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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54)화 (54/177)
  • #54.

    “어머니이이임!”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으며 부르짖었다.

    엘레나는 내 울먹거림에 잠시 움찔하는가 싶더니 나만 남고 모두 나가라 지시했다.

    그녀가 내 곁에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된 거니?”

    “정령들이 말하길 미각성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발작이래요.”

    “발작이라고?”

    엘레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긴 제로니스도 발작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자주 넘나들었다.

    황제의 누이인 그녀라면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건지 잘 알 터였다.

    “차라리 잘되었어. 이곳은 암룡 자파르시아의 영역이니 다른 곳보다 통증이 덜할 거야.”

    엘레나가 정령들과 비슷한 말을 꺼내었다. 나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네. 일단 본성에 전령을 보내 마샤를 호출했어요.”

    “잘했다. 외부인이 알면 곤란했을 텐데 순간 판단을 잘했구나.”

    엘레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자 또다시 울컥했다.

    내가 나도 모르게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을 무렵이었다. 엘레나가 내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마침 이곳에 미각성 발작에 관해 잘 아는 분이 있단다. 그분께 도움을 요청하자꾸나.”

    “잘 아는 분이라면…….”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인물을 떠올리며 넌지시 물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엘레나가 제로니스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했다.

    “신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높으신 분이란다.”

    “아.”

    “사안이 급한 만큼 도움을 요청하겠지만 이곳에서 그를 만난 걸 어디에서도 발설하면 안 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나가 재차 당부했다.

    “정체에 대해서도 궁금해해서는 안 된다. 설령 눈치채더라도 알은체를 해서도 안 돼. 알겠느냐?”

    비장하기까지만 한 모습에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네, 어머님.”

    아무래도 오늘, 남주인공을 만날 운명인 모양이었다.

    * * *

    잠시 후, 아리아 백작 부인이 누군가를 숙소로 이끌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소년은 엘레나와 같은 붉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후드 사이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황족 특유의 금색 빛깔을 내뿜었다. 나는 제로니스를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구르고, 뒤로 굴러서 봐도 영락없는 제로니스네.’

    상대가 정체를 숨기려는 노력조차 없으니 못 알아보는 게 이상했다.

    후드만 썼지 인상착의만 봐도 딱 ‘황족이다!’ 알 수 있게끔 하는 외모였으니까.

    엘레나가 고개를 수그려 감사를 표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고맙습니다. 오시는 길은 저희 기사들이 통제했으니 들킬 염려는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깍듯한 태도에 곁에 있던 슈리가 어리바리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제국에서 대공비보다 높은 상대는 황족뿐이었으니까. 그리고 황족인 그녀보다 높은 황족은 직계들뿐이었다.

    이래서 알아도 모른 척하라고 한 거로구나.

    다행히 이곳은 아키드와 나, 슈리, 그리고 엘레나와 제로니스 일행뿐이었다. 제로니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침 숙소에만 있기 거북하던 차였습니다. 괘념치 마시죠.”

    그러곤 곁에 선 자에게 명령했다.

    “대공자의 상태를 확인해 보라.”

    “예.”

    사내는 의사인 듯했다. 그가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아키드의 맥을 짚었다.

    그 순간 그의 손 주변으로 번쩍, 빛이 발했다. 빛 속성 마법이었다.

    빛 속성 의사들은 아주 귀하다고 들었는데 역시 황족의 주치의는 남달랐다.

    나는 초조하게 아키드의 안색을 살폈다. 희게 질린 얼굴과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안쓰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의사의 진단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선 막혀 있던 마나혈을 뚫어 두었습니다. 갑작스럽게 고농도의 마나에 노출되어 놀란 것 같습니다.”

    “자네가 보기에도 증상이 비슷한가?”

    엘레나의 물음에 의사가 대답했다.

    “예. 대공자님도 전…… 크흠, 도련님과 같이 예민한 몸을 가지신 듯합니다.”

    방금 ‘전하’라고 하려던 의사가 헛기침하며 어색하게 도련님이라고 칭했다.

    저 모습을 보니 원작에서 제로니스가 메이벨에게 정체를 숨기고 도련님 행세를 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주변인들이 능숙하게 속여서 메이벨이 감쪽같이 속았었지.

    의사가 말을 이었다.

    “이 정도의 민감성이라면 처음이 아닐 것 같은데, 그간 이러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까?”

    “처음이 아니었을 거라고?”

    “예. 아무리 프로디움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과민 반응이 단시간에 나타나진 않습니다. 아마 전조 증상이 있었을 텐데요.”

    “글쎄. 있었어도 숨겼다면 몰랐을지도 모르겠군.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라서.”

    엘레나가 의사의 말에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의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키드는 전조 증상을 느끼고도 숨겼다는 말이니까.

