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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38)화 (38/177)
  • #38.

    불편하다. 몹시 불편해.

    나는 냉랭한 저녁 식사 자리에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헷갈렸다.

    둘 다 고집불통이라 먼저 피하기는 싫었는지 악착같이 얼굴을 맞대고 식사 중이셨다. 그것도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이게 벌써 사흘째라 정말 죽을 맛이었다.

    활쏘기 시합 이후, 황실 파견단은 마지막 답사를 마치고 수도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정기 회의가 열리겠군요. 그때 다 같이 오십시오. 서로 인사도 나눌 겸.’

    에셀 공작이 끝까지 나를 악녀님과 소개해 주고자 하는 의사를 내비쳤을 때는 어찌나 오싹하던지.

    게다가 그가 다녀간 이후로 우리 집 분위기가 영 말이 아니었다.

    우리 가문에 이런 냉기류를 흘려 놓고 도망치다니! 역시 악녀의 아버님!

    분위기가 살벌해 대공에게 다이어리를 달라고도 못 하고 있어서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콜록!”

    결국 음식이 목에 걸린 내가 콜록거리자 아키드가 물을 건넸다.

    “괜찮아요?”

    아뇨, 죽겠어요. 저 둘 좀 말려 줘요.

    내 애틋한 눈빛에 아키드가 신호를 오해하고 등을 두들겨 주었다.

    “뱉어요, 어서.”

    “캑.”

    아키드의 두들김에 목에 걸린 당근이 목구멍에서 빠져나왔다.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인 나는 쓴 목을 매만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도로 사이 나쁜 가족이 될 판이잖아.

    어떻게 회복한 관계인데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나는 결연한 마음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 우렁찬 음성에 서로를 노려보던 엘레나와 데미안이 일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리와 사자가 먹이를 바라보는 듯한 형형한 눈동자. 뒤이어 두 사람의 서늘한 음성이 연달아 울렸다.

    “뭐지?”

    “말해 보렴.”

    동시에 나를 응시하니 저절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딱히 내게 보이는 적대가 아님에도 간담이 서늘하다고 할까.

    순간적으로 쫄아서 손을 내릴 뻔했으나 아키드를 보고 용기를 내었다.

    “소, 소풍을 가고 싶어요!”

    내가 힘차게 외치자 잠시 분위기가 싸해졌다. 잠시 후 엘레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아키드와 잘 다녀오렴. 뭘 그런 걸 허락씩이나 받아.”

    내 의도를 완전히 오해한 대답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도리질하며 부연 설명했다.

    “아뇨. 아버님이랑 어머님이랑 넷이서 다 같이 가고 싶어요.”

    “…….”

    “하, 한 번도 다 같이 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네?”

    나는 간절히 두 손을 모으며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명 성격 파탄자 시부모님 화해시키고 화목한 가족 되기 프로젝트.

    에셀 공작이 쏘아 올린 포탄을 잠재우려면 페트라 놀이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저 두 사람은 대화 부족이야.’

    오해를 쌓기만 하고 풀지 않으면 결국 그게 서로를 향한 아집으로 변모하곤 한다.

    원작에서도 엘레나와 데미안은 엉킨 실타래가 손쓸 수 없어진 것과 같아 보였다.

    그만큼 두 사람의 깊은 골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개선의 여지가 있어 보였다.

    내 폭탄 같은 발언에 엘레나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한눈에도 가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당장이라도 싫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아 내가 냉큼 선수 쳤다.

    “파엘 강이 그렇게 예쁘다고 들었어요. 가서 뱃놀이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맛있는 도시락도 먹고…….”

    점점 말이 길어지고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만 흘러나왔다.

    반면 엘레나는 전혀 동하지 않는 눈이었다. 딱 봐도 ‘그런 애들 놀이에 내가 가서 뭘 하나’ 하는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내가 허둥지둥하며 갈피를 못 잡는 사이 아키드가 나섰다.

    “마침 이번 축제 때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를 그 지역 신전에 후원했지 않나요?”

    “그랬었나.”

    “정찰 삼아 소풍을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대놓고 점검을 왔다고 하는 것보다 남 보기에도 좋고요.”

    “흐음, 그거야 그렇지.”

    엘레나가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아까 내 말에는 전혀 감흥 없는 눈을 해 놓고선.

    ‘어린이의 순수한 부탁보다도 일이 먼저다, 이거지?’

    어쩐지 그간의 친밀도 형성이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편으론 아키드의 절묘한 치고 들어옴에 감탄했다.

    ‘날 위해서 직접 나서 주다니…….’

    나는 아련한 눈으로 아키드를 쳐다보았다. 나를 위해서라는 건 내 망상이었다.

    덕후인데 이 정도 착각은 해도 괜찮잖아?

    그때 내내 묵묵부답이던 대공이 말했다.

    “그래, 가자꾸나.”

    “대공.”

    엘레나의 저지에 대공이 대답했다.

    “부인은 쉬고 싶으면 쉬세요.”

    아앗, 그럼 안 되는데! 무조건 다 같이 가야 하는데.

    내가 막 무어라 하려는데 대공이 피식 웃으며 대공비의 속을 박박 긁었다.

