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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47)화 (47/177)
  • #47.

    엘레나의 퉁명스러운 질문에 데미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설마 엘레나의 입에서 ‘우리 애’ 소리가 나올 줄이야.

    대체 로에나 그 아이는 어느 틈에 대공비의 마음을 홀라당 빼앗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저 마음 하나 갖고 싶어서 온갖 뻘짓을 다 하고 있는데 말이다.

    뭔가 이길 수 없는 연적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을 털어 내며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물론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아직 오염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로에나의 정체를 밝히는 건 위험부담이 크니까요.”

    “나중에 들키더라도 제가 황제 폐하께 잘 읍소해 볼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황제의 누이를 부인으로 두어 참으로 든든하군요.”

    데미안의 능글거림에 엘레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일단 에비스 광산의 일이 퍼지지 않도록 하는 게 좋겠어요. 광산도 되도록이면 폐쇄하는 쪽으로 하고요. 헨리에게 정령에 관한 정보는 보고서에서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하죠.”

    “광산을 폐쇄하면 대공비께서 피해가 크실 텐데요.”

    “어차피 그거 말고도 돈 벌 구석은 많아요.”

    “하긴 제 주머니를 자주 털어 가시긴 했죠.”

    “본인이 잘못한 건 생각이 안 나나 보죠?”

    엘레나가 눈을 흘기자 데미안이 시선을 스르르 피했다. 엘레나가 조소를 날리며 말을 이었다.

    “그대로 광부들이 드나들도록 하다가는 꼬리가 잡힐 수도 있어요. 헨리 코너 말고 정령에 대해 잘 아는 자가 또 있을지도 모르니.”

    “그건 부인의 말이 맞겠군요.”

    “사라졌던 정령사의 명맥이 이어진 만큼 발각되면 노리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감히 대공자비를 건드릴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대공비께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로에나가 아직 어린 만큼 빈틈이 많을 테죠. 대공도 잘 아실 텐데요?”

    엘레나의 질문에 데미안이 움찔하며 시선을 맞추었다.

    “예.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귀족들은 언제고 암살과 납치 위험에 노출된다. 성벽을 높게 쌓고 방을 많이 만드는 이유가 단순히 과시하기 위함인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요새였다. 각성하지 못한 자녀들을 지키고자 하는 귀족들의 보호 조치.

    하인트인들은 드래곤의 후예답게 고유의 속성을 갖고 태어나는데, 평민들은 속성이 퇴화되어 무용지물이거나 힘이 미미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반면 하인트의 황족과 귀족들은 명맥을 잘 유지한 덕에 강한 힘을 타고났다.

    각성을 끝낸 귀족들은 가문 고유의 힘이 발현되고 황실에 충성을 맹세하는 예식을 행하곤 한다.

    하지만 강한 힘을 얻는 대가로 위험을 수반하는 시기가 존재했다.

    바로 각성기.

    각성기에 접어든 이들은 변태를 준비하는 유충처럼 약해진다.

    강한 힘을 얻게 되는 데에 필수적으로 약해지는 시기.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치명적인 순간.

    이 시기에는 성의 경비가 더더욱 삼엄해진다. 혹시 모를 정적에게 자식을 잃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로에나가 정령사가 되었다 한들 제국의 귀족이라는 건 엄연한 사실. 언젠가 그 시기가 올 테고, 그때를 노리는 자가 생길 수도 있었다.

    “잘 알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대공.”

    “방심했을 때의 대가는 이미 충분히 뼈에 새기고 있거든.”

    데미안의 시선이 엘레나의 왼팔로 향했다. 싸늘하기까지 한 시선에 엘레나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엘레나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해서 데미안의 이런 반응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사고였어요.”

    “예. 그 덕에 대공비께서 다치셨죠.”

    “무언가 바라고 도운 건 아니었어요. 당신이 아니었대도 도왔을 거야. 그저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

    엘레나가 말을 잇다 말고 멈칫했다. 데미안이 가까이 다가와 제 옆의 소파 팔걸이를 붙든 탓이었다.

    상체를 기울여 시선을 맞추는 데미안의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이글거리는 듯했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엘레나가 그의 팔을 붙들어 밀며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겁니다. 사실대로 말해 주시죠.”

    “그걸 꼭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서 물을 것까진 없지 않나요?”

    데미안은 엘레나의 항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시야에 데미안만이 보이자 엘레나는 더는 무어라 하지 못하고 노려보았다. 데미안이 나직이 물었다.

    “설마 제가 그 일 때문에 청혼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죠.”

    “맞다면요.”

    “하.”

    데미안이 황당하다는 듯이 비소를 날렸다. 설마설마했던 일을 확인하고 나니 어이가 없어진 탓이었다.

    상처받은 것 같은 눈동자에 엘레나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상처받은 쪽은 오히려 저인데 되레 저쪽에서 난리라니.

    막 무어라 하려던 찰나 데미안이 딱 잘라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예. 절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책임감이 많은 사내가 아닙니다. 고작 그런 일로 배우자를 결정하는 머저리도 아니고요.”

