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56)화 (56/177)

#56.

‘다들 정령들이 굉장히 근엄한 존재인 줄 아는데 전혀 아니에요. 얼마나 수다스러운지 귀를 떼어 내고 싶을 때가 많아요.’

‘본래부터 나비의 형태인가요?’

‘계약자의 속성마다 다르대요. 제가 좀 더 힘에 익숙해지면 형태도 변형이 가능하다고.’

아키드는 재잘거리며 정령에 관해 이야기하던 로에나가 떠올랐다.

그들이 수다스럽다는 걸 생각해 낸 아키드가 검지를 입가에 대었다.

“쉿.”

― …….

“오늘 본 건 모두 비밀이야.”

작게 읊조리는 말에 손끝으로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긍정의 의미라고 느낀 아키드가 피식 웃었다.

바로 그때, 장난기가 발동한 정령들이 로에나를 아키드의 품으로 밀었다.

데구르르 굴러와 그의 품에 안착한 로에나가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더욱 파고들었다.

아키드가 파드득 놀라 몸을 굳혔다. 침대가 넓어 뒤로 물러날 수도 있고, 뭣하면 로에나를 밀어낼 수도 있는데 아키드는 가만히 있었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 뜻 모를 감정이 깃들었다. 품 안의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로에나에게선 좋은 냄새가 나는 듯했다. 아키드는 잠시 그 향기를 음미하다 충동적으로 로에나의 정수리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이상하게 로에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꾸만 닿고 싶고, 말 걸고 싶고, 웃게 하고 싶어졌다.

아키드가 아까보다도 대담하게 로에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제 품으로 파고 들어온 로에나라서, 하필 또 깊게 잠들어서 그의 행동을 과감하게 만들었다.

그가 가만히 로에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프로디움에서 자야 한다고 할 때 로에나가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도 각방이라니…… 수절하는 것도 아니고.’

몹시 실망한 듯한 로에나의 혼잣말을 회상하니 웃음이 났다.

자신이 쓰러진 탓에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는데 그녀는 알지도 못하고 잠을 자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아키드는 합방을 아예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뒤늦게 입적한 자신의 정통성을 공고히 만들기 위한 조혼이었으니까.

이미 하델루스가와 에이프릴가에서 성인이 되기 전에는 각방을 쓰기로 결혼 전에 합의를 끝냈다고 들었다.

그랬는데. 막상 이렇듯 품으로 온기를 느끼고 나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미 결혼 서약서로 단단히 문서화해 둔 상태라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고.

“이걸로 참아 주세요.”

아키드가 나직이 속삭이며 로에나의 콧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내뱉은 말과는 달리 본인은 전혀 참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 * *

새가 짹짹거리며 아침이 왔음을 알렸다. 나는 폭신한 이불의 감촉과 왠지 모를 좋은 향기에 이불 속으로 더더욱 파고들었다.

따뜻해.

이대로 좀 더 잠을 청하려는데 이불이 슬금슬금 내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나는 바르작거리는 이불을 붙잡아 팔로 단단히 고정했다. 온기가 사라지는 게 싫어서였다.

그러자 이불이 움찔하며 굳었고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나도 덩달아 멈칫했다.

‘어라, 이불이 어떻게 움직이지?’

이불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움직이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잠결이라 눈을 뜨기가 힘들어 손으로 더듬더듬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 누군가 내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로에나, 혹시 일어난 거예요? 아님 이것도 잠버릇인가.”

“!!”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분명 아키드의 목소리인 탓이었다. 그리고 마주친 얼굴은 역시나…….

“처, 천사님?”

“예?”

“아.”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줄 알았다가 아키드라는 걸 깨달았다.

‘오, 아직도 꿈인가 봐.’

나는 아키드가 내 침대에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헤실거렸다. 비록 꿈이라 해도 아키드가 내 침대에 있어서 너무 좋았다.

게다가 자고 일어난 아키드의 모습은 내 상상이라지만 엄청난 파급력이었다.

어쩜 뻗친 머리도 막 드라이한 것처럼 저렇게 잘 어울리지?

꿈속이긴 해도 나는 그 모습을 담아 두려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속으로 한껏 주접을 터트리며 그의 청순한 모습을 대놓고 감상하는데 점점 아키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잠시 후, 그가 중얼거렸다.

“너무 그렇게 보면 위험해요…….”

귀까지 새빨개진 아키드가 내 시선이 민망한지 쭈뼛거렸다. 그 모습이 더 위험하다는 걸 아키드는 알까?

“헉!”

나는 그제야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완전히 자각했다. 꿈이라기에는 눈앞의 아키드가 너무도 생생했다.

귀까지 새빨개진 아키드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내가 그를 꽉 껴안고 잠들었던 탓에 우리 사이의 거리가 무척 가까웠다.

