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61)화 (61/177)

#61.

“아키드 너무 좋아.”

“!!”

아키드는 로에나가 흘리듯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로에나는 본인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

얼굴에서 열이 확 오르는 기분이었다. 아키드는 제가 동요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하지만 로에나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 휘몰아쳤다.

‘아니거든! 내가 아키드 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예전에 그녀가 시녀들 앞에서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녀의 마음을 의심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로에나의 변화를 완전히 믿기 어려웠으니까.

한데 지금은 저 고백이 진심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새 손바닥 뒤집듯 변한 마음이었다.

어느 틈에 그의 마음 밭에 로에나라는 새싹이 움텄고, 이제는 몰라볼 만큼 쑥쑥 자라 있었다. 이미 그의 안에서 커져 버린 그녀였다.

또다시 기대하면 안 된다고 그어 놓은 선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였다. 그 선마저도 무용지물로 만들 만큼 로에나라는 존재의 힘은 대단했다.

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마음의 의미를 그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저도요.”

아키드가 꾹꾹, 감정을 눌러 담아 대답했다. 입 밖으로 내뱉으니 조금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로에나가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뭘요?”

역시나,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못 하는 반응이었다. 그게 다소 허탈했으나 상관없었다.

그 역시 응답을 바라고 한 대답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알까. 전령새를 선물한 게 그렇게 선한 의도가 아니었다는 걸.

곁에 두는 동물을 선물한 건 그것을 볼 때 저를 생각해 달라는 의미와 같았다.

자신의 머릿속이 그녀로 가득 찬 것처럼 그녀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가끔 그녀가 저만 봤으면 좋겠다는 끈적한 소유욕이 올라올 때면 스스로도 깜짝깜짝 놀랐다.

없으면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닿고 싶고, 닿고 있으면 그 속의 생각까지도 궁금해졌다.

아키드는 자신이 이렇게 욕심 많은 사람인 줄은 로에나를 만나고 처음 알았다.

특히 로에나가 낯선 남자와 있을 때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워지곤 했다.

에셀 소공작 때가 딱 그랬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무언가의 정체는 아키드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이런 속내를 알면 로에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녀는 그를 유독 순수하게 볼 때가 많았다. 실은 그는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도.

어려서부터 혹독한 세상에 던져져, 살아남는 것만을 걱정한 아이에게 순수는 사치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녀와 있다 보면 진짜로 순수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굴게 되었다. 그녀가 응석을 들어주니까.

“아키드 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좀 괜찮아요?”

아키드가 상념을 흩트리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로에나가 품에서 벗어나며 배시시 웃었다.

“네. 놀라셨죠.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서.”

로에나가 쭈뼛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방금 그가 충동적으로 입을 맞춘 것이 뒤늦게 수줍어진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충만한 만족감이 드는 걸 보면 그 자신도 어지간히 돌아 버린 것 같았다.

그가 막 에스코트를 자청하려던 때였다. 무언가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용기를 내듯 가까이 다가왔다.

촉.

뺨에 보드라운 무언가가 짧게 닿았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아키드가 넋이 나간 채 로에나를 쳐다보았다.

로에나는 저가 벌이고도 스스로 깜짝 놀라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찰나의 침묵 뒤에 새빨개진 얼굴로 로에나가 소리쳤다.

“자, 잘 자요!”

아직 밤도 아닌데.

“저,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로에나가 후다닥 할 말을 내뱉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재빠른 몸짓이라 붙잡을 새도 없었다.

“…….”

아키드는 제 뺨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할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목덜미가 뜨끈해지는 기분에 아키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 * *

순항이던 드론 사업에 차질이 생겼다. 유독 한 지역에서 잦은 파손이 발생하는 탓이었다. 나는 슈리의 보고를 받고 인상을 찌푸렸다.

“또 테슬에서 파손됐다고?”

이걸로 벌써 다섯 번째였다. 이쯤 되니 일부러 파손해 마석을 빼돌리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마저 들었다.

“네. 이번에도 누군가 마석을 파먹은 듯이 부수었다고 해요.”

“영상에서 뭔가 잡히는 것도 없대?”

“영상석도 마석의 일부라 여지없이 사라진대요. 아무래도 마석 사냥꾼이 생긴 모양이에요.”

마석 사냥꾼. 이 단어는 최근에 테슬 지역의 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단어였다.

드론에 내장된 마석만 후벼 파듯 빼돌리는 탓에 골칫거리였다. 비싼 줄 알고 하는 행동에 분통이 터졌다.

테슬 지역 관리자도 다섯 번이나 이러니 더는 드론을 보내지 말라고 연락이 왔다.

나는 관리자까지 속 썩이는 상황에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단순히 고객을 잃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야. 소문이라도 퍼지면 내 사업에 크게 지장이 있을 거라고.”

