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49)화 (49/177)

#49.

화창한 주말, 아침 일찍부터 마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북부에서 가장 큰 신전인 프로디움이었다.

대공비가 가자고 한 곳이 프로디움인 줄은 와서야 알았다. 나는 다소 감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이 장소를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딛는 순간이 올 줄이야.’

뜻밖의 성지순례에 설레어서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곳은 메이벨과 아키드의 알콩달콩 에피소드가 이뤄지던 장소였다.

죽은 땅에 고립된 아키드가 메이벨에게 구출되어 이곳으로 옮겨졌으니까.

소설에서 봤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둘러볼 기회가 있다면 소설 속에 나온 장소를 다 구경하고 싶었다.

“이쪽입니다.”

사제가 신전 안 깊숙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외부인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대공비가 이 신전에 기부를 꽤 많이 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키드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작게 귓속말했다.

“왜 그래요?”

내가 갑자기 다가서자 아키드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가볍게 도리질했다.

딱 보아도 뭔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의아하던 찰나.

‘아, 신전이라서 그렇구나.’

나는 뒤늦게 소설에서 아키드가 신전을 유독 싫어했던 것을 떠올리며 작게 탄식했다.

원작에서 아키드는 메이벨이 신관이라는 이유로 무척 경계했었다.

바짝 날 선 고양이처럼 반응하던 게 어찌나 귀엽, 이 아니라 안쓰러웠는지.

‘어릴 때부터 싫어했었구나.’

소설에선 신전을 싫어하게 된 계기 자체가 나온 바가 없었다.

원래 서브 남주의 서사는 필요한 만큼만 짧게 서술되는 게 소설의 특징인 탓이었다.

덕질할 때 제일 슬픈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덕질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일 때였다.

아키드는 서브 남주인 탓에 과거 서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짤막한 서술로 요약된 경우가 많아 대부분 발품을 팔아야 했다.

있는 정보, 없는 정보를 싹싹 긁어모아 망붕 렌즈까지 장착한다 해도 한계는 있었다.

오죽하면 아키드가 어린 시절에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를까.

‘그러고 보면 지난번 파엘 강 인근 신전에서 머물렀을 때도 몹시 불편해했었어.’

어쩌면 대공 성에 오기 전부터 신전을 싫어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나를 위해 파엘 강에 가준 걸 생각하니 조금 감동이었다.

결국 아키드의 지난 13년에서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터.

하지만 과거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그라서 당장 궁금증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키드 님.”

“네?”

“손잡아 주세요.”

내 당당한 요구에 아키드가 두 눈을 깜박이는가 싶더니 손을 잡아 주었다.

내가 야무지게 깍지까지 끼자 아키드의 귓불이 발그레해지는 게 보였다.

‘아아, 이 맛에 최애 부인으로 살지요.’

나는 아키드를 위하는 척 내 사리사욕을 채우는 중이었다.

“로에나.”

그때 대공비가 나를 불렀다. 그녀의 옆으로 가니 고위 사제로 추정되는 중년의 남자가 나를 맞았다.

사제라고 하기에는 다소 험상궂은 얼굴이었다. 머리만 짧았어도 어둠의 세계에 몸담은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을 법한 외관이었다.

내가 경계의 빛을 띠자 그가 사람 좋게 미소 지었다. 물론 그게 더욱 험악해 보인다는 걸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파르시아의 두 번째 종인 파블로입니다. 구제와 구휼을 담당하고 있지요.”

“안녕하세요, 로에나 하델루스입니다.”

나는 깍듯이 인사하고 파블로를 살폈다.

‘두 번째 종이라면 추기경이겠구나.’

자파르시아 교단은 하인트 제국의 국교였다.

하인트의 선조인 암룡 자파르시아의 유지를 받드는 사람들로, 메이벨은 어릴 적에 이곳 산하의 고아원에서 자랐다.

나는 눈앞의 상대가 생각보다 높은 사람이라 당황스러웠다. 속으로 저쪽 세계 분 같다고 했던 것을 사죄했다.

그가 자꾸만 무시무시한 웃음을 지으며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혹시 오시면서 여기 오신 이유를 들으셨나요?”

“아뇨.”

“간단히 설명하자면 지금부터 대공자비님의 각성 시기가 언제인지 알아볼 예정입니다.”

“각성 시기를요?”

“예.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겪는 각성기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죠. 그게 언제쯤 시작하는지 알아보는 거랍니다.”

험상궂은 얼굴로 제법 상냥하게 설명하는 파블로였다. 내가 잠자코 듣자 그가 설명을 이었다.

“이곳 프로디움에는 자파르시아 님께서 생전에 만드셨던 아티팩트가 남아 있습니다. 수도에 있는 것보다 이곳에 있는 아티팩트가 훨씬 정확도가 높아 일부러 먼 곳에서 찾아오는 귀족들도 있지요.”

그거야 나도 알고 있었다. 제로니스가 성년이 지나고도 각성기가 시작되지 않아 비밀리에 이곳을 찾았었으니까.

