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51)화 (51/177)
  • #51.

    수상한 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아키드와 밤 산책을 할 생각에 설레서 일찍 나왔더니 웬 놈이 나를 힐끔대고 있었다.

    나는 기둥 뒤에 숨은 채 이쪽을 힐끔대는 살구색 머리통을 의식하지 않으려 괜스레 다리를 흔들며 딴청을 피웠다.

    저 독특한 머리 색은 분명 에셀 가문의 사람을 뜻했다.

    나이대나 외관으로 봤을 때 짐작이 가는 상대가 있기는 한데.

    나는 문득 원작 속 인물을 떠올리다 도리질했다.

    ‘아니야. 악녀의 오빠가 이곳에 있을 리 없잖아.’

    특히 이런 정적이고 따분한 곳에 그가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저 머리 색이 아무한테나 나오는 색이 아니기에 혼란스러웠다.

    상대는 내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다.

    게다가 점점 빨개지는 얼굴이 곧 있으면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결국 먼저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상대가 어린애이기도 하고 뭣하면 소리를 지르면 되니까.

    “저기요.”

    “헉!”

    내가 말을 걸자 상대가 흠칫, 떨더니 잽싸게 기둥 뒤로 숨었다.

    다만 소년이라 해도 제법 덩치가 있어 살구색 머리카락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오히려 나를 피하는 듯한 그에 나는 분수대에서 일어나 총총총 다가갔다.

    “왜 자꾸 훔쳐봐요.”

    “후, 훔, 훔쳐본 적 어, 없…….”

    소년은 설마 내가 다가올 줄은 몰랐는지 말을 버벅거렸다. 얼굴은 이제 토마토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나는 생각보다 하찮은 감시자의 반응에 팔짱을 낀 채 물었다.

    “훔쳐봤잖아요. 아까부터 기둥에 있던 거 다 봤어.”

    “헉! 후, 훔쳐봐서 죄, 죄, 죄송합니다!”

    소년이 허리를 숙이는가 싶더니 축지법을 쓰듯 날쌔게 벽으로 바짝 붙었다. 금방이라도 도주할 것 같은 태세였다.

    아무래도 상태를 보니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저런 쫄보가 에드워드 에셀일 리는 없겠지.’

    에드워드 에셀이 누구이던가.

    악녀 캐서린의 오빠이자 에셀 가문의 후계자로, 메이벨과 제로니스를 숱하게 방해한 제로니스의 친구이지 않는가.

    산만 한 덩치로 곁에만 있어도 위협적일 뿐만 아니라 성격도 고약해서 심심하다고 아무에게나 시비를 거는 불량배 스타일이었다.

    의외로 단순한 기질이 있는 시스콤이라 캐서린이 못된 짓을 많이 시켰었지.

    여주 메이벨이 그에게 괴롭힘당한 걸 떠올리면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기피 대상 중 하나였다.

    나는 경계심을 풀고 소년에게 말했다.

    “저기요. 누가 보면 제가 괴롭힌 줄 알겠어요. 왜 그렇게 멀찍이서 있어요.”

    “그, 그, 그냥……. 으아, 죄송합니다!”

    원래 말을 좀 더듬는 편인가?

    어쩐지 몸이 안 좋은 사람을 의심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해서 그에게 다가가 안심하라는 듯 먼저 사과했다.

    “저야말로 죄송해요. 저 때문에 놀라셨나요?”

    “아, 아닙니닷! 하, 하나도 아, 안 놀랐어!”

    “그런데 혹시 몸이 안 좋으세요? 얼굴이 엄청 빨개요. 의료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허, 허억!”

    소년이 얼굴이 빨갛다는 말에 허둥지둥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이 누가 봐도 내가 괴롭힌 것 같아서 왠지 멋쩍어졌다.

    찰나의 침묵이 지나고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갈게요.”

    그리고 도로 분수대 앞으로 돌아가려는데 소년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윽!”

    엄청난 힘에 깜짝 놀라 쳐다보니 온몸이 새빨개진 소년이 말문을 열었다.

    “이, 이름 좀.”

    “네?”

    “이, 이름 좀 알려 줘요!”

    “으앗, 깜짝이야.”

    나는 소년의 외침에 깜짝 놀라 한쪽 귀를 막았다. 남은 한 손은 그에게 붙잡혀 있는 탓이었다.

    아까부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이더니 이번에는 우레가 치듯 우렁찬 소리를 내었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건지.

    “목청이 좋으시네요. 성악 하셔도 되겠다.”

    내 농담에 그가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뭘 수긍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가 또다시 내 이름을 알려 달라 했다.

    “상대 이름이 궁금하면 본인 이름부터 밝히셔야죠.”

    “죄, 죄, 죄송합니다!”

    “아니, 그렇다고 사과할 것까진 없고요.”

    반응이 참 극과 극을 오가는 소년이었다. 그나저나 이 손목을 좀 놓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냥 잡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아팠다. 내가 막 손을 놔 달라고 하려는 찰나였다.

    “윽!”

    소년이 얕은 비명을 내뱉으며 부리나케 손을 놓았다. 누군가 그의 손목을 비튼 탓이었다.

    “아키드 님?”

    나는 깜짝 놀라 아키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싸늘한 빛을 띠며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키드는 나를 보호하듯 내 어깨를 감싸고 소년을 추궁했다.

    “너 누구야.”

    아키드가 다짜고짜 반말부터 시전하자 소년이 눈을 찌푸렸다. 그가 손목을 휘휘 돌리며 물었다.

    “그러는 넌 누군데.”

    뭐, 뭐야. 말 잘하네?

