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60)화 (60/177)
  • #60.

    쿵! 쿵!

    나는 창문에 이마를 박으며 콧김을 훙훙, 내뿜었다. 잠깐만 보려던 게 대놓고 감상하게 된 건 모두 아키드 때문이었다.

    ‘저 수줍어하는 표정을 좀 봐!’

    아키드가 민망함에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머리를 박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보러 오길 잘했어. 이번에는 어떻게든 참아 볼까 싶었는데, 참기는 무슨. 이걸 어떻게 참아?’

    나는 이미 몇 차례 해링턴 백작에게 주의를 받은 상태였다. 해서 해링턴 백작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조금 찔렸다.

    하지만 안 보면 죽을 것 같은데 어쩌라고. 사람 하나 살린 셈 치면 되잖아?

    나날이 낯짝이 두꺼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의 덕질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키드뿐이리라.

    그사이 짐을 챙기고 나온 아키드가 내게 말을 걸었다.

    “로에나.”

    그제야 현실을 자각한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키드는 이런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일부러 수업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죄송해요. 지나가는 길에 잠깐만 보고 가려 했는데.”

    내 변명에 아키드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잠깐이 아니던데요. 아까부터 온 거 다 알았어요.”

    “헉, 진짜요?”

    티 안 나게 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내 은신술이 무척이나 허접했다는 사실에 머쓱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수련했을 것을.

    내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아키드가 괘념치 말라는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괜스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멋쩍게 중얼거렸다.

    “해링턴 백작이 또 한 소리 했겠네요. 수업을 자꾸 방해해서.”

    “괜찮습니다. 별말 없었어요.”

    “그래요?”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아는 그라면 분명 또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해링턴 백작은 전대 가주 시절부터 가신으로 있던 장로였다. 나이가 많아 은퇴 후 자문단으로만 활동하던 그를 다시 부른 건 아키드의 체질 때문이었다.

    마법학에 능통한 해링턴 백작이 아키드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여긴 엘레나의 의견이었다.

    다행히 흔쾌히 허락한 해링턴 백작 덕에 아키드의 수업은 순항이었다. 물론 나라는 방해꾼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나는 해링턴 백작의 꼬장꼬장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못 미더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키드가 말을 이었다.

    “이제는 초연해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하긴 내가 통 말을 들어 먹질 않으니 그가 마음을 고쳐먹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내게서 아키드를 볼 수 없게 만들 거라면 차라리 독약을 달라!

    나는 속으로 다소 과격한 구호를 외치며 보이지 않게 주먹을 쥐었다.

    그때 해링턴 백작이 뒤이어 방에서 나왔다. 표정을 보니 아니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눈을 찌푸린 채 나를 불렀다.

    “대공자비님.”

    “안녕하세요, 해링턴 백작.”

    내가 공손하게 예를 갖추자 그가 흰 수염을 쓱쓱 매만지며 말했다.

    “수업을 방해하면 곤란하다고 했을 텐데요.”

    “서재로 가는 길에 잠깐…….”

    “여긴 대공자비님의 서재와 먼 곳입니다만.”

    “아, 그래요? 가까운데.”

    내가 딴청을 피우자 해링턴 백작이 딴죽을 걸었다.

    “변명을 할 거라면 창의력을 발휘해 보심이 어떠신지요. 서재 핑계는 너무 뻔합니다.”

    역시나 노련한 해링턴 백작은 내 변명엔 이미 도가 튼 모양이었다. 수업에 진심인 그에게 나는 그야말로 방해꾼일 뿐.

    나를 봐줄 생각이 없는 해링턴 백작의 반응에 머리를 요리조리 굴렸다.

    내 남자 좀 훔쳐본 게 잘못이라면 난 이미 중죄인이었다.

    하지만 역시 내가 잘못한 건 사실이라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어 한 수 접고 들어갔다.

    나는 양손을 마주 잡고 선량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부턴 주의할게. 미안해요, 해링턴 백작.”

    하지만 백작은 강적이었다.

    “아뇨.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다음부턴 커튼을 달아 두겠습니다.”

    “무어?!”

    “이렇게 계속 방해하시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물리적으로라도 막아야지.”

    해링턴 백작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이 단호했다. 그의 청천벽력 같은 선언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래. 내가 좀 과하기는 했지.

    나도 내 죄를 알고 있기에 무어라 더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내 어리석은 과거를 되새기며 수업에 열중하는 아키드를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을 삼키는데 아키드가 나섰다.

    “굳이 커튼을 달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대공자님?”

    “제가 좀 더 집중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부인을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아키드…….

    나는 감동한 표정으로 아키드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해링턴 백작이었다.

    “대공자비님이 올 때마다 기운이 흐트러지지 않습니까.”

