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은 로에나가 코비슈타인을 위해 호텔 플렉스를 하려던 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로에나의 편지가 에이프릴 성에 도착했을 때, 성안은 축제 분위기였다.
“드디어 로에나 님의 편지가 왔어!”
“이제 더는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겠지!”
“오오, 신이시여. 드디어 저 사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군요.”
감격에 찬 사용인들이 ‘어화둥둥, 우리 아가씨’ 하며 노래를 부를 정도로 성안이 떠들썩했다.
이들이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이게 된 사연이 있었으니.
실은 에이프릴 성에서는 로에나의 편지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 로에나가 ‘먼저 연락하면 다신 안 볼 거야!’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하고 에이프릴령을 떠난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게 결혼하기 전부터 에이프릴 후작과 그의 아들들이 로에나의 일에 사사건건 끼어들며 극성이란 극성은 다 부려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의 시달림을 견디다 못한 로에나가 델루스령으로 떠나기 전날,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로에나의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할 수 있는 삼인방인지라 곧이곧대로 로에나가 먼저 연락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참이었고.
그런데 1년여 동안 소식 없던 아가씨가 편지를 보냈다.
후작이 그날을 에이프릴령의 기념일로 삼겠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에이프릴 후작 부인이 로에나를 낳다 산고 끝에 사망하여 로에나는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 젖 한 번 물지 못했으니 오죽 안쓰럽고 귀했을까.
다른 이들에겐 사탄 소리 듣는 에이프릴 삼인방이었으나 로에나에게만큼은 천사가 따로 없었다.
로에나의 편지를 테이블 중앙에 두고 회의가 벌어졌다. 카일이 진지하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로에나가 알랑으로 휴양을 간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거르더니 올해는 휴가를 계획한 모양이죠.”
“그렇다면 우리도 지금 당장 알랑으로 간다.”
에이프릴 후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언하자 일라이저가 주저하며 물었다.
“하지만 아버지, 그랬다가 막둥이가 싫어하면 어쩌죠?”
일라이저의 물음에 후작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당연히, 숨어서 지켜본다.”
“역시, 아버지. 그럼 저는 들키지 않도록 은신 물품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라이저가 잔뜩 의기를 다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카일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두 사람을 막으며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몇 년 전 로에나의 재롱 잔치 연습 때도 몰래 지켜보다가 들켰지 않습니까. 그때의 처참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 벌써부터 눈물이.”
후작이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여전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여름 재롱 사건 때의 막둥이는 정말 무서웠지.”
일라이저가 덩달아 양팔로 가슴을 감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그마치 일주일을 삐쳐서 삼인방을 애타게 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된통 혼이 난 삼인방은 그날을 ‘여름 재롱 사건’으로 명명할 정도였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아주 무시무시한 시간들이었다.
“그렇지만 막둥이가 너무 보고 싶단 말이야!”
일라이저가 앓는 소리를 하자 카일이 안경을 추키며 말했다.
“누가 보러 가지 말재?”
“그럼?”
기대감에 일라이저가 눈을 빛내자 카일이 후작을 바라보며 제 뜻을 밝혔다.
“아버지, 이참에 대놓고 환대를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마침 에일 호텔 답사를 갈 시기도 되었지 말입니다.”
“오오, 그러고 보니 벌써 그렇게 되었군.”
“이야, 그거 좋은 생각인데? 이왕 하는 거, 환영식도 제대로 해 주자고! 우리 막둥이가 좋아하는 파티!”
그렇게 계획된 로에나 환대식은 에이프릴 후작의 승인과 카일의 기획, 일라이저의 통솔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언제고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풀기 어려운 법.
알랑에 도착한 삼인방이 로에나의 방에 짠― 하고 등장했을 땐 웬 남정네 하나가 어리둥절한 채 서 있었다.
“막둥아! 보고 싶었드아!”
“으억!”
일라이저의 외침과 함께 부는 팡파르 소리에 깜짝 놀란 코비슈타인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탓에 바닥에 세워 둔 도미노가 연달아 주르륵 쓰러지기 시작했다.
도미노들이 모두 누운 자리엔 이곳에 없는 로에나를 위한 환영 문구가 그려졌다.
[로에나, 사랑한다!]
전해지지 못할 메시지가 모두 그려지고 방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휩싸였다.
그중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에이프릴 후작이 호위 기사의 검을 빼앗아 코비슈타인을 위협했다.
“우리 귀염둥이 로에나는 어디다 빼돌렸지?”
당장이라도 상대를 잡아먹을 듯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서.
* * *
그날 늦은 오후, 간식 타임이 되자 나는 아키드에게 오늘 받은 해괴한 서신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그래서 코비가 납치범이 아니라는 걸 해명하기 위해 꼬박 세 시간을 설득했다네요.”