대단한 주인공인 만큼 능력도 어마어마해서 각성기가 더뎠던 것이었다.

그 탓에 어릴 땐 몸도 약해서 자주 신전의 축복을 받으러 다녔다고 했다.

아마 그가 성인이 되어 이곳에 왔을 때 하필 각성기가 시작되어 위기를 겪었었지.

물론 당연하게도 위기의 순간에 짠, 하고 등장한 메이벨의 도움을 받았었다.

그러고 보면 소설은 메이벨을 중심으로 남주들이 모여드는 특성이 있었다.

나는 각성 시기를 알아본다는 말에 대공비가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장 위험한 때가 언제인지 확인하기 위함이구나.’

훗날 정령사임을 밝히더라도 각성을 거친 후가 좋았다. 약점이 될 수 있을 만한 부분을 제거하는 게 좋으니까.

파블로는 나를 알처럼 생긴 캡슐에 안내했다. 드래곤의 작품이라더니 외관이 굉장히 화려했다.

드래곤이 반짝이는 것을 좋아했다더니 아티팩트의 디자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휘황찬란한 위용에 도둑이 들면 제일 먼저 훔쳐 갈 것 같았다. 물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파블로의 지시대로 그곳에 잠자코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금으로 된 벽에는 알 수 없는 고대어가 적혀 있었다.

알아볼 수 없는 꼬부랑 글씨인데 반복되는 글자가 제법 있어서 한참이고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아티팩트를 작동하기 위한 시동어인 것 같았다.

그때 글자들이 반짝이며 색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오오.

나는 다소 들뜬 상태로 가만히 아티팩트가 내 몸을 스캔하기를 기다렸다. 그러길 한참.

푸슉―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아티팩트가 작동을 멈추었다.

다 끝난 건가 싶어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파블로가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게 갑자기 왜 이러지.”

허둥지둥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엘레나가 곁에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 갑자기 작동이 멈추어서요. 실례지만 한 번 더 해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엘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파블로가 다시 한번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작동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졸지에 캡슐에 갇혀 멀뚱멀뚱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내가 빙의한 영혼이라 아티팩트가 거부라도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할 찰나.

파블로가 캡슐 뒤편을 확인하더니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연료가 다 떨어졌네요. 아무래도 충전을 해 두는 걸 깜박한 모양입니다.”

뭐시라.

나는 한창 심각한 가정을 했던 것이 허탈했다.

‘어째 이 신관, 조금 허술해 보이는데…….’

괜스레 심각한 분위기만 조성해서 심장이 쪼그라들 뻔했다.

“충전하는 데 얼마나 걸리나.”

“그게 한나절 정도는 충전이 필요합니다. 워낙 오래된 물건인지라 연료가 많이 들어서요.”

하긴 드래곤의 유품인데 오죽할까. 대공비는 곤란한 기색을 띠며 물었다.

“오늘 안에는 힘들다는 뜻인가?”

“죄송합니다. 미리 살피지 못한 제 과실입니다.”

파블로가 연신 사죄하자 대공비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졸지에 또 외박을 하게 된 상황이었다.

대공비가 잠시 비서와 일정을 조율하는 사이 아키드가 손을 내밀어 내가 캡슐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고마워요.”

“아무래도 이곳에서 하루 묵어야 하나 봅니다.”

“그러게요. 괜찮겠어요?”

“괜찮냐뇨?”

“아, 어쩐지 아키드 님이 신전을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요. 그냥 제 기우였으려나요?”

자신 없이 중얼거리는 말에 아키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조금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물었다.

“티 났습니까?”

“살짝?”

“실은 거리에서 지낼 때 신관에게 속아서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네?!”

아니, 어떤 새끼가 우리 아키드를……!

나는 몰랐던 사실에 격분하여 몸을 떨었다.

지금 당장 수소문해 그 신관의 낯짝에 어퍼컷을 날리고 그 자리에서 헤드락까지 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러자 아키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불법 약품을 배달시켰던 거 같아요. 저는 다행히 아버지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지만 다른 애들은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요.”

“아키드 님 말고도 더 있었다는 건가요?”

“예. 거리의 아이들이라면 다들 신관에게 한 번쯤 제안을 받았을 겁니다. 처음부터 나쁜 일을 시키지는 않았어요. 서서히 나도 모르게 가담하도록 만들었죠.”

“끔찍한 사람이네요.”

순진한 어린아이를 이용해 나쁜 일을 일삼다니. 내가 집중해서 듣자 아키드가 말을 이었다.

“가끔 죄책감이 들어요.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지내도 괜찮은 건가, 하고.”

“그게 뭐, 아키드 님 잘못인가요. 나쁜 짓을 시킨 그 신관 잘못이지. 혹시 수소문할 만한 단서 같은 건 없어요?”

당장 찾아내 응징해 줄게요!

내가 주먹까지 불끈 쥐며 말하자 아키드가 피식 웃었다.

“글쎄요. 손목에 음표가 그려져 있다는 것밖에는.”

“음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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