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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37)화 (37/177)
  • #37.

    활쏘기를 하는 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주말의 날씨는 최상이었다.

    바람이 조금 불기는 했지만 야외에서 활쏘기 시합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후가 되자 하델루스 소속 기사들과 황실 파견단의 기사들이 연무장에 모였다.

    관중까지 모이자 연무장은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했다.

    뒤이어 시합에 나설 선수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에셀 공작은 붉은 제복을, 하델루스 대공은 검은 제복을 입고 등장했다.

    한눈에도 대비되는 모습에 웃음이 나올 찰나, 나는 뒤이어 나오는 아키드에 콧김을 훙훙, 뿜었다.

    햇살에 검은 흑발이 푸른빛을 띠며 얕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아래 있는 청회색 눈동자는 반드시 이기고자 하는 결연함이 느껴졌다.

    그뿐이랴? 하델루스 대공과 맞춘 것 같은 검은 제복은 아이가 입었음에도 어색함이 없이 자연스러웠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뼈대가 제법 되는 덕이었다.

    ‘세상에, 검은 제복이 저리 잘 어울리면 어떻게 해!’

    내 옆에 있던 화가들이 붓을 놀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총 세 명의 화가는 오늘 아키드만 그리기로 계약이 된 상태였다.

    ‘이날을 위해 내가 돈을 모았지.’

    나는 화가들이 훌륭히 아키드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직 로에나가 남긴 빚이 좀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차차 줄여 가면 되는 거고.

    일단은 지금 당장 아키드의 저 국보급 모습을 그림으로나마 남겨 널리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아키드를 보며 헤실거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관중이 웅성거리는가 싶더니 흰 제복을 입은 누군가가 선수 명단에 태연히 합류했다.

    ‘어머님?’

    나는 잘못 본 것인가, 하고 눈을 비볐지만 엘레나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엘레나는 흰 제복을 입고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채 제 몸만 한 커다란 활을 들고 입장했다. 내가 놀라 어리바리하게 있자 슈리가 말했다.

    “대공비 전하는 어릴 적부터 활쏘기를 즐겨 하셨대요. 한창 즐기실 때는 당해 낼 사내들이 없을 정도였대요.”

    “헉, 진짜?”

    “네. 그리고 이건 들은 건데…….”

    슈리가 머뭇머뭇 내 귓가에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소문에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묶어 두고 머리 위에 사과를 놓아 연습해서 잘하는 거라고…….”

    슈리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입가에 검지를 놓으며 함구해야 한다고 주의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머님, 정말 무서운 분이셨군요.’

    하긴 무려 ‘하인트의 미친개’ 소리를 듣던 분이셨다. 아직 그녀의 본색을 본 적은 없다만 절로 행동거지가 공손해졌다.

    순간적으로 나무에 매달려 머리 위에 사과를 놓는 상상을 해 버린 탓이었다.

    그때였다.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니 아키드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긋 웃으며 제 손목을 가리켰다. 내가 준 손수건이 그의 손목에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으헉!’

    나는 부지불식간에 저격당한 심장을 움켜쥐었다.

    저 손수건은 내 첫 조공품이었다. 조공을 바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마침 시합을 한다기에 준 것이었다.

    그랬는데 이렇게 인증까지 해 주다니.

    나는 감격스러워서 젖지도 않은 눈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곤 화가들에게 눈짓해 얼른 저 늠름하고 해맑고 수줍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그려 내라고 명령했다.

    화가들의 손이 또다시 빨라졌고, 나는 턱을 괸 채 아키드에게 집중했다.

    시합의 승패와 상관없이 이렇게 대놓고 덕질할 수 있음에 흡족해하면서.

    * * *

    아키드는 긴장된 얼굴로 과녁을 응시했다. 바람이 잠잠해지는 그 순간, 팟―! 화살이 쏘아지고 정확히 중앙에 박혔다.

    첫 시작이 좋아 다행이라 여기며 뒤를 도는데 마침 뒤이어 나오는 대공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제법이구나.”

    무뚝뚝한 한마디인데 아키드는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제게 먼저 말을 건 게 신기해서였다.

    “감사합니다.”

    절로 목소리가 공손해지자 엘레나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여 아키드가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엘레나는 꽁지 빠지게 사라지는 아키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무서운가?’

    무어라 더 대화를 해 보기도 전에 쌩하니 사라지는 아키드였다. 어쩐지 좀 멋쩍어진 엘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는 대공자 내외가 무얼 하든 딱히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저렇게 움찔움찔하는 게 조금 신경이 쓰였다.

    엘레나가 활을 들어 과녁을 주시했다. 잠시 후 화살이 정확히 명중하자 그녀가 숨을 후, 내뱉고 뒤를 돌았다.

