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55)화 (55/177)
  • #55.

    대공가에 돈이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하델루스 대공이 내게 고가의 물품을 척 내준 게 신기했다.

    이렇게 돈을 잘 쓸 거면 애초에 팍팍 써 주면 좀 좋은가?

    매번 돈 많이 쓴다고 눈치 줬던 걸 떠올리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거리자 제로니스가 말했다.

    “하긴 저 돌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면 이미 돈이 많겠군요. 애초에 매물도 나오지 않으니.”

    “그렇지요.”

    “제가 괜히 대공자비님을 불편하게 했나 봅니다. 걱정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걸고 다니십시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나는 이미 목에 돌을 얹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목이 뻐근한 것 같아요.”

    그러자 엘레나가 콧방귀를 뀌며 응수했다.

    “대공자비씩이나 돼서 고작 섬 하나 가격에 뻐근해할 것까지야. 평소처럼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렴.”

    네에? 섬 하나 가격이요?

    이번에는 목에 섬을 달고 다니는 것 같은 중압감이 느껴졌다.

    이 귀한 걸 덜렁덜렁 걸고 다녔다니. 방에 모셔 두고 다녀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정령사라는 걸 숨기려고 끼고 다니는 거니 방에만 모셔 두는 건 안 될 일이었다.

    나는 하마르가 잘 있는지 연신 만지작거리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부담 갖지 말렴. 어차피 대공의 창고에 두어 개 더 있으니까.”

    “두어 개 더 있다고요?”

    “잃어버렸다고 하고 하나 더 달라고 해도 줄 거란다.”

    오, 그것도 좋은데요?

    내가 눈을 빛내자 엘레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부연 설명했다.

    “돈 얘기만 나오면 눈이 초롱초롱해지는구나. 대체 그 돈들은 다 어디다 쓰는 건지.”

    “다, 필요한 데에 쓰고 있어요…….”

    나는 차마 코비슈타인에게 덕질용 아티팩트를 잔뜩 의뢰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보나 마나 쓸데없는 것에 돈을 썼다고 타박할 테니 미리 말을 아끼는 것이다.

    물론 그 아티팩트를 내 덕질에만 이용할 생각은 아니었다.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계획도 세우고 있으니 나중엔 내 뜻을 모두가 알 터였다. 엘레나가 말했다.

    “어차피 마수가 들끓는 북부에 이지를 상실한 드래곤이 출현하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니까.”

    그러자 제로니스가 긍정하며 고개까지 끄덕였다.

    “하긴 대공은 직접 잡아도 봤으니 하마르가 바닥에 굴러다녀도 별생각을 안 할 수도 있겠네요.”

    나는 하마르를 굴러다니는 돌에 비유하는 두 사람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래서 부자들이란.

    나는 두 사람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 * *

    달과 별이 하늘을 지배하는 시간. 어둠이 짙게 깔리자 스티그 섬에서 허락받지 않은 배가 조용히 출항했다.

    파도 소리에 묻혀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에 짙은 어둠이 깔려 은신이 쉬웠다.

    배가 지나가는 걸 알 수 있는 길은 달빛에 흔들리는 물결을 읽는 일뿐이었다.

    유유히 빠져나간 배가 육지에 다다르자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들이 내렸다.

    육지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동일한 후드를 쓴 자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방금 온 사내들에게 물었다.

    “찾았나?”

    “아뇨. 스티그 섬을 여러 차례 돌았으나 흔적은 없었습니다.”

    “분명 이곳에서부터 오염이 시작됐다면 제례 흔적이 있었을 텐데.”

    그가 손으로 턱 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소매가 스르륵 흘러내리자 오른쪽 검지에 화려한 호갑투를 낀 것이 보였다. 귀족들이나 낄 법한 호화로운 장식품이었다.

    그가 슬그머니 호갑투를 벗자 안쪽 마디에 높은음자리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문신을 확인한 사내들이 긴장한 얼굴로 보고를 계속했다.

    “좀 더 깊은 곳까지 가려면 지원이 필요합니다. 마수의 개체가 상당수 증가해 접근조차 어려운 곳이 많아요.”

    “그건 안 돼. 하델루스 대공이 도착한 이상 최소의 인원으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의 날카로운 대답에 사내가 끙, 신음을 삼켰다.

    “어차피 그들은 오염의 진짜 원인도 모르지 않습니까? 고대인이 아닌 이상 우리가 오염과 관련 있다는 걸 아는 이도 드뭅니다.”

    “그러니 더더욱 조심해야지. 잘 숨겨 온 조직의 비기를 호사가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게 해선 안 되니까.”

    “지금껏 잘 숨겨 오지 않았습니까? 작금의 황실이 알고 있는 오염 원인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스티그 섬의 현상을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재차 말대답을 하는 것에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수도에 있는 온실 속 황실이야 그럴 수도 있지만 북부의 대공은 또 모르지. 그 집안은 음흉하기 짝이 없으니까.”

    “예?”