심지어 아까 내가 더듬던 이불은 아키드의 등이었다. 어쩐지 이불이 눈에 띄게 딱딱하다 싶었는데.

아키드는 아프고 난 다음이라 아주 얇은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야말로 속이 언뜻언뜻 비치는 아주아주 위험한 모습이라는 거.

모든 상황을 파악한 내가 꽥, 외치며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미, 미, 미, 미안해요!”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축지법을 사용했다. 그 정도로 아키드의 품에서 벗어난 내 행동은 재빨랐다.

그때 아키드가 허전해진 자리와 멀어진 나를 어딘지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왜 아키드랑 한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거지? 어제 난 분명히 엎드려서 잠들었던 거 같은데? 한나가 옮겼나? 완전 오예……가 아니라 아키드가 날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하면 어떻게 하지? 아픈 사람의 침대를 탐내다니, 최악이야!’

혼란스러워서 허둥지둥하는데 아키드가 몸을 일으키며 다소 불만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렇게 도망갈 것까진 없었는데.”

아뇨. 지금 저는 아키드에게 너무 위험해요.

나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물었다.

“제, 제가 혹시 실수했어요?”

“실수요?”

아키드가 의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수할 게 무엇이 있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갑자기 자다가 뽀뽀를 했다든가. 아니면 입에 넣고 와랄랄라 해 버렸다든가. 숨 막히도록 안거나……. 아, 이건 이미 했나. 흑. 젠장.’

목구멍으로 나오지 못할 말들이 속에서 와르르 쏟아졌다. 걸리는 일이 너무 많은데 무엇 하나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쨌든 아픈 사람의 침대를 뺏어서 잠든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뿐이야? 보아하니 아키드의 얼굴이 새빨간 건 내가 너무 꽉 껴안아서인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악개(악질 개인 팬) 같은 짓을 해서 울적했다. 내 덕질 철칙에 위배된 행동이었다. 그때 아키드가 말했다.

“실수 안 했습니다.”

“정말?”

“네. 정말로.”

아키드가 나를 안심시키며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내가 슬금슬금 다가가자 아키드가 내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딱히 같이 자서 불편한 건 없었습니다. 절 옆에 두고 정말 잘 자던데요?”

그, 그거야 어제 피곤했는지 나조차 내가 침대로 기어 올라온 것도 몰랐으니까.

만약 알고 그랬다면 심장이 터져서 잠도 못 잤을 거 같았다.

아키드가 씨익 웃으며 머리를 정돈하던 손으로 내 볼을 쓰윽 매만졌다. 잠시 스쳐 간 손길인데 이상하게 수줍어졌다.

“오히려 좋았어요. 누구랑 같이 밤을 보낸 건 처음이에요.”

최애가 저와의 밤이 좋았대요.

나는 아키드의 말을 내 멋대로 해석하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대체 그 오해성 발언은 뭔가요?

후, 살아 있길 잘했어.

내가 속으로 온갖 망상을 하고 있는데 아키드가 말했다.

“그래도 결혼 전에 한 약속이 있으니까. 합방은 아직.”

“네? 결혼 전에 한 약속이라뇨?”

나는 합방은 아직이라는 말에 망상도 잊고 캐물었다.

“아, 에이프릴 후작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았습니까?”

내가 아예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자 아키드가 말했다.

“아, 못 들으셨군요. 저는 로에나가 알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합방 말이에요. 성인이 되기 전에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 밖에도 에이프릴 후작이 요구한 사항이 꽤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뭐시라?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아예 말을 잃었다. 결국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듯 상체를 침대에 쓰러뜨렸다.

“로에나!”

아키드가 놀라 나를 부축했으나 나는 이미 억장이 무너져서 일어날 수 없었다.

각방이라니! 성인이 될 때까지 각방이라니!

거, 후작 양반,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이오!

어쩐지 사이가 좋아져도 합방 얘기가 없더라니, 결혼 전에 미리 수를 쓴 모양이었다.

분명 극성맞은 에이프릴가 사람들이 나 몰래 그런 결정을 한 듯했다.

아무래도 내가 갈기갈기 찢어야 했던 건 이혼합의서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흐흑, 말도 안 돼.’

내 슬기로운 덕후 생활에 왜 이렇게 훼방꾼이 많아!

* * *

“누가 보면 밤새 앓은 게 너라고 믿겠구나.”

엘레나가 나를 보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는 그녀에게 반응할 기력도 없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금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아요, 어머님.’

여전히 아키드가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강제 소박행 기차를 타고 약 7년을 기다려야 한다니.

너무 까마득한 시간인 데다 그사이에 있을 내 데드 플래그도 찾아 없애야 했다.

이런 식으로 오래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싶진 않았는데.

그사이 엘레나가 아키드에게 물었다.

“몸은 좀 어떠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