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40)화 (40/177)

#40.

한편 업무를 마친 엘레나는 아키드와 로에나가 오기 전에 볕 좋은 테라스에서 한가롭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막 찻잔을 들었을 때였다. 왼쪽 어깨가 유달리 저릿해 얼마 못 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엘레나는 내색하지 않고 찻잔을 돌려 오른손으로 쥐었다.

활쏘기 시합할 때 무리를 한 건지, 아니면 심리적인 요인인지 어깨가 지끈거렸다.

이미 다 나은 후인데도 이따금 원인 모를 통증이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익숙해 엘레나는 차분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죠.’

불쑥 데미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염려 섞인 어조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어진 시비조에 저도 모르게 동요하고 말았다.

하긴 언제는 그를 제대로 알아본 적이 있던가. 엘레나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가 이런 난봉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자 문제가 전혀 없기도 했고, 그녀 앞에서는 숙맥처럼 굴었으니까.

옛 생각을 하니 도로 짜증이 밀려왔다.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보았다.

이따금 옛 모습을 보일 때면 그녀도 모르게 기대했다가 이어진 실망에 마음이 더욱 차갑게 식기를 반복하곤 했다.

그녀는 잡념을 꺼트리려 찻잔을 휘휘 흔들어 차향을 맡았다. 조금 안정이 되려는 찰나 지척에서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뜻 ‘대공님’ 어쩌고 하는 것을 보면 대공이 또 여자를 끼고 노는 듯했다.

‘저급해.’

엘레나는 차 맛이 똑 떨어져 찻잔을 내려놓았다. 애초에 로에나가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불쾌한 소음을 피해 자리를 떠나려는데 대공이 알은체했다.

“여기 계셨군요.”

하는 수 없이 뒤를 도니 역시나, 여자가 옆에 있었다. 그게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아 엘레나가 비꼬기 시작했다.

“공사다망하시네요. 여기서도 정력을 쏟을 시간이 있으시고.”

“이놈의 인기는 가시질 않아서요.”

데미안이 응수하듯 여자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방금까지 여자가 아무리 옆에서 종알거려도 들은 체도 안 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엘레나는 그의 품에 반쯤 안긴 여인을 응시했다.

복장을 보아하니 이곳 귀족 출신인 듯했다. 대공비의 시선에 움찔, 떨면서도 그녀는 대공의 품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이번에도 금발이었다.

금발에 성벽이 있기라도 한 걸까.

하필 그녀 자신 또한 금발에 속하는 백금발이라 심기가 뒤틀렸다.

엘레나는 그대로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리고 찻주전자를 왼손에 쥐어 사뿐사뿐 대공 앞으로 걸어갔다. 엘레나가 여인에게 물었다.

“이 남자의 어디가 좋던가? 얼굴? 재력? 아니면 몸매?”

“네?”

여인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바리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손에 쥔 주전자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엘레나가 피식 웃으며 경고했다.

“편하게 살고 싶으면 눈치를 키우도록 해. 내가 누군지 뻔히 아는 거 같은데 좀 떨어지는 게 어때? 아, 내가 누군지 모르면 친히 가르쳐 줄 의향도 있어.”

“대, 대공비 전하. 저는.”

“그래. 잘 아는군. 얼굴만큼 머릿속도 꽃밭은 아닌 모양이야. 아니다, 유부남한테 들러붙은 걸 보니 이미 꽃이려나.”

엘레나가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씨익 웃었다.

그러곤 무어라 반항할 새도 없이 찻주전자를 여인의 머리 위에서 기울였다.

“꽃을 만났으면 응당 물을 주어야지. 마침 손에 물도 있고.”

“꺅!”

여인이 놀라 두 손을 뻗었으나 엘레나는 멈추지 않았다.

붉은 찻물이 여인의 머리를 적셨다. 그 탓에 어깨동무하던 대공의 소매에도 홍차가 묻었다.

대공은 손을 거두며 아무 말 없이 엘레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인을 감싸 주지도, 엘레나를 저지하지도 않았다.

그저 엘레나의 왼손을 보며 의미 모를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엘레나는 어디 반응해 보라는 듯이 대공을 직시했다. 저지하려 들면 대공에게도 물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악한 대공은 말리지도 않고 한 걸음 물러나 방관할 뿐이었다.

아주 고약하고 얄미운 여우 같으니라고.

엘레나는 더더욱 심기가 나빠져 주전자의 물을 모조리 쏟아 내었다.

한순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여인이 얼굴을 훔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에 퍽 유쾌해져 엘레나가 싱긋 웃었다. 왼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공, 밤에 다 같이 뱃놀이하러 가기로 한 걸 잊지 마세요. 늦으면 강물에 수장해 버릴지도 몰라요.”

“죽지 않으려면 제때 가야겠군요.”

살벌한 경고에도 대공이 피식 웃으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손에 찻물이 튀었습니다. 꽃에 물을 줄 때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주도록 하십시오.”

“친절도 하셔라.”

대공비가 손수건을 받으며 어여쁘게 웃었다. 그러곤 제 손등에 튄 물방울을 닦아 내었다.

