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다음 날, 나는 흰둥이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비어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흰둥이의 속성을 알려면 본체로 돌아가 핵석을 확인해야 하는 탓이었다.
다행히 내가 델피나를 나눠 준 덕에 흰둥이는 기력을 되찾은 상태였다. 밤에도 혹시 몰라 잘 먹였으니 본체로 돌아가는 건 손쉬울 터.
괜히 성안에서 본체로 돌아갔다간 크기가 감당되지 않을 듯해 넓은 연무장으로 온 것이다.
“자, 이제 본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내 명령에 흰둥이가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 순간 금빛이 휘감기는가 싶더니 커다란 백표범이 눈앞에 등장했다.
맹수과인 백표범의 이마에는 금색 핵석이 박혀 있었다. 단단하고 우람한 허리통이 능선처럼 곡선을 이루었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켜는 흰둥이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흰둥이가 과연 제 이름을 만족스러워할까?
작고 귀여웠던 고양이가 실은 거대한 백표범이라니.
여전히 흰색 털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걸 보면 그만한 이름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흰색 털이면 흰둥이지.
나는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정령에게 물었다.
“어떤 것 같아?”
― 금색 핵석이라면 대지 속성이겠다. 나쁘지 않아. 훈련시키기에도 까다롭지 않고.
― 표범계라면 타고 다니기에도 좋아. 어머, 저 등 근육 좀 봐. 저 꼬리에 맞으면 뼈가 부러지겠는데?
정령이 표범의 등에 기대며 수군거렸다. 흰둥이는 정령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하품을 쩍, 할 뿐이었다.
― 계약하면 흰둥이가 네 델피나를 운용해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돼.
― 흰둥이는 운 좋은 고양이야. 너처럼 풍부한 델피나를 지닌 계약자를 만났으니까.
― 훈련만 잘하면 번견의 역할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려면 훈련사가 필요한데 가능한 한 대지 속성인 사람이 좋아.
“대지 속성이라면…….”
― 마침 네 시어머니가 하인트잖아. 그쪽한테 부탁하는 게 어때?
정령들의 말대로 하인트 황실은 대대로 대지 속성이었다. 황금의 하인트가 대지를 뜻한다는 건 제국민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어머님이 과연 흰둥이를 맡아 줄까인데.
무작정 데려온 데다 어제 저가 되지도 않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엘레나가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꼭 대지 속성이어야 해?”
― 그렇다기보다는 같은 속성만이 교감할 수 있는 영역이 있거든. 그래서 속성이 다르면 훈련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어.
“하아.”
어제 그렇게 외치고 도망치는 게 아니었는데.
엘레나는 버르장머리 없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다. 그런데 내가 그러고 떠났으니 지금쯤 나를 어떻게 혼내 줄까, 단단히 벼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심란해져 가만히 서 있는데 보들보들한 무언가가 내 다리를 감쌌다. 놀라 쳐다보니 흰둥이가 제 꼬리로 내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야옹.
어째서 표범인 상태에서도 야옹거리는 거니.
아무래도 고양이로 오래 있다 보니 자기가 고양이인 줄 착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고양이일 때보다는 용맹한 얼굴이었으나 하는 짓이 고양이라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하긴 맹수들도 동물원에서 멀찍이 볼 때는 귀여워 보이는 법이었다. 유리 벽이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니까.
나 역시 흰둥이가 나를 공격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다가와도 무섭지 않았다.
“그래. 키우기로 마음먹었으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겠지?”
눈 딱 감고 어머님께 훈련을 부탁하자!
흰둥이라는 이름을 똥개 같다고 하셨지만 어차피 내 최애는 아키드였다.
아키드에게 똥개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어머님이랑 내외해야 해?
빙의 전 평생을 소시민으로 살며 익힌 비즈니스 미소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상시 대기였다.
결심을 굳힌 나는 신수와 계약하기 위해 흰둥이의 핵석에 입을 맞추었다. 동시에 몸 안에 델피나를 끌어올려 주입시켰다.
그 순간 흰둥이의 동공이 세로로 쪽 찢어지는가 싶더니 금색 빛무리가 내 몸을 감쌌다.
따스한 햇볕을 온몸에 두른 것처럼 편안한 느낌. 동시에 심장이 조여지며 흰둥이와 내가 연결된 게 전해졌다.
잠시 후, 흰둥이와의 계약에 성공한 내가 그의 턱을 슬슬 만져 주었다.
크릉?
흰둥이가 더 만져 달라는 듯이 턱을 쭉 빼며 내 뺨을 핥았다.
한참 흰둥이와 교감을 한 후, 침실로 향했다.
쇠뿔도 단김에 뽑자는 마음에 잠시 옷만 갈아입고 엘레나의 침실로 가려는데 내 침실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가 하고 안을 들여다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웬 고양이 물품이 침실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캣 타워는 물론이고 장난감까지 한가득이었다.
