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50)화 (50/177)

#50.

“예. 잠시만요.”

아키드가 양해를 구하곤 내 손바닥에 무언가 그리기 시작했다. 점 두 개까지 꾹꾹, 눌리자 나는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낮은음자리표?”

“네. 그자의 손목에 낮은음자리표가 그려져 있었어요.”

“조직을 나타내는 표식 같은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신관에게서는 보질 못해서. 어쩌면 음표 문신한 자가 신관인 척 위장했을 수도 있겠네요.”

아키드는 확신할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뒤가 구린 기분이 들었다.

어린이를 시켜서 나쁜 짓을 하는 놈치고 혼자서 일을 벌이는 사람은 없으니까.

배후가 있다는 것에 집에 있는 아키드 초상화 하나를 걸 수도 있다.

‘소설에선 음표가 그려진 집단에 대해선 나온 적이 없던 거 같은데.’

나는 어쩌면 하델루스 대공이 이미 추적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물었다.

“아버님께는 음표에 관해 말해 봤나요?”

“아뇨.”

“왜요?”

내 되물음에 아키드가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태연히 대답했다.

“그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아버지와 친밀감을 쌓아 본 적이 없어서요. 독대도 최근에야 가능해졌으니까.”

슬픈 내용치고 덤덤한 목소리였다.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한 음성에 괜히 내가 울컥하는 듯했다.

그의 말대로 소설에서 아키드는 대공과 유대감이 전혀 없었다.

필요에 의한 관계.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감싸진 철저한 비즈니스 부자.

내가 직접 이 집안에 들어와 보니 아키드가 참 많이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원래 이런 콩가루 집안에는 중재해 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데 이 집엔 훼방 놓을 사람만 있었으니까.

나는 아키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버님이라면 분명 찾아서 응징해 주셨을 텐데요.”

“으음, 글쎄요. 바쁘다고 그냥 지나치시지 않았을까요? 사실 최근에야 조금 달라지셨을 뿐이라.”

“그건 그렇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이제 와서 그 사람을 찾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어차피 그때 그 친구들이 살아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고…….”

아키드는 잠시 친구들을 생각하는지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소식을 모르고 있는 쪽이 좀 더 희망적이지 않겠습니까?”

“알겠어요. 아버님께는 말하지 않을게요.”

내가 새끼손가락까지 내밀어 약속해 주자 아키드가 피식 웃었다.

“대신 아키드 님도 약속해요.”

“무얼 말입니까?”

“자책하지 않기.”

“…….”

“그건 그냥 사고처럼 벌어진 일이지, 그 일 어디에도 아키드 님의 잘못은 없어요. 아키드 님은 그저 살고 싶어서 발버둥 쳤을 뿐이잖아요.”

그래. 잘못은 가난한 거지 아이에게 나쁜 일을 시킨 어른에게 있다.

아키드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간 거리를 떠돌면서 숱한 위험에 노출됐으리라.

솔직히 어린아이의 몸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분명 얼어 죽거나 굶어 죽지 않았을까?

원래라면 부모님의 그늘 아래 보호받고 살아야 할 나이였다. 나는 문득 아키드의 어머니는 무엇을 하던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막 질문하려는 찰나, 엘레나가 우리 곁으로 왔다.

“가자꾸나. 아무래도 오늘은 신전에서 머물러야 할 듯하니.”

나는 아키드에게 궁금한 게 많던 차라 입술을 달싹이며 아키드와 엘레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남녀가 따로 떨어지나요?”

“왜? 아키드랑 같은 방 쓰고 싶니?”

“괜히 여러 방을 차지하는 것보다 같이 있는 게 시종들도 편하고…….”

“네가 언제부터 시종들을 생각했다고.”

엘레나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신전에선 남녀가 유별하단다.”

그 단호한 말에 나는 “네에”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거참, 쓸데없이 조신한 신전 규정이다. 외박을 틈타 합방을 노리려던 내 계획은 시도조차 못 하고 실패였다. 나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서도 각방이라니…… 수절하는 것도 아니고.”

“크흠.”

때마침 아키드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설마하니 합방할 뻔한 위기를 모면한 것에 대한 안도의 헛기침은 아니겠지?

어쩐지 시선을 피하는 아키드에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려는데 엘레나가 말했다.

“나로는 부족하겠지만 참아 주지 않겠니, 새아가.”

“부족하다뇨. 충분히 넘쳐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어쩐지 대공비가 대공을 닮아 가는 것 같다. 나는 엘레나와 아키드에게 양손이 잡힌 채 연행되는 죄인처럼 숙소로 향했다.

막 갈림길에서 헤어지려는 찰나였다. 아키드가 내 귓가에 은근히 속삭였다.

“이따 밤 산책할까요?”

* * *

그 시각 프로디움에는 로에나 일행 말고도 손님이 더 있었다. 하인트의 황태자, 제로니스 칸 하인트였다.

그의 옆에는 에셀 소공작인 에드워드 에셀이 따분한 얼굴로 몸을 비틀고 있었다.

“제로, 나 심심해.”

“정 심심하면 바깥에 있는 호수에서 다이빙이라도 하고 와.”

제로니스가 책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에드워드가 그의 책머리에 바짝 다가가 물었다.

“같이 갈래?”

