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아키드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유독 잠이 오지 않는 건 생각이 많아진 탓이었다.
‘아키드 님, 저는 지금 무지 행복해요. 내일 죽어도 괜찮을 만큼.’
로에나가 낮에 했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순간 아키드는 그녀가 웃고 있음에도 울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특히 에이프릴 가문의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푸른 눈동자가 수렁에 빠진 것처럼 짙은 빛깔로 물들었다. 새하얀 피부는 희게 질려 여린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흡사 벼랑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파르라니 떨렸다. 그대로 툭 떨어져 바스러질 것처럼 안쓰러웠다.
그래서였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뺨을 감싸 쥔 것은.
정작 쥐고도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작고 보드랍고 또 가녀려서.
푸른 눈동자가 놀라 저를 빤히 쳐다보았을 때는 가슴 언저리가 콩콩, 뛰는 듯도 했다. 배시시 웃었을 때는 심장께가 찌르르하기까지 했다.
언제부터 저 미소에 감정이 동요할 정도로 마음이 깊어진 걸까.
그녀가 행복하다고 했을 때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내일 죽어도 좋다고 했을 때는 반대로 심장이 철렁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채색 같았던 하델루스 성에서의 생활에 색깔이 덧입혀지기 시작한 게 로에나 덕분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의 생활이 너무 아늑하고 좋아서 마치 꿈속을 거니는 것 같노라고. 그러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지금 이 기분 그대로 잠들고 싶다 여긴 적도 많았다. 깨어질까 두려워하지도, 부서질까 무서워하지도 않게 말이다.
아키드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듯 머리를 헝클이며 손으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조금 더 욕심내어도 될까.
그녀가 선 바깥에서 자꾸만 톡톡, 두드릴 때마다 아키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대로 두면 선 안으로 들어와 버릴 텐데. 그러면 정말로 욕심날 텐데.
어쩌면 이미 선을 밟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키드는 로에나를 향한 제 마음이 어떤지 쉽사리 정의하지 못했다.
‘그런데 에이프릴 가문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분명 코비슈타인의 이야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로에나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에이프릴 후작을 초청하겠다고 한 직후부터 그녀는 어딘지 불안해 보였다.
급격히 얼굴이 굳어지더니 제 손의 떨림도 가누지 못해 숨기지 않았던가.
자꾸만 그 모습이 떠올라서 아키드는 좀처럼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 * *
“완벽하구나.”
나는 양손으로 뺨을 감싼 채 흐뭇한 표정으로 서재를 둘러보았다.
설계사가 다녀가 견적을 잡고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하니 이제야 서재가 생겼다는 실감이 든 탓이었다.
그때 한나가 내 표정이 우스웠는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물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응응! 너무 좋아, 벌써부터 설레!”
저기다가는 아키드 초상화를 진열해 두고, 저기에다가는 아키드가 활쏘기 대회에서 쏘았던 과녁을 두고…….
벌써부터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이곳을 아키드의 것으로 차곡차곡 채울 생각을 하니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내가 잔뜩 신난 표정으로 히죽거리자 한나가 말했다.
“기분이 나아지셔서 다행이에요.”
“내가 기분이 나빴던 적이 있나?”
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한나가 물었다.
“요즘 조금 우울하신 것 같았는데 제가 오해했나요?”
“전혀.”
어깨까지 으쓱이자 한나가 그럼 되었다며 나를 밖으로 안내했다. 계속 두리번거리다간 인부들이 눈치 보여 일을 못 한다나 뭐라나.
앞으로 구르고 뒤로 굴러도 맞는 소리라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떠나며 인부들이 먹을 만한 간식을 챙겨 주라 지시했다.
돈을 주고 시키는 일이래도 먹는 걸로 괜히 서럽지 않게 잘 챙겨 줘야 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막 침실에 다다랐을 즈음, 마침 시녀장 아리아 백작 부인과 마주쳤다.
“대공자비님, 에비스 광산 건으로 대공비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어머님이?”
“네. 인증 절차가 마무리되었다네요.”
“오오, 드디어!”
그 말인즉, 내게 주어질 보상도 확정이 되었다는 뜻.
나는 웃음이 만개한 상태로 아리아 백작 부인을 졸래졸래 따라갔다. 그리고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반기는 건 대공비뿐만이 아니었다.
“대공자비님.”
“헨리?”
나는 헨리를 보고 놀랐다가 금세 납득했다. 아마도 직접 와서 에비스 광산의 인증이 승인되었음을 알린 모양이었다.
“왔구나, 새아가.”
그때 대공비가 나를 반기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순순히 자리로 가 앉으니 헨리가 앞에 와 섰다.
