 귀를 막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놈의 전령새가 비행이 이따위인지. 목청 큰 것의 반만 해도 쓸 만할 텐데. 확 구워 먹어 버릴 수도 없고.”

무시무시한 발언에 키나가 분노하며 날개를 퍼덕였다.

깍깍.

네가 뭔 상관이야, 인간!

뒤이어 제 비행 솜씨를 혹평하는 대공의 머리를 쪼았다.

괘씸한 인간! 깍깍.

분을 이기지 못한 키나의 공격에도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새의 다리에 묶인 로에나의 편지에 손을 뻗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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