    나는 유창하게 대답하는 소년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까부터 내내 말을 더듬길래 원래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새빨갰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양 원래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금색 눈동자가 아키드를 부리부리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키드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는가 싶더니 내게 물었다.

    “부인, 저 고릴라는 누굽니까?”

    사람 면전에 대고 고릴라라니요. 게다가 일부러 ‘부인’이라는 말에 힘을 주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나는 아키드의 눈웃음에 정신을 잃을 뻔하던 걸 가까스로 버티며 대답했다.

    “저도 몰라요. 여기서 처음 만났어요.”

    “그렇다면 왜 저놈이 부인의 손을 붙잡고 있던 거죠?”

    상냥한 음성과는 달리 아키드의 서늘한 시선은 소년을 향하고 있었다. 가까이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잔뜩 날 선 아키드를 보고 있자니 변명부터 나왔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아키드를 자극하는 말이었다.

    “그건 갑자기 붙잡혀서…….”

    “갑자기 붙잡혔다고요?”

    아키드의 미소가 뚝, 멈추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게 느껴져 온몸에 오싹함이 감돌았다.

    아키드는 비식거리며 소년을 노려보았다.

    눈빛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미 저 소년은 저세상으로 갔을지도 몰랐다. 솜털이 쭈뼛거릴 만큼 주변이 서늘해졌다.

    내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데 아키드가 물었다.

    “그 말은 즉, 저쪽이 무뢰배처럼 강압했다는 거군요.”

    “뭐? 무뢰배?”

    소년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으락푸르락하게 물들었다.

    아까 말을 더듬던 소심한 소년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몹시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내가 움찔, 몸을 떨자 아키드가 내 어깨를 가볍게 도닥이며 다정히 속삭였다.

    “부인, 저놈을 어떻게 해 드릴까요?”

    무엇이든 해 주겠다는 그 음성은 섬뜩하면서도 한편으론 더없이 달콤했다.

    소년에게 하는 것과 달리 내게만은 다정해서 안심하는데 돌연 소년이 비틀거렸다.

    “부, 부, 부인이라고?”

    아까의 위협적인 태세와는 전혀 다른 무방비한 상태. 소년이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뒤이어 아키드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러니 내 부인에게 저지른 무례를 당장 사과해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지.”

    “마, 마, 말도 안 돼! 누가 그 나이에 결혼을……!”

    소년이 반박하려다 말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아키드의 머리칼로 향했다.

    “잠깐만, 너 이제 보니 머리가 검잖아.”

    “그러는 네 머리 색은 털 깎은 생닭처럼 희끄무레하군.”

    “뭐라고?!”

    “풉.”

    나는 순간적으로 뽀얀 피부를 자랑하는 생닭이 떠올라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려 버렸다.

    소년은 내가 웃자 다시 얼굴이 새빨개졌고, 아키드의 눈빛은 더더욱 살벌해졌다.

    “더러운 눈 치워.”

    “…….”

    오늘따라 아키드가 왜 이렇게 초면인 상대한테 시비를 걸지 못해서 안달이지?

    나는 또다시 살벌한 분위기로 빠지려는 두 사람을 보며 식은땀이 절로 났다.

    말려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소년이 쉽게 노기를 가라앉혔다.

    “북부에 검은 머리라면 하델루스 대공가뿐이지.”

    아키드의 외형을 보고 가문을 알아볼 정도면 소년도 명문가 귀족 중 하나인 듯했다.

    ‘설마, 아니겠지.’

    나는 또다시 드는 불길한 예감에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 아키드가 이죽거리며 뇌까렸다.

    “그러는 수도에 있어야 할 에셀 소공작이 여긴 어쩐 일이지?”

    “그것까진 알 것 없고.”

    “……에드워드 에셀?”

    말도 안 돼! 쟤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아키드의 입에서 ‘에셀 소공작’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경악스러웠다.

    소설에서 덩치 큰 단무지 같은 타입이라 했는데, 눈앞의 그는 그리 위협적인 모습이 아닌 탓이었다.

    아, 물론 아까는 조금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상상과는 딴판이었다. 내 중얼거림에 에드워드의 눈동자에 생기가 어렸다.

    “저, 저를 아세요?”

    “부인.”

    아키드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윽, 나도 모르게 그만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어.’

    로에나 에이프릴은 에드워드 에셀을 만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어릴 때 하델루스령으로 시집와 이른 나이에 요절했으니 당연했다.

    “에이프릴 성에 있을 때 들어 본 거 같아요. 오라버니랑 같은 아카데미였던 거 같은데.”

    내가 원작 속 내용을 교묘히 이용해 에둘러 설명하자 에드워드가 반응했다.

    “앗, 그럼 그쪽이 개둥, 아니 쌍둥이의 여동생이었습니까?”

    앞에 이상한 단어가 있던 거 같은데?

    다행히 그가 이미 에이프릴 후작가의 쌍둥이와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내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워드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들었던 것 같습니다. 여동생이 시집간 후로 연락이 안 된다고.”

    에드워드가 ‘시집’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다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생기가 솟았다가 풀이 죽었다가, 참 변덕스러운 그였다.

    잠시 후, 에드워드가 언제 풀이 죽었냐는 양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제 이름도 아셨으니 영애의 이름도 알려 주세요.”

    “아, 저는…….”

    내가 막 이름을 알려 주려는 찰나였다.

    “거기까지.”

    서늘한 음성과 함께 아키드가 나를 뒤로 감추며 냉랭하게 일갈했다.

    “에셀 소공작, 더는 선 넘지 말았으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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