그 기괴한 대화를 황망하게 지켜보던 여인이 울먹거리며 뛰쳐나갔다.

대공은 잡지 않았다.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말리지 않는 그답게.

잠시 후 대공이 엘레나의 손에서 주전자를 빼앗아 들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손등에 미세한 홍차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왼손을 지그시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조금 탁한 눈동자로 말했다.

“부인께서도 늦지 마십시오. 늦으면 제가 물에 빠뜨릴지도 모르잖습니까?”

“새겨듣죠.”

그렇게 두 사람은 언제 마주쳤냐는 듯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 * *

박물관은 제법 넓었다. 나는 아키드의 손을 잡고 구경하는 척 정령들이 난리를 친 아티팩트가 있는 곳으로 자연히 걸음을 이동했다.

아키드는 별 의심 없이 나를 따라오며 유물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순진하게 손을 내어 준 아키드를 자꾸만 힐끔거렸다.

‘나는 전생에 연필이었던 게 분명해.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자꾸만 흑심이 생길 리 없잖아.’

실은 박물관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약간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다.

아키드가 먼저 나랑 단둘이 있고 싶다고 말해서인지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고 할까?

그래서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길이 넓고 어둡다는 핑계로 아키드에게 손을 잡아 달라 했었다.

다소 억지스럽고 뻔한 수작이었는데도 아키드는 망설임 없이 손을 잡아 주었다.

나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그 순간에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최애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영광이 내게 주어지다니.

예전이었다면 손을 씻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경계심 많던 아키드가 언제 이렇게 솜사탕보다도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을꼬. 이 할미는 더는 바라는 게 없어.

아키드가 너무 순진해서 곤란하다. 이 귀여운 남자가 커서 흑막이 된다니 믿기질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망상을 하면서 헤벌쭉 웃고 있을 무렵이었다.

자연스럽게 신수를 부화시킨다는 아티팩트 앞에 서게 되었다. 나는 본분을 되찾고 아티팩트를 빤히 살폈다.

아티팩트는 둥근 형태에 바깥에 기이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저 안에 신수를 가둔다니.

생긴 건 꼭 주머니 괴물 만화에 나오는 공 같았다.

물론 거기엔 저런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뭔가를 가둔다는 점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나는 저게 어딜 봐서 아티팩트인지 모르겠다.

솔직히 전시해 둬서 저게 아티팩트구나 싶지, 길 가다 발견했으면 당장 고물상에 팔아먹을 만큼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그사이 정령들이 부산스럽게 유물 주변을 빙빙 도는가 싶더니 불평을 늘어놓았다.

― 아무것도 없어. 빈 깡통이야.

― 다행이다, 무사히 빠져나온 거겠지?

― 에이, 시시해. 오랜만에 신수를 만날 수 있나 했는데.

실망을 한 건지, 안도를 하는 건지 모를 정령들이 연신 투덜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

솔직히 신수가 봉인되어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일단 정령도 깊은 잠에서 깨어난 마당에 저 고물에 든 신수가 빠져나오지 못했을까?

아니, 애초에 신수가 저곳에 갇힌 적이 없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신수가 저곳에 갇혀 있었다면 이미 고고학자들이 알아채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테니까.

정령들은 아티팩트에 흥미가 떨어졌는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드디어 아키드와 완전히 단둘이 된 내가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유물들이 하나같이 고물처럼 보이네요. 지나가며 봤으면 유물인 줄도 몰랐을 거 같아요.”

“그러게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싶었는데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것과 흡사하네요.”

“네?”

“이거요. 아버지 서재에서 이것과 비슷한 물건을 봤었거든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던 거 같군요.”

아키드가 정확히 신수를 봉인한다는 아티팩트를 가리키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버님 서재에서 이걸 봤다고요?

나는 황당한 출처에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자 아키드가 확실하다며 말을 보탰다.

“골동품 상인한테 사기당했다며 서랍에 박아 넣던 걸 본 적이 있어요. 이것보다는 좀 작았던 거 같기도 하고.”

아키드가 기억을 되새기듯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리자 아키드가 시선을 피하며 볼을 긁적였다.

“물론 비슷하게 생긴 물건일 수도 있습니다. 사기당했다 여기신 걸 보면 골동품 상인이 만든 모조품일 확률도 높고요.”

“아아.”

모조품이라면, 뭐.

나는 아키드의 설명에 안심하면서도 내심 찝찝했다.

내가 사는 성에 흑마법사가 만든 물건(또는 그 모조품)이 버젓이 있다는 게 어쩐지 께름칙한 탓이었다.

‘안 되겠다. 돌아가면 당장 버리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하고 박물관을 다 돌고 나올 무렵이었다.

엘레나와 데미안이 마차의 문을 열며 우리를 맞았다.

“늦었구나.”

“어머님, 아버님?”

나는 두 사람이 마중 올 줄은 꿈에도 몰라 두 눈을 둥그렇게 떴고, 아키드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때 데미안이 엘레나에게 말했다.

“부인, 이제 저 둘을 강에 빠뜨리기만 하면 됩니까?”

“미쳤어요?”

엘레나가 질색하며 반박하자 나는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