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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39)화 (39/177)

#39.

신전이라 그런지 숙소는 남녀로 구분되어 있었다.

부부임에도 생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합방해 본 적이 없어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신전에서 잠을 자게 된 게 신기했다. 신전 안에는 귀빈들이 머무는 숙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호텔만은 못하지만 있을 건 모두 갖춘 곳이라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잠깐 나들이를 다녀올 줄만 알았는데 거리가 거리인 만큼 하루 이틀 묵을 예정인 듯했다.

한나가 옷을 간편하게 갈아입히며 말했다.

“듣자 하니 이 지역에는 고대 유적지가 많대요. 지형적 특성상 유물 보존이 쉽다나. 델루스령에서 발견된 유물도 이곳에 일부 전시되어 있다네요.”

“고대 유적지면 무덤 같은 거?”

“무덤도 있고, 그 시절 유물도 있고…… 아! 제례를 지낸 곳도 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잠시만요.”

한나가 설명하다 말고 사라지는가 싶더니 웬 팸플릿 하나를 챙겨 왔다.

“아까 사제가 놓고 간 유적지 지도예요.”

나는 지도를 받아 펼쳐 보았다. 뭔가 전생에서 유적지에 관광을 갔을 때가 생각이 났다.

“보고 계실 동안 아키드 님 준비 다 되셨는지 확인하고 올게요.”

“응.”

그렇게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한나를 보내고 한참 지도를 살피고 있는데 정령이 옆에 와서 조잘거렸다.

― 어라. 이게 여태 남아 있었네?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뭐가?”

내가 의아한 얼굴로 힐끔거리자 정령 하나가 지도 한곳을 가리켰다. 내 시선이 지도 한편으로 옮겨졌다.

[<고대에 신수(神獸)를 부화할 때 쓰던 아티팩트>

기록에 따르면 특별한 힘을 가진 이들이 이 아티팩트를 사용해 신수를 부화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원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힘으로 신수를 깨우는 게 아닐까 추측한다.]

‘신수?’

나는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작에서는 딱히 등장한 적 없던 거라 더더욱 신기했다.

신묘한 짐승이라. 이들도 정령과 마찬가지로 사라진 존재들인 걸까?

하긴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이 정령들도 원작에선 나온 적 없던 존재들이 아니었던가.

새삼 내 상황이 달라진 것에 웃음이 나오는데 정령들이 부산스럽게 종알거렸다.

― 가 보자.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 어쩌면 잠든 신수가 봉인되어 있을지도 몰라.

“신수가 잠들어 있다니?”

― 저건 억지로 신수를 잡아넣는 아티팩트야. 흑마법사들의 짓이지.

“흑마법사?”

― 그들은 정말 악독해.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종족이 죽어 나가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

― 정령사들도 곤욕을 치렀어. 저들이 금기를 저지른 탓에 더는 델피나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이 태어나질 못했지.

― 그 탓에 우리는 잊혀져 버렸어. 만약 저기에 신수가 갇혀 있으면 어쩌지? 너무 불쌍해, 구해 주러 가야 해.

정령들이 지나치게 동요하며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 아티팩트에 진짜 신수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도 과열된 분위기는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금기라니? 대체 흑마법사들이 무슨 금기를 저질렀길래?”

― 우리도 정확히 무슨 금기를 어긴 건지는 몰라. 그저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밖에는.

― 너무 무서운 시간이었어. 세계가 멈추고 우리와 인간이 완전히 분리되어 떨어져 버렸으니까.

정령들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파르르 떨었다.

잠시 후 그들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말했다.

― 그 후로 델피나를 인식한 사람은 네가 두 번째야, 계약까지 성공한 건 네가 처음이고.

“그렇구나.”

이건 마치 넌 선택받은 사람이야, 라고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멋쩍어졌다.

― 흑마법은 사라져야 해. 그건 세계에 균열을 발생시키고 땅을 오염시키니까.

“오염의 원인이 흑마법이라는 거야?”

이건 처음 듣는 정보인데.

원작에선 오염의 원인을 아무도 몰랐다. 그저 갑자기 시작되어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대륙을 위협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흑마법의 영향이라니. 내가 얼른 대답해 보라 추궁하자 정령들이 말을 이었다.

― 물론 오염의 원인은 다양해서 꼭 흑마법 때문이라고 할 순 없어. 하지만 땅이 죽을 정도의 오염은 흑마법일 가능성이 농후해.

― 흑마법은 음지의 힘을 끌어들이는 마법이라 세계를 이루는 에너지들을 변질시켜.

― 땅이 그 변질된 에너지를 자정하지 못하면 오염되기 시작해.

“흑마법이 그렇게 무서운 힘이야? 자연의 자생 능력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 애초에 흑마법은 삿된 힘이라 자연이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어. 그들은 그걸 알면서도 자연을 착취하려 드는 거고.

정령은 마치 제 일처럼 분기를 토하며 으르렁거렸다. 물론 나비의 형태로 왕왕대는 거라 위협적이진 않았다.

‘그럼 원작에서도 누군가 흑마법을 사용했던 걸까?’

어쩐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앞으로 있을 대재앙이 누군가의 조작일 수도 있다니.

분명 원작에서도 자연이 버티지 못할 만큼의 오염이 시작돼 죽은 땅이 발생했었다.