“나 숙소 바깥으로 못 나가는 거 알잖아.”

대외적으로 제로니스는 에드워드와 함께 북부로 학술 답사를 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일종의 정기 세미나로 위장된 이 모임은 사실 제로니스가 프로디움에서 축복을 받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축복을 받지 않으면 발작을 일으키는 탓이었다.

그리하여 에셀 공작의 주도 아래 제로니스는 주기적으로 프로디움을 방문하고 있었다.

굳이 이 먼 곳까지 오는 이유는 프로디움이 암룡 자파르시아의 레어였던 탓이다.

황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드래곤의 힘이 충만한 곳이라 머물고만 있어도 기운이 솟았다.

한데 조용히 숙소에 머물고 있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녀석이 하루건너 나가자고 닦달하고 있었다.

“잠깐이면 괜찮지 않을까? 여기 누가 온다고.”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너 혼자 나가. 난 이 책을 마저 읽어야겠으니까.”

제로니스가 에드워드의 얼굴을 쭉 밀어 버렸다. 책에 그림자가 지는 탓이었다.

에드워드는 무심한 그의 태도에 입을 댓 발 내밀며 툴툴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지 않는 건데. 아버지한테 속았어.”

“내가 말했잖아. 프로디움에서 놀거리는 달리기나 수영뿐이라고. 애초에 신전에 놀러 올 궁리를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입을 여는 족족 맞는 말만 하니 에드워드는 약이 올랐다. 그가 침대에 벌러덩 눕는가 싶더니 음흉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아아, 그냥 캐시도 데려올걸. 적어도 제로 너랑 있는 거보단 재밌었을 텐데.”

에드워드의 말에 제로니스가 처음으로 반응했다. 그가 책에서 시선을 뗀 채 에드워드를 쏘아붙였다.

“에셀 영애가 네 장난감이야?”

“그럴 리가. 내가 얼마나 아끼는 여동생인데.”

에드워드가 능글맞게 웃으며 침대에 엎드린 채 두 손을 모아 꽃받침을 했다.

장난기 가득한 모습에 일부러 관심을 끌고자 캐서린을 언급한 것을 눈치챈 제로니스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려오고 싶어도 함께 못 왔을 거야. 승마하다가 다리가 부러졌거든.”

“뭐라고?”

제로니스가 눈에 띄게 동요하자 에드워드가 얼굴을 한껏 찌푸리며 대답했다.

“서서 말을 타 보겠다고 우기다가 벌러덩 넘어졌어. 다리 하나만 부러진 게 다행이지.”

“승마 배운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제로니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도로 그때가 생각났는지 에드워드가 벌떡 일어나 성을 냈다.

“그러니까! 하여간 겁이 없어요. 내가 막 화를 내니까 헤실헤실 웃기만 하는 거야. 지가 귀여운 걸 아는 거지.”

“그래서 치료는?”

“우리 아버지가 누구시냐. 출장 중에 그 소식을 듣고 아주 빛의 속도로 달려오셨다. 치료야 의사가 하는 건데 아버지는 왜 유난인지. 나 다리 부러졌을 때는 보는 척도 안 하셔 놓곤.”

에드워드가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으며 공작을 험담하자 제로니스가 반박했다.

“너랑 네 여동생이랑 같아? 게다가 올해 에셀 영애가 크게 앓았던 적이 있으니 공작이 노심초사할 만하지.”

“그런가. 하긴, 그날 거의 죽다 살아났으니 아버지도 좀 초조하시긴 하겠네. 왜 아픈지 원인도 몰랐으니까.”

에드워드가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프로디움에 있는 성수가 원기 회복에 좋다니까 캐서린 주게 사 가려고.”

“간만에 좋은 생각이야. 내 몫도 줄까?”

제로니스가 선심 쓰듯 묻자 에드워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프로디움의 성수는 귀해서 1인당 한 개씩밖에 팔지 않아서 거절한 것이었다.

“됐어. 너한테도 필요한 거잖아. 어차피 많이 가져가 봤자 성력이 유지되는 기간도 짧아서 무용지물이야.”

에드워드가 재차 사양하는 몸짓을 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로니스가 빤히 쳐다보니 그가 말했다.

“답답해서 안 되겠어. 네 말대로 다이빙이라도 하고 와야겠다.”

“괜히 꼬리 밟히면 죽는다.”

“어련할까요. 제로, 나 없다고 슬퍼하면 안 돼. 혼자는 외롭다고 울지도 말고.”

“미쳤어?”

제로니스가 질색하며 책을 던질 듯 위협하자 에드워드가 잽싸게 방을 나갔다.

숙소를 들키지 않으려 빙 돌아 프로디움의 중앙 분수대에 다다랐을 때였다.

에드워드는 분수대에 누군가 있는 걸 발견하고 기둥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상대를 확인했을 때 에드워드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두 눈을 부릅떴다.

분수 앞에 붉은 머리의 소녀가 누군가를 기다리듯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에메랄드빛 바다색처럼 영롱한 빛을 띠었다. 조명에 비친 흰 피부는 도자기처럼 뽀얬다.

그 모습을 한참이고 숨죽여 보던 에드워드의 얼굴은 어느새 소녀의 머리 색만큼이나 새빨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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