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42)화 (42/177)

#42.

아아, 영롱하구나.

나는 아키드의 여러 초상화 버전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의 말대로 복도에서 본 것과 다른 아키드의 초상화가 여러 개 있었다.

표정이 사뭇 굳어 있는 것을 보면 대공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계하는 듯했다.

청회색 눈동자의 혼탁한 빛이 화가의 재량인지 당시 아키드의 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마음이 찌르르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애틋한 눈으로 초상화를 바라보는데 대공이 말했다.

“설마 이게 통할 줄은 몰랐구나. 안 그래도 버리려던 건데.”

“네? 버리다뇨!”

이 귀한 거를 창고에 박아 둔 것도 모자라 버리려 했다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쳐다보자 대공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네가 갖고 싶다면 다 가져가려무나. 벽에 걸건, 바닥에 진열하건 네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아버님.”

나는 도끼눈을 뜬 적 없다는 양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했다. 그가 번복할세라 아실을 시켜 초상화를 내 방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곤 대공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는 내 다이어리를 보고도 경악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이 보기에 그 다이어리는 조금 스토커처럼 보일 수 있음에도 말이다.

오히려 대공은 조금 이상한 부분에 꽂히신 듯하다.

“일정을 정리한 솜씨가 대단하더구나. 일목요연해서 한눈에 보기 쉬웠어.”

“어릴 때부터 정리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물론 덕질을 위한 정리였다. 자고로 훌륭한 이중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일코와 덕질의 균형을 잘 잡아야 했다.

전생에서부터 일코를 일삼았던 나는 정리 하나는 끝내주게 잘했다. 최애의 모든 것을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레 습득한 노하우였다.

게다가 지금은 최애의 부인까지 된 상황. 이런 꿈의 직업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그야말로 덕업일치!

내가 아무리 덕질해도 남들 눈엔 남편을 지고지순하게 섬기는 개과천선한 대공자비로 보인다는 말씀!

흐흐흐,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오는데 대공이 말했다.

“다소 세세한 게 조금 과해 보였지만 그래도 네가 아키드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는 알 수 있었다.”

“과찬이세요, 아버님.”

“내가 그동안 너를 과소평가했던 거 같구나.”

“저도 뭐, 그간 잘한 건 없는걸요.”

“그건 그랬지.”

대공이 과거의 로에나를 떠올리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 모른 척했다.

“어쨌든 아키드 님을 향한 제 진심을 아셨으니 아버님은 이제 저와 공범이세요.”

“공범?”

대공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내가 손을 까닥여 귀를 대 보라는 몸짓을 취했다. 그가 알아듣고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아키드 님과 관련된 게 또 있거든 꼭 제게 먼저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

“아셨죠? 아키드 님에 관해선 전적으로 저를 신뢰하셔야 합니다.”

“그걸 꼭 이리 은밀하게 속닥거려야 하는 거냐, 새아가.”

대공이 황당하다는 듯이 힐끔거렸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순진한 척 말했다.

“아버님과 저는 이제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잖아요.”

“이게 비밀일 것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아키드도 알면 좋아할 테고.”

“딱히 아키드 님이 알아주길 바라서 하는 게 아니에요.”

원래 덕질이란 건 최애를 멀리서만 봐도 배가 부른 법이다.

최애가 나를 모를지라도 나는 최애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게 바로 덕질의 세계.

내가 결연하게 중얼거린 말에 대공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언뜻 감동한 것 같기도 한 얼굴에 다소 의아해지려는데 대공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격려했다.

“다 컸구나.”

“아직 더 커야 하는데요.”

여기서 멈추면 그건 너무 작잖아!

내가 흠칫하며 뒤로 주춤하자 대공이 상체를 세우며 말했다.

“어쨌든. 네가 대공자비로서의 책무에 얼마나 진지한지는 잘 알았어. 이제 너도 가문의 일원으로서 제 몫을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제 몫이요?”

“그래. 조만간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찾아보겠다.”

“네?”

“물론 보상은 확실히 할 거다. 대공가에서 주는 인센티브는 물론 아키드에 관한 정보도 고려해 보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버님. 저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재고 따질 것도 없이 충성을 맹세했다.

두 주먹까지 불끈 쥐며 의기를 보이자 대공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평소보다도 느슨한 모습에 나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슬쩍 꺼내 보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버님. 부탁이 하나 있어요.”

“말해 보아라.”

