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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62)화 (62/177)

#62.

거기서 대체 같이 가자는 말은 왜 나온 걸까.

나는 맞은편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아키드를 바라보았다. 언제 침울했냐는 양 씨익 웃고 있는 그를 보니 조금 속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까까지는 먹구름이 잔뜩 낀 얼굴이었는데.’

감정 기복은 엘레나가 아니라 아키드에게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아키드를 자꾸만 힐끔거리자 그가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요 며칠 보기 너무 힘들던데, 많이 바쁘십니까?”

“아, 제가 이번 사업 때문에…….”

“많이 바쁘시구나.”

아키드가 언제 웃었냐는 양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옥구슬이 또르르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그림 같은 광경에 나도 모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으래도 이제 크게 바쁜 일은 좀 끝났어요.”

“아하, 이제 그럼 자주 볼 수 있겠네요. 다행이다. 걱정했습니다. 몸 상하는 건 아닐까, 하고.”

아키드가 느른히 웃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키드가 내 걱정을 해 주다니.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서 덕후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내가 미안해.’

나는 음란 마귀가 낀 나 자신을 탓하며 울상을 지었다. 뽀뽀 이후 자꾸 그 생각만 나서 그를 슬슬 피해 다닌 탓이었다.

‘1일 10 아키드’를 했던 나로서는 특단의 조치였다.

하지만 아키드가 서운해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잘 참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저렇게 웃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야 뭔들 어떠랴 싶었다.

내가 마음을 다스리며 수절해야지. 이렇게 귀여운 사람을 어떻게 안 보고 산단 말인가!

나는 그동안 내가 헛짓거리를 했다는 생각에 얕게 신음했다. 동시에 부끄러움도 잊고 아키드를 빤히 쳐다보며 헤벌쭉 웃었다.

그때였다.

“침 흘리겠구나.”

“흡.”

갑자기 들리는 냉랭한 음성에 나는 턱을 매만졌다. 다행히 침은 흐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엘레나가 삐딱하게 나와 아키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오셨어요?”

“그래. 오셨단다.”

엘레나가 쌀쌀맞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평소보다 더 저기압이었다.

왠지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는 생각에 슬슬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대공이 다쳤다는구나. 웬 아이를 구하려다가.”

“네?”

나는 대공이 다쳤다는 말에 두 눈을 홉떴다. 아키드 역시 놀라 엘레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스티그 섬에 대피하지 못한 아이가 있었던 모양이야. 연락이 늦은 것도 다쳐서였던 모양인데. 얼마나 다친 건지는 말이 없으니.”

엘레나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손톱을 잘근잘근 물었다.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시답잖은 농담을 적은 걸 보면 많이 다친 게 분명해.”

“농담이요?”

“왜 있잖니. 으레 하는 허풍.”

“아아.”

나는 평소의 데미안을 떠올리며 가볍게 수긍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가 많이 다쳤을 거란 걸 어떻게 단정하는 걸까?

내가 의아히 쳐다보는데 엘레나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일단 전령을 보내서 상태가 어떤지 슬쩍 확인해 오라고 지시를 내렸단다. 대공은 이런 면에서 은근히 미련하게 굴 때가 많으니까.”

“그런데 어머님은 아버님이 많이 다쳤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척하면 척이지. 대공은 예전에도 뭔가 숨길 때 말이 길어졌단다. 은근히 거짓말에 서툴거든.”

“예전이요?”

“그래. 어릴 때는 다리가 접질리고도 멀쩡한 척 허세를 떨다가 퉁퉁 부어서 며칠을 고생했어. 그것뿐이니? 꼴에 남자라고 나서다가…….”

엘레나가 대공의 과거를 줄줄 읊다가 멈칫했다.

곧이어 자신이 이걸 왜 설명하고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엘레나가 질색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니?”

“제 눈이 뭐, 어때서요?”

“굉장히 음흉해서 꺼림칙하구나.”

“아닌데요. 흥미롭게 쳐다보는 건데요. 왜 얘길 하다 마세요. 더 들려주세요, 옛날 얘기.”

내 너스레에 엘레나가 손부채질을 하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러곤 간단히 화제를 돌려 버렸다.

“어쨌든, 흙은 조만간 보내겠다는구나. 아직 중앙 쪽을 채집하지 못했다고.”

표정에서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완고함이 느껴졌다.

‘어릴 때는 꽤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야.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처음엔 둘 다 서로를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데미안이 은근히 에셀 공작을 경계하고 내게 감시를 시켰던 걸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특히 데미안 쪽은 확실히 엘레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심받고 싶어 하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게다가 엘레나도 이런 때를 보면 마냥 대공을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물론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 같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서 참 아리송한 관계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니?”

“아, 사병을 호위로 좀 쓰고 싶어서요.”

“사병을 왜?”