    “그건 그저 수련이 덜 되어서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잘만 집중하시는 분이.”

    “아무래도 수업 시간이 긴 탓도 있는 듯합니다.”

    아키드가 은근하게 수업 핑계를 대자 해링턴 백작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아키드가 대놓고 수업 핑계를 댈 줄 몰랐기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로르크 남작에게 쩔쩔매던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의사 표현이었다.

    ‘오구오구, 내 새끼. 하고 싶은 말 다 해.’

    마음 같아서는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격려해 주고 싶었다.

    “허허.”

    뒤이어 해링턴 백작이 흰 수염을 쓸며 해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언뜻 “역시 일부러 창가 쪽에……” 하고 중얼거렸으나 무슨 의미인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내가 눈빛으로 애절함까지 쏘아 주자 해링턴 백작이 못 이기는 척 중얼거렸다.

    “대공자님께서 그러시다면야 일단 보류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음번에 또 기운이 흐트러지신다면 곧장 커튼을 달겠습니다.”

    “예.”

    “수업이 길었다니 무척 유감이군요.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지루하셨나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백작.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요.”

    해링턴 백작의 책망에 아키드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위로가 안 되었는지 백작이 “떼잉” 하는 신음을 뱉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한눈에도 섭섭한 티가 팍팍 나는 모습이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백작.”

    “예. 늙은이는 눈치껏 빠져 드리지요.”

    그 말과 함께 해링턴 백작이 유유히 사라졌다. 뒷모습마저 삐친 게 티가 났다.

    나는 내가 그를 내쫓은 것 같아 잠시 개미 똥만큼 미안해졌지만 그뿐이었다.

    아키드의 얼굴을 보자마자 백작은 생각도 안 났다. 나는 아키드를 찾아온 목적을 상기하며 말했다.

    “선물 잘 받았어요. 새는 대체 언제 구매하신 거예요?”

    “주말에 외출을 나갔다가 마침 눈에 띄어서요. 오늘 중으로 보낸다더니 벌써 도착했나 보군요. 전령새는 마음에 드십니까?”

    “네! 마음에 들어요. 새가 영리하게 주인도 알아보더라고요.”

    나는 나를 노려보던 새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건 분명 주인을 맞이하는 눈빛이었다. 아키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요?”

    “네. 제가 노려보는데도 시선 하나 안 피할 정도로 용맹하기까지 해요.”

    분명 크게 될 새였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 아키드가 보낸 새의 위상은 높아져 있었다. 다름 아닌 그가 준 전령새였으니까.

    아키드가 선물한 보람을 느낀 듯 느른히 웃었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저는 매번 아키드 님께 받기만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주고 싶어서 드린 건데요.”

    “그래도. 저도 뭔가 드리고 싶은데, 뭐가 있을까요?”

    나는 눈을 빛내며 뭐든 말해 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아키드가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생각난 게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모습에 나는 그가 편히 말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재촉했다.

    “괜찮으니 뭐든 말씀해 보세요. 다 들어 드릴게요.”

    “그럼…….”

    아키드가 내 말에 용기를 얻은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돌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뭘, 어찌할 새도 없이 뺨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촉.

    귓가로 달콤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나는 그대로 굳은 채 아키드를 바라보았다. 현실감이 없는 감촉과 소리였다.

    ‘방금 내 뺨에 뭐가 닿은 거지?’

    실수였다기에는 정확히 뺨을 겨냥한 뽀뽀였다. 생경한 감촉이 뺨을 간질였다.

    말문이 막혀 가만히 서 있으니 아키드가 입가를 매만지며 수줍게 중얼거렸다.

    “전 이거면 돼요.”

    “…….”

    “전부터 꼭 해 보고 싶었습니다.”

    “…….”

    “실은 부러웠거든요. 굿나잇 뽀뽀.”

    뚝―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시에 2차 심쿵사를 당한 나는 몸을 크게 휘청였다.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로에나?”

    아키드가 나를 붙들어 간신히 엉덩방아를 면한 내가 심장에 손을 얹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곧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네? 의, 의원을!”

    아키드가 당황해 의원을 부르려 하기에 그의 손을 가만히 붙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조금만 이러고 있으면 될 것 같아요.”

    “아, 네.”

    아키드가 나를 부축한 채로 가만히 기다렸다. 내가 의지할 수 있도록 몸에 힘까지 주면서.

    나는 심호흡을 하며 놀란 속을 진정시켰다.

    오늘의 기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건 마치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었다.

    아니, 애초에 나는 아무것도 준 게 없었다. 받기만 했을 뿐.

    최애한테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될까. 주기만 해도 행복한 덕후는 울고 싶어졌다.

    “아키드 너무 좋아.”

    나는 속으로 날것에 가까운 고백을 내뱉었다. 설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