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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66)화 (66/177)

#66.

늦은 저녁, 하델루스 성에 도착한 나는 신수를 키우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 당도했다.

“이제는 너를 외출시키는 게 두렵구나. 그 고양이는 또 뭐니?”

엘레나가 내 품속의 고양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밤늦게 돌아온 것도 모자라 군식구까지 데리고 오니 기가 찬 모양이었다.

“말해 보렴. 이번엔 또 무슨 일이니?”

“마석 사냥꾼을 잡아 왔어요.”

“설마 범인이 고양이다, 같은 허튼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야옹?

신수가 ‘고양이’라는 단어에 반응해 야옹, 울었다. 고개까지 갸웃거리자 엘레나가 움찔, 떨었다. 자연스럽게 뻗어 버린 손은 차마 물리지 못한 채였다.

역시 귀여운 거에 약하시다니까.

나는 엘레나에게 신수가 잘 보이도록 내밀며 말했다.

“고양이가 아니라 신수예요. 얘가 그동안 드론의 마석을 파먹은 주범이에요.”

“뭐라고?”

“유물 매립지에서 발견된 고대 유물에 갇혀 있던 아이를 구조해 왔어요. 잘 먹이고 키우면 분명 가문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살살 꼬드기는 내 말에 엘레나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여긴 임시보호소가 아니야.”

“하지만 신수인데…….”

“신수이니 더 문제지. 정령에 이어 신수까지. 대체 너를 어쩌면 좋니?”

엘레나는 신수라는 말에 철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정령에 이어 신수까지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귀찮은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완강한 반응에 내가 슬쩍 신수를 곁눈질했다. 실은 성에 오기 전에 마차 안에서 신수에게 당부한 말이 있었다.

‘성에서 같이 살려면 시부모님의 귀여움을 받아야 해. 지금 만나는 사람이 널 키우지 않겠다고 하면 나도 너를 데리고 있을 수 없어. 나도 더부살이나 마찬가지거든.’

데리고 있을 수 없다는 말에 신수가 야옹야옹, 울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확신했다. 이 신수라면 엘레나의 철벽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고.

그때였다. 내 신호를 기민하게 알아챈 신수가 앞발을 내밀어 엘레나의 손을 톡, 두드렸다.

“응?”

엘레나가 말랑한 발바닥에 깜짝 놀라 신수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바로 그 순간. 신수가 울망울망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며 야옹야옹, 울었다. 엘레나가 움찔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뀽.

날 키워, 인간.

아마 신수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신수의 요망한 애교에 결국 엘레나의 얼굴이 허물어졌다.

“크흠, 당분간만이다.”

허락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와아!”

내가 환호성을 내지르자 신수도 덩달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곤 엘레나에게 앞발을 뻗어 안아 달라는 자세를 취했다.

얼결에 신수를 안아 든 엘레나의 볼이 붉었다.

“그래서 얘 이름이 뭐라고?”

“흰둥이요.”

“누가 그딴 이름을 지었니? 똥개도 아니고 흰둥이는 무슨, 그렇게 센스가 없…….”

“제가 지은 건데요.”

“입에 착착 감기는 게 좋구나. 털 색이랑도 잘 어울리고.”

놀랍도록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엘레나가 언제 혹평했냐는 양 시치미를 떼었다. 내가 눈을 가느스름히 뜨며 물었다.

“그렇게 별로예요?”

찰떡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리가. 아주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하세요.

“다른 이름도 괜찮아요. 사실 저도 아직 완전히 정한 건 아니거든요. 후보가 여러 개 있는데 그중에 골라 보실래요?”

“고르고 고른 이름이라고?”

“그럼요. 열 개도 넘는 이름 중에서 선별했는걸요. 눈덩이, 솜뭉치, 치즈, 밀키…….”

내가 손가락을 꼽으며 생각해 둔 이름을 하나둘 나열하자 엘레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다 별로인가 보다.

괜스레 시무룩해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아키드가 말했다.

“아까 흰둥이가 제일 맘에 든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흰둥이도 이름이 자꾸 바뀌면 헷갈릴 겁니다. 그렇지, 흰둥아?”

아키드의 부드러운 반응에 흰둥이가 야옹, 하고 울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배만 부르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 같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엘레나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 이 아이는 흰둥이가 제일 어울린단다.”

이미 늦으셨는데요.

나는 입술을 댓 발 내민 채 두 손을 벌렸다.

“이리 와, 흰둥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흰둥이가 엘레나의 품에서 내 품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밥 줄 사람은 나라는 걸 아는 영리한 반응이었다.

엘레나가 뒤에서 “새아가” 하고 불렀으나 나는 이미 맘이 상한 후였다.

사실 흰둥이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내 첫 번째 덕질 상대가 모 애니메이션의 흰색 강아지였으니까.

맨날 빨간 티에 노란 바지만 입고 있는 되바라진 유치원생이 키우는 강아지는 어린 시절 내 심장을 강타할 만큼 귀여웠다.