“테슬 지역에서 드론이 자꾸 파손되는 일이 있어서요. 진상규명차 다녀올까 해요.”

테슬 지역이라는 말에 아키드가 입을 열었다.

“북동쪽은 요즘 눈사태가 잦아서 위험할 텐데요.”

“안전한 길로 돌아서 다녀오려고요.”

“차라리 사람을 보내는 게 어떠십니까?”

“코비슈타인만 보내기에는 조금 못 미더워서요.”

코비슈타인은 아티팩트 개발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반면, 협상과 보고에는 재능이 없었다.

아키드가 그의 보고서를 일주일만 보았더라도 저런 말은 하지 않으리라. 그때 엘레나가 말했다.

“테슬이라면 최근에 눈사태가 크게 일어 주민 피해가 심했던 곳이기는 하지. 마침 원조품을 보내야 했는데 잘됐구나. 같이 다녀오자꾸나.”

“네? 어머님도요?”

“널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까. 잠깐 다녀온다면야 상관없겠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키드 네가 말이냐?”

엘레나가 뜻밖의 말을 들은 것처럼 되묻자 그가 말했다.

“예. 전에 두 분께서 안 계실 적에도 제가 하던 일인걸요.”

“하긴. 그때 네가 꽤 잘하긴 했지.”

“업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 정도 일은 제 선에서도 가능하니 대신 다녀오겠습니다.”

아키드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엘레나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흔쾌히 허락했다.

“그래. 그럼 둘이 다녀오도록 하렴. 사병은 충분히 보낼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네, 어머님!”

내가 힘차게 대답하자 엘레나가 못 미더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내 어깨까지 힘껏 부여잡으면서.

“아무나 따라가고 그러면 안 된다. 맛있는 음식 주는 사람 경계하고.”

제가 애예요?

생각해 보니 난 어린애였다. 그래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니 엘레나가 말했다.

“혹시라도 어리다고 무시하려 들면 일단 감옥에 넣고 보렴. 시원찮으면 끌고 와. 혼내 줄 테니.”

“네?”

그래도 다짜고짜 감옥에 넣는 건 좀…….

내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쳐다보자 그녀가 안 되겠는지 아키드에게 당부했다.

“아키드, 네가 로에나 간수 좀 잘하렴. 수상한 사람 있으면 일단 잡고 보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제까지 멍하니 있던 내가 정신을 번쩍 차리며 불퉁하게 물었다.

“어머님, 저 못 믿으세요?”

하지만 엘레나는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럼 귀엽게 생기지 말지 그랬니.”

“네?”

“너같이 귀여운 애들을 노리는 흉악범이 세상엔 많단다.”

이게 무슨 ‘모든 게 다 네가 귀여운 탓이야’ 같은 소리지?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아키드가 한술 더 떴다.

“동감합니다. 제가 잘 지키다 오겠습니다.”

아니, 아키드 너마저?

나는 갑자기 합심해 나를 보호하려 드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테이블 아래로 숨고 싶었다.

“그래. 네가 있으니 좀 안심이 되는구나.”

“저만 믿으세요.”

아키드가 듬직한 음성으로 다짐하자 엘레나가 흐뭇하게 웃었다. 이상함을 느끼는 건 나뿐이었다.

* * *

스티그 섬 하델루스 본진 막사.

하델루스 대공의 주치의가 처치를 마친 어깨의 붕대를 감으며 당부했다.

“상처를 봉합하기는 했지만 마비 성분이 있는 독니에 물린 터라 움직이기 힘드실 겁니다. 해독되려면 하루 정도 더 쉬셔야 합니다.”

“덕분에 쉬고 좋군.”

“그렇게 낙관하실 때가 아니십니다. 상처 부위가 깊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물리셨으면 즉사하셨을 겁니다.”

“안 죽었으면 됐잖아. 잔소리 그만하지.”

대공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셔츠의 단추를 채웠다. 괜찮다는 말과는 다르게 자꾸만 헛손질을 하자 곁에 있던 에단이 대신 셔츠를 여며 주었다.

“아이는?”

“무사합니다. 무릎이 조금 까진 것 말고는 아무런 상처도 없고요.”

“다행이군.”

대공이 당장에 보러 갈 듯이 일어나려 하자 에단이 그의 다치지 않은 어깨를 눌러 도로 앉혔다.

“무모하셨습니다. 세상에 마수의 사정거리 안으로 몸을 내던지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주치의의 말이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그러곤 험악한 표정으로 충언하자 대공이 피식 웃었다. 그도 제 목숨 아까운 줄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무모해질 수밖에 없는 광경을 눈으로 보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대공이 아이를 발견한 건 오염의 진원지 한복판이었다. 어떻게 그곳에서 아이가 버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요행이 아니었다는 것.

대공이 아이가 오염을 없애던 것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에단 너도 보지 않았나, 그 애가 오염을 막아 내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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