“그럼 어떻게 할까요? 아예 테슬 지역 관리자에게 강매라도 하실 생각이세요?”

슈리 너,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나는 당연히 내가 강매시키려 한다고 생각하는 슈리를 불퉁하게 쳐다보았다.

“난 갑질 같은 거 안 해.”

“그럼 어쩌시려고요?”

“잡아야지, 그 마석 사냥꾼.”

나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편지를 썼다. 조만간 찾아갈 테니 드론이 파손된 위치에 관한 정보를 정리해 두라는 내용을 적곤 붉은 새의 다리에 묶었다.

“키나, 조심히 다녀와.”

깍.

영리한 붉은 새의 이름은 키나. 아키드와 내 이름을 한 자씩 따서 지은 아주 멋진 이름이었다.

키나는 날개를 퍼덕이며 사라졌다. 슈리가 키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점점 덩치가 커지는 거 같아요. 처음 볼 적만 해도 저렇게 크진 않았던 거 같은데.”

“한창때인가 보지.”

“먹이를 줄이는 게 어때요? 특히 포도 좀 그만 주세요. 곳곳에 씨를 아무렇게나 뱉어서 처치 곤란이에요.”

“이제 보니 포도 씨 처리가 귀찮아서 우리 키나 눈치 주는 거야?”

내가 뾰족하게 되묻자 슈리가 입을 댓 발 내밀었다.

“아니이, 뭐 그렇다기보다는.”

맞네, 맞아!

내가 슈리를 째려보자 그녀가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어쨌든. 포도는 그만 주세요.”

“차라리 씨 없는 포도를 만들어 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셔. 세상에 씨 없는 포도가 어디 있어요?”

슈리가 펄쩍 뛰며 성화했다. 내가 살던 곳에선 능히 씨 없는 포도를 만들어 냈기에 딱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놀랄 일이니 어깨를 으쓱이고 멀어지는 키나를 응시했다.

처음 올 적보다 크긴 했지.

불사조의 피가 흐른다는 상인의 허풍이 맞기라도 한 듯 키나는 덩치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맹금류 중에서도 덩치가 큰 품종은 많기에 딱히 신경 쓰이진 않았다.

오히려 용맹하게 변하는 것 같아서 좀 마음에 든다고 할까?

유약하게 생기면 괜히 주변에 시비나 받고 다닐 테니 차라리 위협적인 게 나았다.

“어쨌든 우리 키나 눈치 주지 마.”

“키나 말고 슈리도 좀 챙겨 주세요.”

슈리가 저를 3인칭으로 지칭하며 투덜거렸다. 내가 질색하며 쳐다보자 어깨까지 으쓱이는 걸 보면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테슬 지역엔 언제 가시려고요?”

“어머님께 말씀드려서 기사단과 함께 가려고.”

현재 하델루스 대공이 출타 중이라 사병을 통솔하는 권한이 안주인인 엘레나에게 있었다.

마석 사냥꾼을 잡으려면 정예 기사 몇몇과 동행하는 게 좋을 터.

“말 나온 김에 어머님께 다녀올게.”

“조심하세요. 요즘 대공비 전하의 심기가 무척 좋지 않으시니.”

슈리가 내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며 당부했다.

그녀의 말대로 요 며칠 엘레나의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하델루스 대공에게서 연락이 뚝 끊긴 탓이었다.

흙을 구해 달라는 서신에 알겠다는 답장이 온 이후로 쭉 소식이 없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대공이 없어서 콧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엘레나도 슬슬 걱정되는지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하긴 균열이 일어난 데다 오염까지 번진 지역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대공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래도 걱정이 될 만한 상황이었다.

이럴 때 사랑스러운 반려동물이라도 품에 있다면 좀 안정이 되실 텐데. 나는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침실을 나섰다.

바로 그때.

“로에나?”

“헙.”

마침 외출했다 돌아온 아키드와 떡하니 마주쳐 버렸다. 요 며칠 그를 요리조리 피해 온 나로서는 무척 난감한 조우였다.

나는 그의 눈을 슬그머니 피하며 중얼거렸다.

“아, 아키드 님.”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아키드가 내게 다가와 다정히 물었지만 내 몸은 착실하게 슈리에게 붙었다.

슈리가 “작은 마님?” 하고 의아한 듯 불렀지만 도저히 아키드의 얼굴을 마주 보기 어려웠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어머님께 가려던 길이었어요.”

“그래요…….”

아키드가 덩달아 작게 대답했다. 우뚝 서 있는 걸 보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내가 딴청을 피우는 척 힐끔 쳐다보니 그의 표정이 무척 침울했다. 아무래도 내가 피해 다니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키드가 그 말만 남기고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힘없는 목소리와 축 처진 어깨를 보니 덕후로서 마음이 미어져 나도 모르게 아키드를 붙들었다.

“가, 같이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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