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48)화 (48/177)

#48.

대공이 직접 내 방을 찾아온 적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아실을 시켜 서재로 오도록 했었으니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버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새아가만 남고 모두 나가 있도록.”

대공의 명령에 한나가 내 눈치를 슬쩍 보다 고개를 수그리고 방을 나갔다.

한나까지 밖으로 내보내는 걸 보면 단둘이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 듯했다.

평소 장난스럽던 그와는 조금 다른 모습.

‘어머님께 내 이야기를 들었구나.’

나는 대공이 뭔가 알고 온 거라 여기며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공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새아가.”

“네, 아버님.”

“이야기 들었다. 우리 모두를 감쪽같이 속였더군.”

“죄송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여 사죄하자 대공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죄송할 것까진 없다. 다만 만약 다른 누군가가 먼저 알아챘다면 크게 곤란할 뻔했어.”

“곤란하다뇨?”

내 물음에 대공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은밀히 속삭였다.

“실은 너에게는 말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다.”

“무얼 말인가요?”

나도 덩달아 목소리를 죽이며 상체를 기울이자 대공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스티그 섬으로 가는 건 다 너를 위해서다. 그곳에서 원인 모를 오염이 시작되었거든.”

어찌하여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나는 대공의 입에서 기어이 오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말을 잇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오염이 일어날 시기가 아닌데. 내가 본 원작보다 훨씬 앞선 시기였다.

“오염이 시작된 이상 언제 대륙 전역에 퍼질지 알 수 없다. 그럼 가장 필요한 게 누구일 것 같지?”

“정령사겠죠.”

“그래. 하지만 정령사가 사라진 지 오래이니 임시방편으로 신관들이 나설 거다. 신관들의 신성력은 오염을 없앨 수 있으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신관들은 신성력을 이용해 오염이 더는 퍼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성력을 무한정으로 쓸 수 없기 때문에 그것조차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오염을 없앤들 이미 죽은 땅은 신성력으로도 회복이 안 되었다. 그건 정령의 영역이니까.

결국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해결하거나 정령사가 오염의 씨앗을 뿌리째 뽑아내야만 끝날 일.

‘오염이 빨리 시작된 원인이 뭘까.’

원인만 알게 되면 조금이나마 수월할 텐데, 소설에서도 원인을 몰랐던 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메이벨이 필요했고.

그때 대공이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정령사가 나타난 이상 다른 정령사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수소문은 해 보겠다만 만에 하나 너 혼자라면…….”

“제가 나서야 할 수도 있겠네요.”

“아니. 그건 안 돼.”

대공이 단칼에 거절하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당연히 나보고 희생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내가 멀뚱멀뚱 쳐다만 보자 대공이 말했다.

“정령사에게도 한계가 있다고 들었다. 너 혼자서 대륙을 돌아다니며 정화하는 건 힘에 부치는 일이야. 굳이 네가 희생할 필요는 없어.”

대공의 태도는 완강했다. 할 수 있다면 내가 정령사라는 걸 숨기고 싶은 기색이었다.

하긴 오염이 시작된 이상 언제, 어디서 또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정령사라는 걸 밝히는 건 위험부담이 컸다.

나 역시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공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네 힘을 숨기는 아티팩트다.”

대공이 건넨 것은 붉은 돌이 박힌 목걸이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루비 목걸이처럼 보였다.

“당분간 그걸 꼭 끼고 있거라. 내가 없는 동안에 괜한 말썽 피우지 말고.”

그리 당부한 대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제법 시아버지다운 멘트라 괜히 민망해진 나는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 * *

얼마 후, 코비슈타인이 본성으로 돌아왔다. 본래 예정했던 한 달보다 2주를 더 쉬고 돌아온 건 에이프릴 일가에게 시달렸을 그에게 준 보너스였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온 내 선물을 보았을 때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뭐야?”

“에이프릴 가문에서 대공자비님께 보낸 선물입니다.”

“이걸 다?”

나는 황당함에 선물 행렬을 눈으로 쓱 훑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코비슈타인의 말로는 알랑의 특산품과 몸보신에 좋다는 각종 약재는 물론, 에이프릴 성에서 챙겨 온 선물까지 모조리 들고 왔다고 했다.

“1년이나 쌓인 선물이라 조금 많기는 합니다만.”

“1년 치라고?”

“예. 후작님께서 로에나 님이 생각나실 적마다 하나씩 마련해 둔 선물이라고 합니다. 아, 소후작님과 공자님의 선물도 있지요.”

에이프릴 가문에게서 덕후의 냄새가 나는 건 기분 탓인가.

보아하니 내가 생각날 법한 붉은 물건들이 한가득이었다.