“아리아 백작 부인에게 에비스 광산 건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래. 다 네 덕이지.”
엘레나가 유려하게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앞에 선 헨리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리니 대공비가 물었다.
“내게 더 할 말은 없니?”
“할 말이요?”
나는 대뜸 떠보는 듯한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대공비가 헨리를 쳐다보며 턱짓했고, 그가 눈치껏 입을 열었다.
“대공자비님.”
“응, 말해.”
“지난번에 제게 받아 갔던 시계는 잘 가지고 계신가요?”
“물론이지.”
원래라면 그 회중시계로 정령의 가호를 받은 땅임을 증명하려 했었다.
그러던 차에 헨리가 덥석 미끼를 물어서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헨리가 직접 나서는 게 회중시계로 대공비를 설득하는 것보다 낫겠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게다가 헨리에게는 그것 말고도 만들어 둔 시계가 더 있었다. 아키드에게 주었던 것도 그중 하나였고.
그런데 갑자기 그 시계에 대해서는 왜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내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헨리가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그 시계를 지니고 있어도?”
“응. 아무런 문제 없는데.”
시계가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갑자기 괜찮냐고 물으니 퍽 당황스러웠다.
그때였다. 대공비가 회중시계를 딸깍, 열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시계는 이전에 봤던 것처럼 델루스 꽃가루가 색색깔의 모래처럼 들어차 있었다.
대공비가 온화한 얼굴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 의중을 살피려는 듯이 기묘한 눈동자.
“신기하구나. 얼마 전에 델루스 꽃 알레르기로 크게 앓았던 네가 이 시계를 만지고도 멀쩡하다니.”
“!!”
그 순간 헨리를 꼬드기기 위해 델루스 꽃 알레르기를 운운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델루스 꽃이 갑자기 피었다 지는 현상을 흘리기 위해 했던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헨리가 그것과 관련해 대공비에게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델루스 꽃밭에서 죽다 살아났던 내가 델루스 꽃가루가 담긴 시계를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닌다?
아예 관련 없는 사람이 듣기에도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내가 크게 앓았으니 꾀병을 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설명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왜 그때에는 발작을 일으켰으면서 지금은 멀쩡한지를.
순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내부가 더워서라기보다는 대공비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읽어 내기 어려워서였다.
내가 도르륵 눈을 굴리자 대공비가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새아가, 다시 한번 물으마. 정말로 내게 할 말이 없니?”
또다시 같은 질문. 그러나 아까와 같은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헨리가 안경을 추키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이건…….”
“에비스 광산 웜홀에서 추출한 마석입니다. 상태가 기존 마석에 비해 열 배의 위력을 지닐 정도로 좋습니다.”
“대단하네.”
“예. 대단하죠. 마석은 생성 후에 시간이 지날수록 마력 보존율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걸 감안하면 최상급의 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짜고짜 마석에 관한 심도 깊은 설명에 나는 눈만 멀뚱멀뚱 떴다. 그러자 헨리가 설명을 이었다.
“정령이 잠시 서식했다고 해서 최상급 마석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그랬다면 고대에도 이러한 마석 광산이 많이 나타났어야겠죠.”
그 순간 정령들이 지나가며 조잘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 원래 계약자가 없이는 정령의 흔적이 발견되기 어려워.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흔적이 사라지거든.
내가 정령과 계약하지 않았다면 유지되지 않았을 흔적들.
그건 마석의 마력 보존율과도 관련이 있던 모양이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헨리가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해 마석의 마력 보존율이 높다는 건 그만한 환경이 이루어졌을 때라야 가능하죠.”
헨리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를테면, 정령들이 계속 그곳에 머물고 있거나…… 정령이 인간과 계약한 장소일 경우에 그렇습니다.”
“…….”
“대공자비님께서는 웜홀 안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무얼 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헨리와 엘레나의 시선이 내게로 고정되었다. 이래서야 더는 발뺌하기도 어려운 판국이었다.
내가 아무래도 헨리를 얕본 모양이었다. 물론 일부러 그가 알아차리기를 바라서 단서를 여기저기 흘렸던 것도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알아차릴 줄은 몰랐는데.
나는 헨리가 제법 추리에 능하다는 것에 놀라워하며 허공에 둥둥 떠서 경악하는 정령들을 쳐다보았다.
설마 자기들을 이렇게나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정령들은 비상이 걸린 듯 헨리 주변을 빙빙 돌았다.
이놈을 죽일까 말까, 하는 듯한 몸짓.
나는 헨리를 구해 줄 겸 입을 열었다.
“웜홀 안에서 정령들을 만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