    “그럼 무슨 변덕으로 그러신 건데요? 툭 까놓고 말해 보세요.”

    엘레나의 추궁에 데미안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항상 중요한 순간에는 입을 닫고 마는 데미안이 엘레나는 싫었다.

    “날 속이고 싶으면 변명거리라도 만들어 두는 정성이라도 보이세요. 그럼 속아 줄 요량도 있으니까.”

    차가운 언사에 데미안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엘레나가 벌떡 일어났다. 더는 이 자리에 단둘이 있는 게 진저리쳐진다는 눈빛이었다.

    “어쨌든 이 일은 서로 조심하도록 해요. 내 쪽에서도 대책을 마련해 둘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문이 꽝, 닫혔다. 데미안이 머리를 헝클이는가 싶더니 아실을 불렀다.

    “스티그 섬에 갈 명단, 아직 황실에 보내지 않았지?”

    “예. 내일 즈음 전령을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혹시 변경 사항 있으십니까?”

    “그래. 내가 직접 통솔한다고 전해.”

    “예? 대공 전하께서 직접 말입니까?”

    “확인해 볼 게 있거든. 비밀리에 출전하는 만큼 가급적 이 일이 퍼지지 않도록 주의해.”

    대공의 대답에 아실이 마른침을 삼키다 부복했다.

    * * *

    며칠 후, 나는 하델루스 대공의 장기 출장 소식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달씩이나 가신다고?”

    “네. 오늘 저녁에 떠나신다고 해요.”

    “그렇게 급하게?”

    대공이야 출장이 잦기는 했지만 한 달씩이나 대공 성을 비운 적은 거의 없었다.

    단순한 출장이 아닌 듯한 긴장감이 성 주변을 감도는 듯도 했다.

    특히 아키드의 스승인 에단 그레이브까지 함께 간다고 하니 위험한 임무라도 받은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뜻을 오해했는지 한나가 말했다.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 에이프릴 후작님을 초대하는 건 조금 뒤로 미루게 됐다네요.”

    “아.”

    맞다, 에이프릴 후작을 곧 초대할 생각이었지.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르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쉽게 됐어요. 오랜만에 후작님과 도련님들을 뵐 수 있었는데. 속상하시겠지만 나중을 기약해야지요.”

    “그러게.”

    나는 최대한 영혼을 담아 중얼거렸다. 사실 그간 에이프릴 후작을 만날 생각을 하면 안절부절못했었다.

    그러던 차에 대공이 장기 출장을 간다니 다행이었다.

    ‘당분간 에이프릴 가문 사람을 마주칠 일은 없겠구나.’

    “편지라도 보내시는 게 어때요? 분명 좋아하실 텐데.”

    “글쎄. 딱히 할 말도 없는데.”

    “뭐라도 보내면 좋아할 거예요. 펜과 편지지를 가져올까요?”

    한나가 질문과 동시에 펜과 종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긴 그날 코비슈타인을 괴롭히지 말라는 내 편지를 받고 에이프릴 후작이 몹시 서운해했지.

    막둥이가 아비 걱정은 않는다느니, 시집을 가더니 변했다느니.

    어찌나 서운해하고 슬퍼하는지, 내가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답장을 받고 나니 내 안에 있던 에이프릴 가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묘하게 달라졌다.

    소설에서나 봤던 잔혹한 악당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까.

    ‘뭔가…… 하찮아.’

    그래. 하찮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편지였다. 딸에게 보낸 편지라기엔 몹시 안달복달하는 듯했으니까.

    금지옥엽으로 키웠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어쩜 내가 아키드 덕질할 때랑 이렇게 비슷하지?

    그사이 한나가 내 앞에 편지지와 펜과 잉크를 두었다. 나는 펜촉에 잉크를 듬뿍 찍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대충 사정이 이러해 당분간 초대는 어렵다는 말이었다.

    “근데 아버님은 어디로 가신대?”

    “스티그 섬이라고 했던 거 같아요. 황실 사업과 관련해서 다녀오신다네요.”

    “어디라고?”

    나는 익숙한 섬 이름에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한나가 재차 ‘스티그 섬’이라고 말하자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스티그 섬이라면…….’

    소설에서 제일 먼저 죽은 땅이 됐던 섬이었다.

    그곳을 기점으로 이곳저곳에서 오염이 시작되었던 것까지 떠오르자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직 오염이 시작되려면 한참 남았던 것 같은데…….’

    물론 대공이 오염 때문에 방문하는 게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순 출장이라기엔 동행하는 기사단은 정예부대였다. 호위 기사를 많이 데리고 다니지 않는 대공으로서는 조금 과한 멤버이기도 했다.

    지나친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미 내가 정령사가 된 것부터가 원작과는 다른 행보인 탓이었다.

    그렇게 찝찝하게 있던 찰나, 하델루스 대공이 내 침실 문을 노크했다.

    “새아가, 나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느냐.”

    “대공 전하?”

    한나는 갑작스러운 대공의 방문에 깜짝 놀라 부산스럽게 이곳저곳을 정돈했다.

    “들어오세요.”

    내가 출입을 허락하자 제복을 갖춰 입은 데미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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