    덩달아 나까지 울상이 되었다. 그녀의 말대로 아키드라면 아파도 내색하지 않고 버텼을 것 같았다.

    오늘도 내가 추궁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버텨서 숙소에서 뻗었을지도 몰랐다.

    ‘미련곰탱이. 참을 줄만 아는 모지리. 나한테 좀 더 의지하면 좋을 텐데.’

    아키드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서운하고 미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키드가 혼자서 삭이는 버릇이 생긴 건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대공 부부와 아내의 냉대가 한몫했을 테니까.

    나는 아키드의 곁에 바짝 붙어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땀을 닦아 주며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집요한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트니 제로니스가 후드 너머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 목걸이 주변으로 내 힘을 막는 막 같은 게 형성이 되어서인 것 같았다.

    ‘당분간 그걸 꼭 끼고 있거라.’

    대공이 출장을 가기 전 남겼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분명 내가 정령사임을 숨겨 주는 목걸이라고 했었지.

    ‘남주라 그런가, 역시 감이 좋구나.’

    대공이 제로니스와 만날 상황을 염두에 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었다.

    무작정 마주쳤다면 내 주변에 휘도는 정령의 힘을 그가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목 부근을 만지작거리는 척하며 목걸이를 안으로 숨겼다.

    원작에 의하면 어릴 적부터 마나 감응력이 뛰어났던 그는 다른 존재에 대한 감이 좋은 편이었다.

    아니, 이제 보니 그가 황태자이기에 좋은 환경에 노출되어 먼치킨이 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프로디움이 자파르시아의 본거지였다면, 황궁 아칼리무트는 자파르시아의 별장 겸 놀이터였으니까.

    수도로 삼기에 북부는 척박해 온후한 기후인 아칼리무트에 황궁을 세웠다고 제국사 시간 때 들은 기억이 있었다.

    정령들의 말까지 들으니 아예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것보다 의아한 건 아키드의 상태였다. 원작에서 아키드는 정상적인 각성을 이룩했었는데.

    한데 원작과 달리 현재 아키드는 제로니스와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원작에선 내재만 되어 있던 게 우연히 발휘된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원인이 있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이곳은 다음 내용이 정해진 책 속이 아니었다.

    나라는 변수가 살아 숨 쉬는 세계. 소설과 완전히 같아질 수 없다는 건 나도 이미 인지한 일이었다.

    하지만 있던 사건의 시기가 당겨진다든지, 없던 일이 발생하는 지금의 상황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때 제로니스가 내게 물었다.

    “그 목걸이는 호신 도구입니까? 특별한 마법이 담긴 거 같은데.”

    아무래도 호신용 마도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네. 제가 워낙 사고뭉치라 아버님께서 특별히 만들어 주셨어요.”

    “대공께서 며느님을 무척 아끼시나 봅니다. 구하기도 힘든 돌인데.”

    “구하기 힘들어요?”

    금시초문이었다. 이걸 줄 당시, 대공은 마실 다녀오다 주운 것처럼 무심하게 주었으니까.

    희귀한 물건이었다면 대공이 공짜로 주지는 않았을 거다. 분명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생색을 냈겠지. 그러니 제로니스가 잘못 알았으리라.

    그때 제로니스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설마 뭔지도 모르고 그렇게 대놓고 다닌 건가요?”

    “네?”

    대놓고 다니면 안 되는 목걸이였나?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제로니스가 말을 덧붙였다.

    “그건 평범한 보석이 아니에요. ‘하마르’라고 불리는 돌로, 드래곤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

    드, 드, 드래곤의 피?

    드래곤의 왕, 자파르시아가 영면하고 난 후, 대륙에 남은 드래곤은 이지를 상실한 상급 마수로 전락했다.

    그마저도 개체수가 많지 않아 드래곤과 관련된 물품은 돈이 있어도 못 사는 희귀품이었다.

    ‘그럼 이 붉은 게 화학반응에 의한 색이 아니라 진짜 피가 섞여서라는 건가?’

    존재를 알고 나니 오늘따라 돌의 빛깔이 더욱 핏빛처럼 붉어 보였다. 그때 엘레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렴. 그 돌이 하마르인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무니까.”

    “하지만 저분은…….”

    “이분은 이미 하마르를 가지고 있을 거란다. 그러니 바로 알아본 거지. 제 말이 맞지 않나요?”

    엘레나가 슬쩍 동의를 구하자 제로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창고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라면 이 나라의 황제를 뜻할 터.

    황제의 창고에 모셔 둘 정도면 꽤나 고가일 것이다.

    저절로 목이 묵직해졌다. 소시민인 내 머리로는 차마 목걸이의 가치를 환산할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얼마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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