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52)화 (52/177)

#52.

아키드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싱글벙글하던 에드워드가 덩달아 얼굴색을 돌변했다.

“친구의 여동생 이름도 못 묻나?”

“내 아내의 손목을 비틀었던 자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비튼 게 아니라 붙잡으려고……!”

“그러니까, 왜, 에셀 소공작께서 내 아내를 붙잡았을까.”

“그, 그건…….”

“배우자가 곁에 있을 땐 상대 배우자를 통해 이름을 물어야 하는 게 예법이라고 들었는데. 에셀 소공작은 예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나 보군.”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살의가 느껴졌다.

예법까지 들먹이며 몰아세우자 에드워드는 뒷머리를 헝클이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어쨌든 아키드가 옆에 있는데 내게 지나친 관심을 보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나 역시 아키드가 다소 화난 듯해 잔뜩 쭈굴해져 있었다. 그가 에드워드에게 화낼수록 그 화살이 내게 향하는 것 같아서였다.

이대로 두다간 싸움이 붙을 것 같아 나는 냉큼 내 이름을 알렸다.

“제 이름은 로에나 하델루스예요.”

“아.”

에드워드가 하델루스라는 성을 듣고 입술을 달싹였다.

다소 충격받은 듯한 얼굴은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체감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또 이름 가지고 싸울까 봐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에셀 소공작께서는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요?”

에드워드는 내가 그에게 질문한 게 기쁜지 몸을 자꾸 배배 꼬며 말했다.

“아, 학술 모임이 있어서 답사를 왔습니다.”

“학술 모임이요?”

“예. 정기적으로 답사를 떠나는 학술 모임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엔 북부로 오게 됐어요.”

“그렇군요.”

하긴 수도에는 사교 클럽이 잘 발달되어 있다고 들었다. 친목 도모와 정보 공유는 물론 취미 활동을 함께하는 모임도 많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클럽은 추천 없이는 가입하지 못했는데, 남주인 제로니스가 소속된 ‘마젠타’ 클럽이 그중 하나였다.

‘그 모임도 주된 목적이 학술 답사였지. 누가 학구적인 남주 아니랄까 봐.’

시골 출신인 메이벨이 단번에 사교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마젠타 회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젠타의 임원인 제로니스가 메이벨을 추천한 덕이었다.

메이벨의 신성력이 필요해서 멤버로 받아들인 건 두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메이벨은 고아 출신이긴 하지만 성녀로 추앙될 정도로 신성력이 대단했기에 제로니스에겐 탐나는 인재였다.

나와 아키드야 중앙 정계와는 조금 떨어진 북부에서 지내다 보니 클럽 활동과는 담쌓고 지내는 상황.

아직 데뷔탕트 전이라 하델루스 대공도 딱히 클럽 가입을 권유하지 않은 탓이었다.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하델루스 대공이 수도에 있을 때 활동했던 ‘블리드’에 가입할 듯했다. 그야 원작에서 아키드가 ‘블리드’의 리더로 있었으니까.

그때 에드워드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나중에 수도에 오면 마젠타 클럽하우스에 한번 들러 주세요. 카일도 우리 클럽 소속입니다.”

“네? 마젠타요?”

“아, 카일이 소속되어 있으니 알고 계시겠군요.”

“그럼 오라버니도 여기 있나요?”

“아뇨. 그 자식은 갑자기 여행을 떠난다고 가 버려서 저랑 제로…… 크흠, 다른 임원들만 왔습니다.”

에드워드가 말을 하다 말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듣고야 말았다. 제로……라고 한 것을.

‘맙소사, 제로니스가 여기 있단 말이야?’

어쩐지 숙소를 배정받을 때 출입하면 안 되는 곳을 일러 주더라니.

아무래도 제로니스가 축복을 받으러 프로디움에 방문한 모양이었다.

타이밍도 얄궂지, 어떻게 여기서 이렇게 만날 수 있지?

소설 속 남주가 이곳에 있다는 생각에 절로 심장이 콩닥거렸다. 내 최애가 아키드라면, 차애는 제로니스였으니까.

내가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하고 있는 찰나였다.

“부인, 이만 갈까요?”

“아, 네, 네.”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에드워드가 아쉬움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나 역시 제로니스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으나 내겐 아키드와의 밤 산책이 더더욱 중요했다.

“밤 산책을 하려고요. 이곳에 마침 걷기 좋은 큰 인공 호수가 있다고 해서.”

“오! 마침 저도 호수에 가려고 했는데.”

에드워드가 반색하고 따라오려 하자 아키드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따라오지 마시죠.”

아까 반말하며 으르렁거리던 것보다는 예의를 갖춘 말이긴 하나, 선을 긋는 태도였다.

에드워드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내게 작별을 고했다.

“다음에 수도에 오시면 마젠타 클럽하우스에 꼭꼭 들러 주십시오.”