“코비슈타인이 고생했겠군요.”
“제 잘못이죠. 가문에 숙박권을 써도 되냐고만 말해서 제가 간다고 오해한 것 같아요.”
다시 생각해도 정말이지 당황스러운 사건이었다.
코비슈타인에게 점수를 좀 따려고 했더니, 오히려 가문을 이용해 경고한 꼴이 아닌가?
[로에나 님, 앞으로 정말 잘 하겠습니다. 부디 세 분께 말씀 좀 잘 부탁드립니다.]
코비의 편지 구절을 떠올리니 괜히 미안해졌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런 말을 할까?
본의 아니게 코비슈타인에게 무력을 행사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때 아키드가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처가댁의 허전한 마음을 신경 쓰지 못한 탓이죠. 진즉 초대를 했어야 했는데.”
“네?”
“귀한 딸이 시집와서 소식이 없으니 오죽 보고 싶었을까요. 제가 그 부분을 간과했습니다.”
아키드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그의 사과를 받고자 꺼낸 말이 아니었기에 나는 펄쩍 뛰며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아키드 님의 잘못은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자주 편지하지 않은 탓이죠.”
“아뇨. 후작께서 보고 싶다고 편지하시기 전에 먼저 초대했어야 했어요.”
“아뇨, 어차피 결혼해서 독립했는걸요!”
게다가 난 에이프릴 사람들 얼굴도 모른다고요?
답답함에 소리치니 오히려 더욱 오해를 산 것 같았다. 아키드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집요하게 말했다.
“결혼했다고 가족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제가 미흡했어요.”
“진짜 괜찮은데…….”
한동안 우리 둘 사이엔 서로 자신의 탓이라고 엎치락뒤치락하며 끝나지 않을 대화가 이어졌다.
아키드는 저가 처가를 배려하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애초에 초대는 가주의 영역이니 잘못이 있다면 대공의 잘못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아키드와 한참 실랑이를 하던 중, 문득 아까 읽은 에이프릴 후작의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
[막둥아,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게냐.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구나.]
다정한 편지였다. 결혼한 딸에게 ‘막둥이’라는 애칭을 부르는 것부터, 문장 하나하나가 로에나를 생각하는 듯했으니까.
게다가 코비슈타인의 편지를 보면 쌍둥이들도 로에나를 보러 왔다지.
아무래도 그간 에이프릴 가문에서 편지가 오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던 모양이다.
화가 풀리지 않았냐는 것을 보면 로에나가 화를 냈던 것 같고.
‘난 또, 출가외인이라며 딸 소식은 궁금해하지 않는 줄 알았지.’
그 먼 알랑까지 찾아갈 정도로 딸과 여동생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라니.
접해 본 적 없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에 나는 편지를 다 읽고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로에나는 사랑받고 자랐구나.’
그 자명한 사실을 확인하니 가슴에 응어리가 진 것처럼 조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전생의 나는 그런 삶을 살아 보지 못해서 부러운 마음이 든 거겠지.
내가 아키드를 유독 좋아하게 된 이유도 그와 내 처지가 닮아서였다. 나도 그처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갖고 싶었으나 갖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에이프릴 가(家) 사람들이 생각하는 로에나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델루스령으로 오는 게 걱정스러웠다.
혹시라도 내가 가짜라는 걸 알아채지는 않을까?
설령 당장 알아차리지는 못하더라도, 지난 삶에서처럼 누군가의 대타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게 나를 못내 슬프게 만들었다.
사랑받고자 노력했던 전생의 나는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고, 있던 것마저 빼앗기지 않았던가.
잊고 지낸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자 저절로 얼굴이 굳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려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에이프릴 가문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나서 있을 일들이 무서워서, 지금의 평화로운 생활이 너무 즐거워서. 혹시라도 그들이 와서 내 세상이 가짜라고 할까 봐 두려웠다.
나도 모르게 어둠 속으로 침잠하던 때였다. 돌연 보드라운 무언가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향긋한 냄새가 지척에서 풍겼다.
“로에나?”
아키드가 고개를 기울여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걱정기가 묻어난 눈빛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청회색 눈을 보고 있자니 조금 안정이 되는 듯했다.
그래. 언제는 지난 삶에 미련이 있었던가.
나는 오히려 지금이 더욱 행복했다. 아키드의 옆에서 그의 미래를 닦아 줄 수 있는 이 자리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괜찮아요? 안색이 좋지 않은데.”
아키드가 양손으로 내 볼을 만지며 염려 섞인 목소리를 뱉었다.
그가 나름 용기를 냈다는 걸 아는지라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손에 내 손을 포개었다.
“아키드 님, 저는 지금 무지 행복해요. 내일 죽어도 괜찮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