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63)화 (63/177)
  • #63.

    에단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역시 아이 주변의 오염이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한 탓이었다.

    그건 분명 신성력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강대한 신성.

    이곳에 파견된 신관 그 누구도 스티그 섬의 오염을 단번에 없애지 못했다.

    그런데 그 조그마한 아이가 그걸 해낸 것을 목격했으니 대공으로선 무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힘이었으니까.

    정령사가 땅을 정화해 자생 능력을 회복시키는 거라면, 신성력은 오염 자체를 없애고 더는 퍼지지 않도록 막아 내는 역할을 했다.

    이미 죽은 땅은 손쓸 수 없지만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

    파견된 신관은 막는 데만 급급하고 오염을 없애는 데는 더뎠기에 소녀의 등장이 달갑기 그지없었다.

    침묵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성녀일까요.”

    “글쎄. 오염의 한가운데에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을 보면 확실히 뭔가 있는 건 분명하겠지.”

    “만약 정말 성녀라면 이번 오염을 막아 내는 건 시간문제겠군요.”

    “아이가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그렇겠지.”

    “역시 몸까지 던져 아이를 구하신 이유가 있으셨군요. 전하를 한순간이지만 무모하고 미련하다고 오해할 뻔했습니다.”

    “말에 뼈가 있는데.”

    “그럴 리가요.”

    에단이 시치미를 떼자 대공이 픽 웃으며 명령을 하달했다.

    “우선 아이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를 알아봐. 이름은 무엇이고 부모는 누군지, 어디서 살고 있었는지.”

    “대피령을 내린 지 한참입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거리의 아이였거나 피난 중에 부모에게 버려졌을 확률이 높습니다.”

    “기왕이면 버려졌으면 더더욱 좋겠군. 괜히 뒤늦게 양육권을 주장하면 골치 아파지니 거리의 아이도 나쁘지 않고.”

    “설마 입양이라도 하려고 하십니까?”

    에단이 놀라 반문하자 대공이 질색했다.

    “애는 하나로도 족해. 더는 부인께 미움받고 싶지도 않고.”

    “미움받는 이유는 그거 때문이 아닐 텐데요.”

    “에단, 지하 공기가 맡고 싶나 봐?”

    대공의 서늘한 경고에 에단이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럼 아이를 신전에 보내려고 하십니까?”

    “그건 좀 더 생각해 보고.”

    하델루스 대공은 아키드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황명을 받고 마약과 불법 약물 밀매를 단속하던 중, 심부름꾼으로 있던 아키드를 붙잡았었다.

    잔뜩 얼어 있던 아키드는 자꾸만 누구를 구해 달라고 울부짖었었다.

    저와 너무도 닮은 아이인 데다 하델루스 가문 특유의 어둠 속성이 느껴져 아키드를 지나칠 수 없었다.

    결국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친자 확인을 했고, 제 핏줄임을 알게 되었었지.

    그리고 그때 그 약물 밀매업자 중에 신관이 섞여 있었기에 데미안의 입장에선 신전을 온전히 믿기 어려웠다.

    어느 집단이고 커지면 커질수록 관리가 소홀해지는 영역이 생기며, 고이면 고일수록 부패하는 영역이 생기는 법이었다.

    하여 신중하게 신전을 선택해 아이를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아이의 거처에 관해서는 우선 성녀가 맞는지 확인한 후에 결정하도록 하지.”

    “예, 전하.”

    에단이 더 하달할 말씀이 있나, 하고 살피는데 불쑥 그가 어깻죽지를 만지기 시작했다. 에단은 상처가 아파서인가 하고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원체 아픈 것을 티 내지 않는 그라서 의아해하던 찰나, 대공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도 장미나 그려 넣을까?”

    “예?”

    에단이 그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이 쳐다보자 대공이 피식 웃었다.

    쭉 찢어져 봉합된 제 상처를 보고 있노라니 엘레나의 상처가 떠올라 한 농담이었다.

    하필 다친 부위가 엘레나의 상처와 정 반대편이었다.

    저 때문에 생긴 상처라 처음으로 누군가의 앞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가 그 흉터를 볼 적마다 눈물 바람을 하니 어느 날 엘레나가 흉터 위에 장미를 새기며 자랑을 했었다.

    이제 더는 흉하지 않으니 그만 질질 짜라고 힐난하면서.

    데미안이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곤 붕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문신 말이야. 여기다 새길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에단?”

    “몹시 징그럽다고 생각합니다.”

    “……나가.”

    “예.”

    에단이 기다렸다는 듯이 막사 밖으로 나갔다. 대공은 열이 뻗치는지 한참이나 문을 노려보았다.

    역시 지하 공기를 맡게 해 주는 게 좋겠다는 음험한 궁리를 하면서.

    * * *

    며칠 후, 나는 아키드와 함께 테슬 지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마차 행렬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중얼거렸다.

    “너무 눈에 띄지 않나요?”

    그저 잠시 다녀오려던 것뿐인데 이런 떠들썩한 행차라니.

    이건 대놓고 테슬 지역 관리인의 기를 죽이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강도는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다가오지 못하리라.