“알겠어요.”

“부인.”

아키드가 내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자처했다. 내가 그 위에 손을 얹자 아키드가 돌연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진득하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과 달리 시선은 계속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가게 된다면 나와 함께 가도록 해요.”

“난 그쪽을 초대한 적 없는데.”

에드워드가 불퉁하게 중얼거리자 아키드가 말끔히 무시했다. 그러곤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네? 그래 주실 거죠?”

나는 마법이 걸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어떻게 저 얼굴로 부탁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수 있냔 말이다.

내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끄덕이자 에드워드가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에드워드와의 짧은 만남이 마무리되고 호숫가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내내 말이 없던 아키드가 걸음을 멈추고 내 손목을 지그시 붙들었다.

“붉어졌어요.”

“아.”

나는 그제야 에드워드에게 붙잡혔던 손목이 제법 아팠던 게 생각이 났다.

역시 소설에서 힘만 센 단순 무식 캐릭터였던 대로 그는 힘 조절에 서툰 모양이었다.

‘그래도 의외로 순둥이 같았지.’

하긴 캐서린에게 툴툴대면서도 물불 안 가리고 여동생을 감싸고돌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그는 캐서린을 위해서라면 범법 행위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니까.

사실 그가 에드워드라는 걸 알고 나니 아키드가 일찍 와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소설에서의 그는 조금 잔혹해서 무서웠다.

“그러게요. 아직도 붉네.”

피부가 여린 탓인지 시간이 꽤 지나고도 울긋불긋한 게 남아 있었다.

아키드가 내 손목을 살살 매만지는가 싶더니 입가로 가져가 호호, 불기 시작했다.

“아, 아키드 님.”

“가만히 있어요.”

내가 손을 물리려 하자 아키드가 낮게 읊조렸다.

간질간질한 숨결이 손목을 타고 느껴지니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한참 그 행위를 견디고 있는데 마지막에 입술이 손목에 가만히 닿았다 떨어졌다. 차가운 입술이 닿았음에도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 아키드 님.”

“다음부턴 누군가 함부로 하려 하면 참지 말아요.”

“…….”

“웃으면 괜찮은 줄 알잖아.”

그가 내 손목을 쓸어내리며 속상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화나요. 나조차도 다칠까 함부로 쥐어 본 적 없는데.”

아키드는 여전히 붉은 손목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호호, 분다고 해서 옅어지지 않는다는 건 이미 그도 아는 듯했다.

“그러니까 다음에 그 자식이 또 그러면 정강이를 걷어차십시오.”

“에셀 소공작인데도요?”

“당신의 남편이 대공자인데 뭐가 걸립니까?”

아키드가 피식 웃으며 내 손에 깍지를 끼고 말했다.

“그리고 예전에 내게 패악을 부렸던 때처럼 하면 아무도 함부로 못 할 겁니다.”

“…….”

“그땐 저도 부인이 무서웠을 정도였으니까요.”

“부디 그건 잊어 주면 안 될까요? 나 반성 많이 했어요.”

치사하게 여기서 과거 일을 거론하다니. 내가 눈을 흘기자 아키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잠시 후, 그가 내 손을 제게로 바짝 끌며 말했다.

“지금은 오히려 로에나가 눈에 안 보이는 게 더 무섭습니다. 방금처럼 웬 남자와 있을 때는 기분이 이상하고요.”

나는 아키드의 중얼거림에 입술을 헤벌렸다.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궁금증이 폭발하듯 일었다.

“어떻게 이상한데요……?”

내가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아키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요요한 빛을 내뿜었다.

감정이 소용돌이치는가 싶던 찰나, 아키드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많은 것이 함축된 것 같은 느낌.

눈빛은 이미 에셀 소공작을 패고도 남을 정도로 살벌했다.

하지만 찰나에 스친 표정이라 내가 착각한 걸지도 몰랐다. 어쩌면 전지적 덕후 시점으로 본 망상일지도.

“그저 로에나는 이것만 명심하면 돼요. 다음에 수상한 사람과 마주친다면…….”

“정강이를 걷어차고 재빨리 도망갈게요. 저는 아키드 님의 아내이니까요.”

나는 아키드가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하며 힘차게 대답했다.

다소 과격한 대답이었으나 아키드는 몹시 만족스럽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네. 뒷수습은 제가 할 테니 뒷일은 염려하지 마세요.”

나는 얼결에 패악질 프리패스권을 얻은 기분이었다. 무슨 짓을 하든 제가 다 커버해 주겠다는 아키드가 듬직하기까지 했다.

물론 에셀 소공작의 정강이를 차게 될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내가 어마어마한 시댁에 시집왔다는 것만은 확실한 일이었다. 아키드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제 걸을까요?”

“네!”

언제 분위기가 과열됐냐는 양 평온한 걸음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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