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흙을 말이냐?”
엘레나는 난데없는 흙 타령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성실히 정령들의 의사를 대신 전달했다.
“네. 이왕이면 오염된 땅과 죽은 땅 모두에서 흙을 추출해 달래요. 그게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흙을 구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오늘 바로 전령을 보낼 테니 잘 부탁한다고 전해 주련.”
― 얘가 우리 괴롭혀. 혼내 줘, 제발.
정령들이 엘레나의 주변에 모여들며 읍소했다.
“이건 또 무슨 행동이니?”
“걱정하지 말래요.”
― 거짓말쟁이!
“그렇구나. 난 또 뭔가 부탁하는 줄 알았지.”
― 부탁한 거 맞아! 얘 좀 혼내 줘! 부탁이야, 하인트의 딸아!
정령들이 아무리 말한들 나밖에 듣지 못하니 그들의 읍소가 전해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제풀에 지친 정령들이 이번에는 아키드에게 다가갔다. 내가 아키드에게 약하다는 걸 알고 하는 약은 행동이었다.
“어딜!”
나는 정령들이 아키드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그의 앞을 막아섰다. 흡사 레이디를 지키는 호위 기사처럼 재빨랐다.
― 이잇, 분하다!
정령들은 아키드에게 다가가지 못하자 분한 마음에 내 머리카락을 먹는 짓을 계속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아키드가 중얼거렸다.
“정령들과 사이가 좋네요.”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제가 괴롭힘당하는 거 안 보이세요?”
― 누가 누굴 괴롭혀!
“그렇다기엔 입가에 미소가 가시질 않아서.”
아키드가 씨익 웃으며 제 입가를 손으로 쭉, 올렸다.
“아.”
나는 그제야 정령들을 놀려 먹으며 히죽거린 내 입꼬리를 스리슬쩍 내렸다. 역시 눈치 빠른 아키드였다.
“그나저나 오늘 티타임을 주최한 이유를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 맞다!”
나는 그제야 내가 이 모임을 조성했다는 걸 떠올리고 한나에게 눈짓했다.
이윽고 한나가 트롤리에 무언가를 들고 오자 엘레나가 바로 알아보았다.
“흠, 풍등 재고가 남아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제가 코비에게 부탁해서 하나 더 만들었어요.”
“혹시 그때 꽃씨를 뿌리지 못한 게 아쉬웠습니까? 말씀하시지.”
아키드도 풍등을 알아보곤 내가 뒤늦게 씨앗을 뿌리고 싶어 하는 줄로 오해했다.
나는 야심 차게 준비한 사업 아이템을 손으로 받치며 히죽 웃었다.
“아뇨. 잘 보세요. 풍등 이벤트 때 쓰던 것과는 조금 다르니까.”
내가 코비슈타인의 발명품을 보자마자 제일 처음 떠올린 건 드론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코비슈타인에게 의뢰한 영상석을 풍등에 붙이는 시도를 해 보았다.
엘레나가 물건을 요리조리 살피며 중얼거렸다.
“글쎄다. 외관이 좀 더 작아진 거 말고는 차이를 모르겠는데.”
“아! 여기 렌즈 비슷한 게 박혀 있군요. 원래는 씨앗 구멍이던 곳이었는데.”
아키드가 예리한 눈썰미로 풍등과의 차이점을 발견해 냈다.
내 남자의 기민한 눈치에 감복한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거로 사업을 해 볼까 해요.”
“사업이라고?”
“네. 마침 딱 시기가 좋거든요.”
* * *
하델루스령은 북부 중에서도 험준한 영지에 속해 조난 사고가 잦았다.
특히 지난 정령 사태로 인한 기상이변으로 피해를 본 지역이 많았다.
하델루스령 북동쪽에 위치한 테슬 지역은 산맥을 끼고 있어서 피해가 더 컸다.
산맥을 지나던 사람들이 눈사태에 피해를 보는 경우는 매해 일어난 데다 올해는 이례적인 폭설로 테슬 지역이 오랜 시간 고립되었었다.
이 모든 게 정령의 짓이란 걸 알 턱이 없는 관리자는 골머리만 썩고 있었다.
폭설은 멈췄지만 아직 위험한 지대가 많아서 주민들의 주의가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델루스 성에서 웬 소포가 도착했다. 소포에는 기이한 형태의 물체가 들어 있었다.
“드론?”
관리자가 포장지에 적힌 마도구의 이름을 발음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마도구인데 한눈에도 고가로 보이는 터라 만지기도 황송했다.
다행히 공문과 함께 설명서가 동봉되어 있었다. 관리인이 공문을 읽었다.
[이번 기상이변으로 영지 내 피해가 많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델루스 가문에서 특별히 마도구를 개발했습니다.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운 곳을 탐사할 수 있는 영상 기능이 탑재된 마도구이니, 산사태가 일어날 조짐을 미리 파악하거나 눈 내린 도로 상황을 살피는 데 유용할 것입니다.