    “하델루스 가주만 볼 수 있는 가문의 비전(祕典)에는 황가에도 없는 이야기가 많으니까. 자파르시아가 특별히 아꼈던 인간답게 말이야.”

    암룡 자파르시아가 대륙을 보호하던 당시 그와 계약한 인간 네 명이 있었다.

    황금의 하인트.

    흑암의 하델루스.

    정열의 에셀.

    그리고 지금은 그 가문의 자취도 알 길이 없는 사라진 가문, 별의 루이스.

    이들은 암룡과 계약해 각각 대지, 어둠, 불, 빛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루이스 가문이 자취를 감추면서 빛 속성 마법이 약화되었다.

    그 덕에 희귀해진 빛 속성 마법사는 오늘날 대륙 어디서든 환영받는 귀한 인재였다.

    물론 루이스의 피를 소량이나마 물려받은 혼혈들이었다.

    그것마저도 온전한 빛 속성을 구사하지는 못해서 의술에 접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뜻 신성력과도 힘이 비슷해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마법인지, 신성력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여하튼 이 넷 중 흑암의 하델루스는 정보 길드가 탄탄한 가문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조심하지 않으면 그 어둠에 먹힐지도 몰랐다.

    그가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사내를 보고 작게 혀를 차곤 단검을 들어 제 손가락을 찔렀다.

    붉은 피가 음표를 적시자 사특한 힘이 휘돌았다.

    사내들이 “오오” 신음하며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혈향을 맡기만 했는데도 전신에 힘이 샘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느새 그들의 흰자위가 검게 물들었다.

    그가 유리병에 제 피를 담아 건네며 말했다.

    “정 따돌리기 어려우면 이 피를 하델루스 대공이 있는 막사에 몰래 뿌려라. 한동안은 우리 흔적을 찾지 못할 테니.”

    “감사합니다!”

    “이것만 명심해.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가 먼저 제물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면 잃어버린 고대의 광영을 되찾을 테니.”

    “존명.”

    사내가 부복한 후 일어나 도로 배 위에 올라탔다. 아까의 불안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어느새 그들이 탄 배는 새까만 바다에 삼켜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

    * * *

    아키드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두 눈을 슬며시 떴다.

    밤이 깊었음에도 켜 둔 등불 덕에 방이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촛불이 타닥타닥 타면서 춤을 추었다.

    아키드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결에 자신이 쓰러졌던 상황을 가만히 짚었다.

    그러던 중 놀란 로에나의 표정이 스치자 아키드는 벌떡 일어났다.

    당장 그녀에게 가려는데 누군가 손을 묵직하게 잡고 있는 게 느껴졌다.

    “로에나…….”

    갈 필요도 없이 로에나는 그의 곁에 있었다. 아키드는 불편하게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시녀들의 만류도 거부하고 제 옆에 붙어 있던 모양이었다.

    아키드는 자리끼로 목을 축이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한동안 잠잠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시작이었다.

    아키드는 하델루스령으로 오기 이전에 이와 비슷한 발작을 느낀 적이 있었다.

    끙끙 앓고 있으니 거리에서 만난 친구, 제이드가 대신 사제를 따라갔었다.

    그리고 다시는 제이드를 만날 수 없었다. 친구를 대신 사지로 보낸 것 같아 아키드는 또다시 몸살을 앓았었다.

    아키드는 로에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순간 로에나가 제이드처럼 사라질까 봐 무서워 벌떡 일어난 자신의 어리석음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녀는 불편한 자세로도 세상 편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등불의 빛에 닿아 더더욱 붉은빛을 띠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거슬거슬하기보다는 윤기가 흘렀다.

    아키드는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한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따뜻했다. 손가락에 보들보들한 솜털이 닿자 온기와 함께 간지러웠다.

    ‘많이 놀랐으려나.’

    세상모르고 잠든 것을 보면 늦게까지 잠이 들지 못한 듯싶었다.

    잠도 많은 사람이 왜 버티고 간호를 해서는.

    아키드는 로에나가 깨지 않도록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로에나를 안아 침대로 옮겨 주었다.

    로에나는 금세 편한 자세를 취해 색색, 잠을 잤다. 아키드가 그녀의 옆에 조심히 누웠다.

    넓은 침대라서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숨 고르는 소리가 가만히 침실에 울렸다.

    아키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나한테 잘해 줘요?”

    “…….”

    “내가 뭐라고.”

    잠자는 사람에게 대답이 들려올 리 없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이었다.

    그때 로에나의 주변으로 어떠한 힘이 휘도는 게 느껴졌다. 이전에 에비스 광산에서 잠깐 느꼈던 것과 같은 느낌.

    그때에는 착각이었나 했으나 이제는 어렴풋이 저 존재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키드는 이전부터 감이 좋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어렴풋이 느끼곤 했으니까.

    “정령들인가.”

    아키드의 중얼거림에 등불의 촛불이 크게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동의하듯 팔랑팔랑대는 것처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