대공이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입을 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 개인 서재가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

덕질하려면 개인 비밀 공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자 대공이 대답했다.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 * *

전생에서부터 내겐 꿈이 있었다. 마음껏 덕질할 수 있는 광활한 방이 있으면 좋겠노라고.

일종의 나만의 전시관이었다. 아키드의, 아키드에 의한, 아키드를 위한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 갖고 싶었다.

지금 내 침실에다가 꾸미기에는 내 안의 덕력은 스케일이 남달랐으니까.

아실이 나를 널찍한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 방의 정체를 알았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여긴…….”

“대공 전하께서 빈방이니 원하는 대로 쓰라고 하셨습니다. 혹여 구도를 바꾸고 싶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설계사를 부르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정말 이 방을 제가 써도 된다고 하시던가요?”

나는 얼떨떨하게 질문하며 방 안을 살폈다. 이곳은 지난번에 내가 혼쭐을 내줬던 대공의 애첩이 머물던 방이었다.

물론 로르크 영애와 헤어진 후로 가구를 싹 다 버린 후라 완전한 공터였다. 여기에 가구를 채워 넣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다시 애인이 생기면 쓸 줄 알았는데.’

로르크 영애와 헤어진 이후, 대공은 애인을 성에 데려오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찾아오는 전 애인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기 일쑤였다.

처음엔 그게 로르크 영애를 잊지 못해서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녀가 하루아침에 델루스령에서 쫓겨나자 그 말이 쏙 들어갔다.

그래도 아예 이곳을 내게 줄 줄은 몰라서 조금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긴가민가해 주저하자 아실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더는 사용하지 않을 방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받는 수밖에.

솔직히 나는 이 방이 꽤 마음에 들었다. 공간이 널찍한 데다가 문 하나를 두고 방이 나뉘어 있어서 시크릿 존을 만들기 좋아 보였다.

안쪽 방은 내 컬렉션을 진열해 두고 바깥쪽 방은 대외적으로 보여 주기식 서재로 사용하면 적당할 터.

대공이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이 방은 이제 내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방을 꾸밀 생각에 잔뜩 들떠서 말했다.

“그럼 설계사를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작은 마님.”

이제 코비만 돌아오면 완벽한 덕질 라이프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겠구나.

한껏 들떠서 아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비비안이 반겼다.

“아가씨, 알랑에서 편지가 왔어요.”

“알랑에서?”

알랑이라면 이번에 코비슈타인이 휴가를 간 지역이었다.

설마 휴가 기간을 더 연장해 달라는 이야기려나? 그건 좀 곤란한데.

나는 다소 긴장한 얼굴로 편지를 받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지는 두 통이었다.

하나는 코비슈타인이 보냈고, 다른 하나는 의외의 인물이 보낸 것이었다.

[사랑하는 로에나에게 ― 너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세 남자가]

“어어?!”

갑자기 에이프릴 가문이 왜 튀어나오는 거야?

게다가 세 남자라면 에이프릴 후작과 쌍둥이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사람들의 편지가 왜 코비슈타인의 편지와 함께 온 거야? 그것도 발신지가 둘 다 알랑이라니.

에이프릴령과 알랑은 제법 거리가 있는 거로 알아서 당혹스러웠다. 내가 눈에 띄게 놀라자 비비안이 배시시 웃으며 재촉했다.

“놀라시기만 하지 마시고 읽어 보세요.”

“으응.”

나는 엄습하는 불길함에 우선 코비슈타인의 편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려가는 도중 나는 한 구절에서 멈칫하고 말았다.

[알랑에 도착하니 엄청난 환대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로에나 님이 준비해 주신 줄로만 알았죠.

숙소에는 웬 꽃다발이 놓여 있고, 오케스트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마치 프러포즈 현장 같은 분위기에 나중에는 방을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해서 나가려는 찰나, 그분들이 등장하셨습니다.]

설마.

나는 불길한 예감에 동봉된 편지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평정심을 애써 유지하며 느릿하게 편지를 마저 읽으려 했다. 하지만.

[예. 같이 보낸 편지로 예상하셨겠지만 에이프릴 후작님과 소후작님, 그리고 공자님께서 팡파르를 불며 나타나셨답니다.

아마도 작은 마님께서 휴양을 오신 줄 아신 모양이지요.

그때 저를 발견한 세 분의 표정이 썩어 갔을 적엔 ‘아, 오늘이 내 제삿날이구나’ 싶었답니다.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미쳤나 봐!”

나는 이어지는 충격적인 내용에 코비슈타인의 편지를 더는 읽지 못하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