소설에선 흑마법 자체가 언급된 적이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만약 원작에서의 오염이 흑마법 때문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혹시 지금도…….”

내가 막 흑마법사에 관해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한나가 돌아와 말했다.

“아키드 님도 준비 다 끝나셨대요. 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응. 나갈게!”

그래, 일단은 아키드와의 데이트가 우선이었다.

다 덕질하자고 사는 건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오염 건은 나중을 기약하자고.

내가 지도를 돌돌 말아 손에 쥐자 정령이 뒤따라오며 재잘거렸다.

― 구해 주러 가자. 신수 보러 가자. 응?

― 너 정도라면 신수랑도 계약할 수 있을 거야. 신수는 우리랑 상성도 잘 맞는다고.

“알겠으니까 재촉하지 마.”

― 간다고 했어, 얼른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

내가 정령들을 휘휘 흩으며 대강 대답하자 정령들이 내 새끼손가락에 모여들며 수선을 떨었다.

새끼손가락으로 약속한다는 손동작을 하고 나서야 정령들은 조용해졌다.

* * *

“박물관에 가고 싶다고요?”

“네. 마침 이 근처라서 잠깐 다녀와도 좋지 않을까요?”

내가 지도까지 펼치며 제안하자 아키드가 말했다.

“유물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역시 따분하려나요?”

“아뇨. 저도 실은 가 보고 싶었어요.”

아키드가 씨익 웃으니 뒤에서 후광이 펼쳐지는 듯했다.

나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았다. 아키드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어서 더더욱.

신전에 바퀴 달린 이동수단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이었다니.

마차가 대기한 곳까지 가는 길이 제법 길었다. 날씨가 화창한 탓에 걷기 딱 좋아서 오히려 여유가 생기는 듯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결국 일이네요.”

“그래도 오늘 저녁부터는 시간이 된다고 하셨어요. 내일까지 머물다 갈 테니까 시간도 넉넉하고요.”

“헤헤. 덕분에 우리 둘이 데이트를 하네요.”

“데이트요?”

“아, 데이트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가요? 하긴 가족 여행이 더 맞겠다. 어쨌든 놀러 와서 즐겁지 않아요?”

내가 신나서 손을 휘휘 흔들자 아키드가 남은 손으로 제 입가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입꼬리가 흔들리는 걸 보니 그도 나처럼 신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언뜻 ‘가족 여행’과 ‘데이트’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 같기도 하고.

‘하긴 가족 여행다운 여행은 해 본 적도 없다고 했지.’

아키드는 입적한 이래로 델루스령 밖을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일단 배워야 할 게 많기도 했고, 지리에도 어두운 탓이었다.

애초에 대공이 아키드를 발견한 곳은 수도 외곽이라고 들었다. 정기 회의를 하러 가던 중에 발견했다고.

두 사람 얼굴이 이렇게 닮았는데 바로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아키드는 하델루스 가문의 힘을 진하게 물려받았으니 서로 느껴지는 게 있었겠지.

나는 아키드에게 행복한 기억을 많이 주고 싶어 호기롭게 장담했다.

“앞으로도 자주자주 다녀요. 둘이서든, 넷이서든.”

물론 둘이서 가는 게 더 좋겠지만.

내가 뒷말을 꾹 삼키는데 아키드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직구를 날렸다.

“저는 이왕이면 둘이 좋아요.”

“네?”

설마 내가 소리 내어 말했던가?

너무나 듣고 싶던 말을 아키드가 내뱉은 터라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을 들었을 때―

“두 분이 계시면 방해되니까.”

나도 모르게 멍하니 아키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아키드가 맞나, 싶은 발언인 탓이었다. 아키드의 입에서 부모님이 방해된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무엇보다도 원하던 아키드가 아니었던가?

원작에서 부모님의 냉대에도 자식 도리를 다하려 했던 그였기에 그들을 귀찮아하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그때 아키드가 확인 사살을 하며 씨익 웃었다.

“전 사실 둘이 오고 싶었어요.”

맙소사.

여기가 내 묘지인가?

나는 아키드의 살인 미소에 정말로 숨이 꼴깍,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도도한 고양이가 대뜸 안겨 들었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가끔 저렇게 예고 없이 치고 들어올 때면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입 안에 넣고 와랄랄라~ 하고 싶을 만치 귀여워 죽겠다.

아마 내 이 격한 마음을 아키드가 다 들여다본다면 경악할지도 몰랐다.

나는 애써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를 유지하며 말했다.

“하긴 시부모님이 너무 변덕이 심하시죠? 그 기분 맞추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긴 해요.”

“그게 아니래도 전…….”

“이쪽입니다, 대공자님, 대공자비님.”

아키드가 무어라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때마침 마부가 마중을 나온 터라 그가 하려는 뒷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뭐라고요?”

“아닙니다.”

아키드가 냉큼 대답하곤 마차에 후다닥 올라탔다. 언뜻 귀가 붉게 달아오른 건 햇빛 때문이려나.

아니, 내 망상 렌즈가 전지적 덕후 시점으로 그를 보고 있는 탓일지도.

아무래도 중증인 것 같았다. 나는 열띤 마음을 후후, 심호흡으로 식히며 그를 따라 마차에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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