그 포슬포슬한 솜뭉치 같은 모습을 보고 미친 듯이 빵을 사 먹으며 스티커를 모으던 게 추억이라면 추억이었다.

한데 그런 성스러운 이름을 똥개 같다고 혹평하다니. 우리 흰둥이는 똥개가 아니에요!

웃어넘기기에는 아무리 어머니래도 덕후로서 견디기 힘들었다.

“어머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흰둥이라는 이름이 좋아요.”

“아니, 난…….”

“어머님, 미워요!”

나는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소심하게 항변한 후, 뭐라 할세라 와다다다 달려 나가 버렸다.

어머니의 얼굴을 웃으면서 보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한때 좋아한 내 새끼를 똥개라고 욕한 사람을 참아 준 것만으로도 나는 엄청난 인내심을 소모했으니까.

* * *

“새아가!”

엘레나가 허공에 손을 뻗으며 사라진 로에나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자리를 박차고 나간 로에나는 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울먹이던 눈동자를 되새기자 엘레나는 혼란스러웠다.

‘그 이름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던 거니?’

솔직히 흰둥이라는 이름은 정말 별로였다. 용맹한 신수에게 흰둥이라는 어벙한 이름을 지어 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있었고, 그게 다름 아닌 며느리 로에나라는 점에서 엘레나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를 어쩌나.’

눈물까지 글썽이며 도망친 탓에 엘레나는 난감해졌다.

게다가 밉다니!

엘레나는 로에나에게 미움받게 된 상황에 안절부절못했다.

예전이었다면 콧방귀를 뀌었을 말인데 지금은 무거운 돌을 가슴에 얹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로에나가 더는 예전의 골칫거리 며느리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아키드가 담백하게 말했다.

“토라졌네요.”

“나도 알고 있단다.”

“미움도 받으셨고요.”

“놀리니?”

엘레나가 눈을 부릅뜨자 아키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약을 올리는 듯해 엘레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도움이 안 된다. 난감함에 마른세수를 하고 뒤따라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아키드가 말했다.

“저는 흰둥이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그럼요. 로에나가 지었잖아요.”

“언제부터 로에나의 말을 들었다고.”

“모르셨습니까? 꽤 됐는데.”

아키드가 피식 웃으며 먼저 일어났다. 엘레나가 그의 소매를 붙들며 물었다.

“이렇게 간다고?”

“그럼요?”

“어떻게든 해 보렴. 로에나가 네 말이라면 껌뻑 죽잖니.”

엘레나의 말에 아키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후 비정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미움받은 건 어머니이십니다, 제가 아니라.”

이런 못된!

엘레나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하자 아키드가 말을 덧붙였다.

“저는 로에나가 눈치 보며 지내길 바라지 않습니다.”

“누가 눈치를 주었다고. 난 그저…….”

“로에나가 이 성에서 지내는 걸 더부살이라는 말로 비유했습니다.”

“……뭐?”

“아마도 은연중에 잘못하면 쫓겨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델루스 꽃 알레르기 때의 일도 제대로 사과하신 적 없으시죠?”

“……그건.”

사과하려 했었다. 작년, 로에나가 말도 없이 농장에서 도망쳤을 때 무슨 일 있냐고 묻기보다 네가 그럴 줄 알았다고 타박부터 해서 미안했노라고.

하지만 당시 어석버석했던 사이에서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꺼내기 쉽지 않았다.

하여 좋아한다는 디저트를 챙겨 주고 일을 대신하는 거로 미안함을 에둘러 표현했다.

한데 내내 불편했던 지점을 아키드가 직접적으로 꼬집자 엘레나는 심기가 복잡해졌다.

쫓아내기는 누가 쫓아낸단 말인가. 오히려 귀여운 얼굴을 보고 납치범이 노릴까 봐 걱정스러운데.

엘레나 스스로도 자신의 심경 변화가 퍽 당혹스러웠다.

한편 아키드는 낮게 한숨지었다. 실은 마차 안에서 로에나가 신수에게 속닥이던 걸 모두 들었다.

애초에 눈만 감고 있었으니 들리는 소리를 못 들을 리 없었다. 그녀는 그가 자는 줄 알았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떻게든 두 사람한테 잘 보여야 너도, 나도 이 성에서 오래 버틸 수 있어.’

자신과의 결혼 생활을 버틴다는 단어로 표현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그가 이혼 서류를 내밀었던 일을 내내 마음에 품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 탓할 상대는 대공 부부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섣불리 이혼을 운운했던 과거가 후회스러웠으니까.

아키드가 로에나가 사라진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는 로에나한테 미움받기 싫습니다.”

그럼 죽을지도 몰라요.

“나도 싫다.”

“하지만 미움받으셨죠. 울리기까지 하시고.”

“끙.”

아키드의 힐난에 엘레나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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