    그때 뒤에 대기하고 있던 데미안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죠.”

    표정이 사뭇 굳어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걱정하는 투라 엘레나가 빈정거렸다.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요.”

    그러자 데미안이 그녀의 왼팔을 붙들며 말했다.

    “팔을 덜덜 떨면서 할 이야기는 아닐 텐데요.”

    “…….”

    “가볍게 하세요. 이왕이면 기권하면 더 좋고.”

    이죽거림이라기엔 눈빛이 진중했다. 팔을 붙든 손의 압박감으로 떨리던 손끝이 진정되었다.

    엘레나가 가만히 그의 손이 붙든 제 팔을 응시했다. 그리고 데미안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에 손을 탁, 쳐내었다.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하지 말죠. 불쾌하게.”

    “…….”

    “난 멀쩡해요. 지고 나서 울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어요?”

    속에서 울컥 치미는 화에 엘레나가 데미안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내가 누구 때문에 다쳤는데.

    엘레나가 작게 뇌까리자 데미안이 침묵했다. 잠시 후,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언제 걱정했냐는 양 너스레를 떨었다.

    “성치 않은 몸을 한 상대에게 이기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말입니다.”

    “재수 없어.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엘레나가 와락 얼굴을 구기며 데미안의 어깨를 거칠게 치고 사라졌다.

    데미안이 부딪친 어깨를 매만졌다. 언제 웃었냐는 듯이 차가운 낯을 한 데미안이 과녁에 화살을 아무렇게나 쏘았다. 그 탓에 중앙에서 살짝 비껴졌다.

    그는 그 후로도 교묘하게 비껴진 상태로 활쏘기에 임했다. 마치 일부러 점수를 낮추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 * *

    “아키드 님, 고생 많으셨어요!”

    내가 수건과 물을 건네자 아키드가 멋쩍게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우승은 못 했습니다.”

    “네? 무슨 말이에요. 무려 열 번 중에 여덟 개나 명중하신 분이!”

    내가 펄쩍 뛰며 흥분하자 아키드가 눈을 끔벅거렸다.

    “그래도 꼭 우승으로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처연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비의 날개처럼 팔랑이는 속눈썹이 내 마음에 부채질하는 듯했다.

    정말 아키드를 어쩌면 좋을까.

    아무래도 내가 손수건을 주며 응원한 것 때문에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졌지만 잘 싸웠다’였다. 아니, 졌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에셀 공작에 이어 2등을 차지했으니까.

    하델루스 대공은 컨디션이 안 좋은지 자꾸만 중앙을 비껴 부분 점수만 받았다.

    선두를 달리던 엘레나도 후반부에 지구력이 떨어졌는지 실수를 연달아 했다.

    그 덕에 열 개 중 아홉 개를 맞힌 에셀 공작이 우승하고 아키드가 2등을 차지했다. 생각보다 대공의 실력이 별로라 의아했다.

    허풍은 허풍대로 다 내뱉더니 꼴찌라니. 나중에 단단히 놀려 줘야지.

    “충분히 멋있고 잘 싸웠어요. 저는 활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대단하게만 보였는데요?”

    나는 배시시 웃으며 은근슬쩍 그의 땀을 손수 닦아 주었다.

    아키드는 움찔하면서도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괜히 물병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러길 잠시. 아키드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나직이 물었다.

    “괜찮으면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네?”

    나는 언제 의기소침했냐는 듯이 총기 어린 눈동자에 깜짝 놀랐다. 청회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니 절로 긴장이 되었다.

    내가 어버버하며 바라만 보자 아키드가 고개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갑자기 빛을 잃고 홀로 회색빛으로 물들면서.

    “싫은가요? 하긴 저보다는 아버지나 다른 기사에게…….”

    “으으, 아뇨! 가르쳐 주세요!”

    순간적으로 아키드가 안쓰러워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러 버렸다. 그 탓에 지나가던 기사들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절로 낯뜨거워지는 상황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때 아키드가 눈웃음을 사르르 지으며 말했다.

    “네, 좋아요.”

    으음, 뭐지?

    방금까지 처연미가 뚝뚝 떨어지던 낯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해맑은 미소였다.

    이 급격한 온도 차는 무엇일까. 설마 내가 아키드의 끼 부림에 당한 거야?

    내가 얼떨떨한 얼굴로 아키드를 보는데 저 멀리서 대공비가 수라 같은 얼굴로 빠르게 퇴장하는 게 눈에 띄었다.

    들고 있던 화살통까지 내팽개친 게 보통 화난 모습이 아니었다.

    ‘무슨 일 있나?’

    슬쩍 대공의 눈치를 살피니 그도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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