그때 나를 발견한 아리아 백작 부인이 말했다.
“오셨군요.”
“이게 다 뭐야?”
“대공비 전하께서 흰둥이 입양 기념으로 보내신 선물입니다. 앞으로 지내기 편하게 편의를 봐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어머님이?”
나는 이 모든 게 엘레나의 선물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하긴 아리아 백작 부인이 직접 움직인 것을 보면 대공비가 한 게 맞을 터.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러시는 걸까?
혹시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 괴롭히려는 것일까?
난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인데 어쩜 네가 내게 그럴 수 있느냐고?
혼란스러워 아무 말도 못 하는데 아리아 백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괜찮다면 지금 함께 차를 마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 응. 시간 돼.”
“가실까요?”
그녀가 나를 공손히 안내했다. 흰둥이를 든 채로 졸졸졸 따라가니 곧 테라스였다.
테이블에는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와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엘레나가 나를 보자마자 일어났다.
“왔구나.”
“부르셨다고요.”
나는 가볍게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무어라 하기 전에 우선 사과부터 했다.
“어제 그렇게 예의 없이 나가서 죄송…….”
하지만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엘레나가 수선을 떨었다.
“아니, 아니다. 사과할 것 없어.”
“네?”
“선물은 마음에 드니? 특별히 흰둥이의 이름까지 새겨 넣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물건에 죄다 ‘흰둥이’가 쓰여 있던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니 엘레나가 화색을 보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하룻밤 새에 어떻게 저 많은 것을 주문한 거지?
안 그래도 흰둥이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내일 외출할 생각이었는데 수고를 덜었다.
‘그러고 보니 새벽부터 어디 나가셨던 거 같은데……. 설마 흰둥이 물품을 사러 다녀오신 걸까?’
나는 그녀가 미안한 일이 생기면 유독 내 일을 대신하려 드는 것을 떠올리며 은근히 떠보았다.
“어머니, 어제 일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니? 나는 잘 모르겠구나.”
역시.
나는 엘레나가 시침을 떼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내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워낙 사과할 줄 모르는 그녀인지라 이런 식으로 내게 화해의 손길을 보내는 것 같았다.
내 버릇없음에 화가 났으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어쩐지 미안함 반, 고마움 반을 느꼈다. 해서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어멋.”
“흰둥이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님.”
“……키우기로 했는데 이 정도는.”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하시려 했죠? 별거 맞아요. 새벽부터 나가신 거 다 들었어요.”
“어떤 정신 빠진 하녀가 너한테 그런 걸…….”
“아침 같이 먹고 싶어서 찾아갔었어요. 안 계시길래 외출하셨다 짐작했고요.”
“크흠.”
엘레나가 정곡이 찔렸는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곤 엉거주춤한 자세를 고쳐 잡아 나를 마주 안았다.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이 퍽 정다웠다.
이 품이 불편하지 않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나도 엘레나와 제법 유대를 쌓은 모양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대면하는 것 자체가 꺼려졌는데 말이다.
“앞으로도 필요한 게 있으면 내게 말하렴. 어려워하지 말고.”
나는 선심 쓰듯 중얼거리는 엘레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럼 부탁 하나 해도 돼요?”
내가 잽싸게 고개를 디밀자 엘레나가 눈을 깜박였다.
“흰둥이가 대지 속성이라 대지 속성의 훈련사가 필요해요.”
“…….”
“어머님이 흰둥이 훈련을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다다다 말을 마친 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엘레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일순 엘레나의 얼굴에 귀찮은 일에 걸렸다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본인이 내뱉은 말은 주워 담기 힘들었는지 끙, 하고 신음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
“정령들 말로는 같은 속성인 훈련사가 훨씬 교감이 쉽대요. 하루에 한 시간, 아니 일주일에 세 번만이라도 안 될까요?”
내가 애원하자 흰둥이가 요망하게 엘레나의 다리에 머리를 기대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낑.
두 쌍의 눈망울이 엘레나를 간절히 응시하자 그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결국.
“……그래.”
“와!”
미야옹!
마지못해 대답한 엘레나가 이마를 짚었다. 나는 흰둥이와 덩실덩실 춤을 추며 환호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엘레나가 픽 웃었다.
“이러고도 네가 더부살이하는 것 같니?”
“네?”
“아키드가 그러더구나. 네가 이 성에서 더부살이한다고 여긴다고.”
“헙!”
자는 줄 알았는데!
아키드가 나와 신수가 하는 말을 들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야 덕후로서 최애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더부살이도 좋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그때 엘레나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더부살이는 무슨. 이렇게 나를 요긴하게 써먹으면서.”
나는 그녀의 투덜거림에 눈을 도르륵 굴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언제 깨춤을 추었냐는 양 다소곳이 배꼽 인사를 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머님. 흰둥이, 스승님께 인사.”
야옹.
내 호령에 흰둥이까지 나를 따라 배꼽 인사를 하자 엘레나가 폭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