    “며늘아기의 소원도 못 들어줄 정도로 매정한 분이시니 말입니다.”

    “내가 언제 안 간다고 했어요?”

    “원래 제멋대로 하던 분이시니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아닙니까?”

    파바밧―

    스파크가 허공에서 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숨 막히는 현장에서 나는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 집안은 가망이 없어. 그냥 아키드 데리고 도망칠까?’

    일촉즉발의 상황. 만약 여기서 언성이 높아지면 아키드를 데리고 식당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요.”

    예상외로 엘레나가 승낙하며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신 마차는 로에나와 타겠어요.”

    어머님, 제 의사는요? 저는 아키드랑 타고 싶어요!

    내가 살짝 도리질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대화 좀 하라고 붙여 놨는데 떨어져서 가겠다니.

    데미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키드에게 말했다.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아키드, 넌 나랑 타자꾸나.”

    아니, 왜요! 부부끼리 타야지!

    말릴 새도 없이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곤 엘레나는 나를, 데미안은 아키드를 붙들었다.

    그렇게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어 버린 나는 멀어지는 아키드를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이게 아닌데…….

    어쩐지 소풍에 가기 전부터 난항이 예상되는 듯했다.

    * * *

    다그닥다그닥.

    나와 엘레나를 태운 마차가 이동하는 소리가 가만히 울렸다.

    엘레나는 멍하니 창밖을 보며 말이 없었다. 어쩐지 기운이 쪽 빠진 듯한 모습에 나까지 나른해지려 했다.

    그렇게 꾸벅꾸벅 졸고 있을 무렵이었다. 엘레나가 나를 불렀다.

    “새아가.”

    “네?”

    “이리 온.”

    그녀가 제 옆을 톡톡, 두드렸다. 퍽 다정한 말씨라 멀뚱히 쳐다만 보자 그녀가 새침하게 말했다.

    “그렇게 꾸벅꾸벅 졸다가 목을 다칠 거다. 무릎을 내줄 테니 누우렴.”

    선심 쓰듯, 강요하듯 그녀가 제 옆을 툭툭, 두드렸다. 나는 마지못해 그녀의 옆으로 가 무릎을 베었다.

    그러자 그녀가 어깨에 둘렀던 숄을 내게 덮어 주었다. 갑작스러운 친절에 잠이 확 달아날 즈음 엘레나가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딱히 너에겐 유감이 없다.”

    “…….”

    “소풍도 언제든지 같이 갈 수 있어. 그러니 그때처럼 잔뜩 긴장해서 부탁하지 않아도 돼. 원하는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하고.”

    아무래도 그날 식당에서의 내 모습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하긴 그때의 대공과 대공비는 무시무시했지.

    나는 다시금 떠오르는 형형한 눈동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퉁명스러운 말씨였지만 그 속에 미안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에 내가 배시시 웃으며 운을 뗐다.

    “네. 그럴게요. 그래서 말인데요.”

    “?”

    엘레나가 말해 보라는 듯 시선을 맞추자 나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돌아올 때는 아키드 님이랑 마차 타고 와도 될까요?”

    하지만 엘레나는 단호했다.

    “그건 안 된다.”

    언제는 원하는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하라며?

    나는 즉각 거절당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엘레나가 낮게 읊조렸다.

    “다 들어준다곤 안 했다.”

    예예. 어련하실까요?

    나는 김이 팍 샌 표정으로 볼에 바람을 넣어 빵빵하게 부풀렸다.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었는데 엘레나는 픽 웃으며 창만 볼 뿐이었다.

    그래. 잠이나 자자.

    나는 엘레나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그대로 깊은 숙면을 취했다.

    * * *

    파엘 강은 델루스령을 벗어나서 한 시간쯤 마차로 이동하면 나오는 마을에 위치했다.

    인근 영주와는 상호 협정을 맺은 터라 이동이 자유로웠다.

    북쪽에서 조금만 아래로 내려왔을 뿐인데 기온이 확 달라졌다. 포근하다고까지는 할 순 없지만 바람이 선선하고 찬기가 덜했다.

    새삼 델루스가 북부의 끝에 위치한다는 게 체감이 될 정도로.

    파엘 강을 끼고 마차가 도착한 곳은 인근 신전이었다. 신전 안에서는 마차를 이용할 수 없어 우리는 사제의 안내에 따라 걷기 시작했다.

    상앗빛 기둥과 정갈한 대리석 바닥이 매일 닦는 것처럼 깨끗했다.

    그게 신기해 두리번거리는데 엘레나가 말했다.

    “이왕 온 김에 넉넉히 머물다 갈 거란다. 처리할 일도 있고.”

    소풍을 온 줄 알았더니 엘레나는 일할 생각뿐인 모양이다.

    이래선 대공 부부 화해시키기가 어려워질 텐데.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뱃놀이는…….”

    “가야지. 보아하니 파엘 강은 밤에 더 예쁘다는구나. 낮엔 인근 유적지를 둘러보고 있으렴. 밤이면 나도, 대공도 시간을 낼 수 있을 테니까.”

    “넵!”

    내가 우렁차게 대답하자 엘레나가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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