중간에 나를 닮은 인형까지 보이는 것을 보면 조공을 바치며 행복해하던 내 지난날이 떠오르기까지 했다.

‘대체 정체가 뭐지?’

나는 에이프릴 가문의 기묘한 가풍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사이 비비안과 슈리, 한나까지 합세해 선물을 내 금고로 옮기기 시작했다.

리스트는 한나가 정리해서 준다고 했으니 그때 가서 살펴볼 예정이었다.

나는 때깔이 좋아진 코비슈타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늘 파리하던 얼굴은 적당히 햇볕에 그을렸고 눈 밑 그늘조차 옅어졌다.

코비슈타인이 내 손을 꼬옥 붙들며 말했다.

“에이프릴 후작님께 말씀 잘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안하게 지내다 왔어요.”

“아니야. 애초에 우리 가족이 휴가를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더 즐겼을 텐데.”

“아닙니다. 정말 제 생애 잊지 못할 휴가였습니다. 그리 호화로운 생활을 해 본 건 처음이었어요.”

“으응?”

에이프릴 사람들 때문에 불편했다고 하소연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뒤이어 코비슈타인이 휴가의 여운을 느끼며 속사포처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에이프릴 후작님께서 정말 많은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살면서 코끼리를 타고 산책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코끼리라는 동물은 처음 보았는데 정말 크고 우람하더군요.”

“그랬구나.”

코끼리를 타고 산책하는 건 나도 못 해 봤는데.

물론 로에나는 남부 사람이니 해 봤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내 협박 편지가 효과가 있었나 보네.’

분명 코비슈타인에게 편지를 받았을 때만 해도 인질로 붙잡힌 것 같았는데, 에이프릴 후작이 내 편지를 받고 태세를 전환한 모양이었다.

계속 괴롭히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코비의 반응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잘 즐기다 왔다니 다행이야. 오늘은 일단 쉬고, 의뢰에 관해서는 내일 슈리를 통해 전달할게.”

“예. 로에나 님.”

코비슈타인이 싱글벙글하며 연신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고 사라졌다.

뭐랄까, 군기가 바짝 든 것 같으면서도 내게 무척 감복한 듯한 태도였다.

설마 에이프릴 후작이 코비에게 내게 절대복종하라고 세뇌라도 시킨 건 아니겠지?

그런 의심이 잠깐 들었지만 냉큼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프릴 후작이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굳이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요란한 선물 증정식이 끝날 무렵이었다. 외출하고 돌아온 대공비가 뒷정리 중인 로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었니?”

“아, 본가에서 선물이 도착해서요.”

“그래?”

엘레나가 모자를 벗어 아리아 백작 부인에게 건네고 내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내가 졸졸졸 따라가자 그녀가 말했다.

“당분간 헨리가 별장에서 머물 거란다. 에비스 광산의 연구도 이곳에서 출퇴근하며 진행하기로 했으니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호출하렴.”

“아, 광산업을 종료했다고 들었어요. 괜히 저 때문에 손해를 입은 건 아닌가요?”

“빚이 산더미인 네게 들을 걱정은 아닌 것 같은데. 너야말로 수수료를 얻기 힘들어져서 곤란한 건 아니니?”

오늘도 역시나 촌철살인으로 시작하는 엘레나에게 나는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감사합니다, 어머님. 다 저를 위해서 그러신 거라고 아버님께 들었어요.”

“흥,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나.”

엘레나가 콧방귀를 뀌는가 싶더니 내게 일정을 알렸다.

“주말에 시간 비워 두렴. 같이 갈 곳이 있으니.”

“어디 가는데요?”

내 물음에 엘레나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왜? 내가 널 어디 팔아먹기라도 할까 봐?”

오늘따라 예민함이 극에 달하는 대공비였다. 대공이 출장을 간 이후 줄곧 저기압이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그녀의 품에 찰싹 달라붙었다.

짜증이 날 땐 귀여운 걸 봐야 한다지. 그리고 내 얼굴은 제법 귀여운 편이라고 자부했다.

“헤헤, 그럼 어머님이 저 사 주세요. 어디에 팔지 말고.”

“말이나 못 하면. 팔려면 진작 팔았을 테니 안심해라!”

위협적인 말과는 달리 대공비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게 대공비식 애정 표현이라는 걸 이미 잘 아는 나는 그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대공비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내가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 따라붙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키드 님도 가나요?”

나랑 아키드는 한 세트인데. 제발 데리고 가.

내가 초롱초롱한 눈빛 공격을 시전하자 엘레나가 움찔하더니 혀를 끌끌 찼다.

“안 그래도 이미 아키드에게도 일러뒀단다.”

“와아, 놀러 간다.”

내가 신나서 만세를 부르자 대공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보면 내가 너희 둘을 떼어 놓는 줄 알겠구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