    ‘혹시라도 드론 파손에 관리자가 엮여 있다면 끌고 오렴. 감히 하델루스령에서 공금횡령은 있을 수 없지. 먹은 만큼 매질해서 제대로 본때를 보여 주겠어.’

    마지막까지 단단히 이르던 엘레나를 떠올리니 하델루스령이 관리자의 비리가 적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타고난 성격 파탄자 두 사람이 관리하는 곳이니 어지간히 간이 부은 사람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못 하리라.

    말이 통하는 윗선이어야 어떻게든 구슬려서 횡령하지.

    대공 부부는 귀족치고 언행에 가감이 없는 자타 공인 성격 파탄자들이었다.

    게다가 마음에 안 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쓱싹 할 수 있는 권력도 있다. 둘에 관해 미담보다는 괴담이 더 많은 것도 다 그 성격 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임금님 행차도 아니고.’

    도를 넘은 떠들썩한 행렬에 민망함이 몰려와 나는 차마 창밖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특히나.

    내가 자꾸만 벽 쪽에 붙으며 창 커튼을 단단히 봉하자 아키드가 말했다.

    “확실히 눈에 띄긴 하네요.”

    “그쵸? 과해요, 과해.”

    내가 질색하자 아키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북동쪽은 마수 출몰도 있는 곳이니까요.”

    “그것도 그렇네요.”

    북부가 다른 영지에 비해 험준한 이유는 주기적으로 마수가 출몰하는 탓이었다.

    이미 올 초 한 차례 마수를 토벌한 후라 잔여 마수가 있을 확률은 낮았다. 에단이 아키드를 담당하기 전에 최전방에 나갔다 돌아온 것도 모두 마수 토벌을 다녀온 것이었다.

    “그렇다 한들 테슬 지역은 그리 위험한 지역도 아닌걸요. 마수가 잦게 출몰하는 곳도 아니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건 중요하니까요. 그만큼 어머니께서 신경 써 주셨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아키드가 담요를 여며 주며 단호히 말했다. 그의 말대로 엘레나가 얼마나 꼼꼼히 챙겨 주었는지는 이 행렬만 봐도 알았다.

    나는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멀리까지 나가는 거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게 좋으니까.

    게다가 나는 도둑놈을 잡으러 가는 거였다. 주먹을 불끈 쥔 내가 포부를 밝혔다.

    “어쨌든 드론을 자꾸 부수는 범인을 꼭 잡고야 말 거예요.”

    잡히기만 해 봐라, 아주 요절을 내줄 테야.

    * * *

    테슬 지역의 관리자인 매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밤잠을 설쳤다.

    무려 대공자 부부가 원조품을 들고 직접 행차한다니.

    하필 드론 파손 일로 서로 얼굴을 붉히던 대공자비가 직접 온다는 말에 혼비백산하는 중이었다.

    혹시라도 저를 의심해서 원조를 핑계로 조사를 하러 오는 거라면 큰일이었다.

    그는 결백했지만 상대는 대공가였다. 듣기로 대공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없던 죄목도 만들어서 탈탈 털어 버린다고.

    몇 달 전 하델루스 대공가와 돈독한 사이였던 로르크 남작가가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소문에는 쫄딱 망해 작위를 파는 지경에까지 갔다는데, 그렇게 만든 상대가 다름 아닌 대공가라고 했다.

    친하던 가문도 무 자르듯 썩썩 잘라 내는 대공가인데 저라고 예외일 리가 없었다. 오히려 한술 더 떠 깍뚝깍뚝 썰어 버릴지도.

    매튜가 초조하게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대공자 부부를 기다릴 무렵이었다.

    야옹―

    바깥에서 반가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매튜가 화색을 내비치며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흰 고양이 한 마리가 불쑥 들어왔다.

    야아옹.

    “나비야, 또 왔구나.”

    익히 아는 길고양이였다. 음식을 주어도 잘 먹질 않더니 최근엔 방까지 들어와 매튜의 마음을 녹였다.

    고양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매튜가 단번에 알아채며 말했다.

    “드론은 여기 없어. 이제 안 올 거다.”

    야옹?

    고양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양을 피우자 매튜의 표정이 노곤해졌다.

    고양이는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포섭 본능이 있었다. 특히 드론처럼 혼자 움직이는 물건에는 환장한다지.

    해서 나비도 종종 드론을 졸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어차피 드론을 잡을 만큼의 점프 실력이 없다는 걸 알기에 가만히 두곤 했었다.

    끼잉.

    나비가 드론을 달라는 듯이 바짓자락을 박박 긁자 매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건 애초에 네 장난감이라기엔 너무 비싼 애였어. 츄르를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다오.”

    나비의 턱을 슥슥 매만져 준 매튜가 츄르라도 챙겨 주려 창고로 향했다. 나비가 그 자리에 선 채로 그르렁거렸다.

    잠시 후, 고양이의 눈동자가 세로로 쪽 찢어지는가 싶더니 도로 창가로 번쩍 뛰어올랐다.

    저 멀리 화려한 마차 행렬이 오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