한 달간 시범 운행하며 계속 사용을 원하실 경우, 신청서를 작성해 아래 주소로 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신청서에는 마도구 구입 시 드는 비용과 함께 정액제로 운영되는 렌털 서비스에 관한 안내가 적혀 있었다.
“히익, 공이 대체 몇 개야?”
관리인이 마도구의 가격에 깜짝 놀랐다. 테슬 지역의 예산을 싹싹 모아도 사기 힘든 가격이었다.
그에 반해 한 달 대여 비용은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당장 산사태 피해로 드는 복구 비용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가격이었다.
정말 이게 효과가 있다면야 정액 형식으로 렌털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특히 테슬 지역은 하델루스령에 속해 혜택가가 따로 있어 더욱 저렴했다.
“흐음, 일단 써 볼까.”
관리인이 드론의 설명서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 * *
오오, 역시 대박이야.
나는 내 개인 창고에 척척 쌓인 금괴 상자를 보며 히죽거렸다. 시범 운행한 지 2주 만에 렌털을 하겠다는 주문이 속출했다.
설계자인 내 몫의 비율이 제법 커서 수수료가 아주 쏠쏠했다.
그야말로 사업은 대성공!
상품을 출시하기 전에 미리 영지 내 관리자에게 한 달 무료 서비스를 동원한 게 큰 효과를 얻었다.
특히 렌털 서비스가 큰 인기를 끌었다. 대체로 마도구의 가격이 고가인 데다 드론은 영상 기능까지 탑재해 재료 가격만 해도 상상 초월이었다.
이대로 판매를 하면 절대 아무도 사지 않을 것 같아서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렌털 시스템이었다.
‘내가 살던 곳에서도 고가의 가전제품을 렌털로 저렴하고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게 했지.’
오히려 제품을 구매하는 것보다 렌털 서비스를 받는 게 훨씬 이점이 많았다.
슬슬 타 영지에서도 입소문이 퍼지고 있으니 잘만 하면 내 묵은 빚도 청산할 수 있으리라.
쌓여 있는 금덩이들을 보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른 심정이었다.
덕질은 덕질대로 평탄하고, 사업은 사업대로 팡팡 터지니 신이 나서 어깨춤이 절로 났다.
이 세계에 렌털 시스템이 없던 게 천운인 데다 유능한 부하를 두어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았다.
코비슈타인의 고도의 기술이 가미된 드론이 매일매일 돈을 쓸어 담고 있었으니까.
내가 개인 창고에서 나와 침실로 촐랑촐랑 걸어가던 때였다. 아실이 나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또 개인 창고에 다녀오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자주 드나들었던가.
아실까지 알 정도면 내가 창고를 자주 찾아가긴 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저녁에 자기 전에 한 번 들르기는 했군.
나는 속물로 보이지 않게 자중해야겠다 마음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실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서재 공사가 다음 주 즈음이면 완공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아마 주말부터는 사용이 가능할 듯합니다.”
“드디어 완공이구나.”
“예. 그리고 따로 부탁하신 대로 안쪽에 있는 방에는 잠금장치도 설치해 두었습니다. 여기 열쇠입니다.”
아실이 황금빛 열쇠를 내밀었다. 내가 열쇠를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지난번 다이어리 때처럼 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럼 무지무지 곤란해.”
험악한 표정으로 추궁하자 아실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골렘의 뼈는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기능이 있어서 정해진 마스터키가 아니면 열 수 없습니다.”
“그럼 힘으로 부수려고 하면?”
“글쎄요. 골렘의 뼈는 무척 단단해서 부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겁니다. 따로 산화제를 제작해서 녹여야 합니다.”
“아주 완벽해!”
나는 지난번에 하델루스 대공이 마법을 사용해 내 다이어리를 훔쳐본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미친 사람이 남의 다이어리를 열기 위해 고도의 해금이 필요한 마법을 사용할 거라고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어린애 일기를 훔쳐보려고!
이번에는 아무도 내 시크릿 존에 접근할 수 없게 시공부터 만반의 준비를 했다.
내 금괴 상자 하나를 털어서 만들 정도로 아주 공을 들인 서재란 말이다.
“개인 창고와 같은 방식이니 누군가 함부로 들어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응. 수고했어, 아실.”
“예.”
아실이 꾸벅 인사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속으로 서재에 전시할 내 컬렉션들을 생각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막 침실의 로비 문에 손을 댔을 무렵이었다. 저 멀리 아리아 백작 부인이 오는 게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한눈에도 번쩍번쩍한 보석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저게 다 얼마인가 싶어 입을 쩍, 벌리고 있자니 그녀가 내게 다가와 꽃다발을 내밀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보내는 축하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