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키드가 움찔하며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그가 제 몸을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내가 한참 그를 빤히 바라보는데 그가 엉거주춤하며 내게 다가왔다.
평소보다도 멀찍이 떨어져 서는 것을 보니 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땀 냄새 나도 괜찮은데.
아키드 땀 냄새는 백화점에 디피되어 있는 고급 향수보다도 향기롭다는 걸 그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아쉬움에 바짝 다가가고 싶었으나 그러면 아키드가 곤란해할 것 같아서 꾹꾹 눌러 참았다.
아키드가 간이 테이블에 있는 꽃을 보며 물었다.
“꽃꽂이를 하고 있었습니까?”
“네. 예쁘죠?”
내가 방긋 웃으며 꽃꽂이한 것을 가리켰다.
다 만들면 침실 로비에다가 둘 예정이었다. 침실을 오가며 나는 꽃향기에 내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고.
“네, 예쁩니…….”
아키드가 대답하다 말고 두 눈을 둥그렇게 뜨는가 싶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부러 거리를 벌리고 있던 것은 까맣게 잊은 것처럼 재빠른 동작이었다.
“다쳤어요?”
“아, 가시에 찔려서. 별거 아니에요.”
맞다, 나 다쳤었지.
나는 그제야 내가 가시에 찔렸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내가 손가락을 뒤로 감추자 아키드가 손을 빼앗았다.
하필 가시에 찔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꾹 누르니 핏방울이 졌다. 아키드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피가 이렇게 많이 나오잖아요.”
그건 아키드가 눌러서 그래요.
라고 말했다간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날 것 같았다.
음, 그 모습도 좀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자연히 머릿속에서 망상이 흘러나오는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나는 이왕 걱정을 받는 김에 좀 더 칭얼거려 보기로 했다.
“으음, 아키드 님이 호호, 불어 주면 금방 나을 것 같아요.”
시무룩한 표정은 덤이었다. 내가 손까지 내밀며 청하자 아키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천천히 내 손가락을 붙들어 호호, 불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간질간질한 바람이 불었다. 그게 꼭 내 마음에다 대고 부는 바람처럼 심장을 후려쳤다.
어떻게 하지, 아키드가 너무 귀여운데.
이 기운을 모으면 대륙도 부술 수 있을 거 같아.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아키드를 바라보았다. 자꾸 참기만 하니 얼굴이 발그레해지려 했다.
그때 아키드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때요?”
너 땜에 죽을 거 같아요.
펑―!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
이러다 심쿵사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싶을 즈음, 비비안이 연고를 들고 왔다.
“어머, 아키드 님도 계시네요.”
“안녕, 비비안.”
아키드가 호호, 불던 것을 멈추고 비비안을 반겼다. 부쩍 친근해진 호칭에 나는 아키드를 뿌듯하게 쳐다보았다.
그때 비비안이 상처를 치료하며 중얼거렸다.
“우리 아가씨가 원래부터 덤벙거리긴 했거든요. 특히 연고를 두고 올 때만 다치신다니까요?”
“비비안, 그거 직무 유기야.”
내가 투덜거리자 비비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들은 체도 안 했다. 그게 어쩐지 괘씸해서 노려보는데 아키드가 말했다.
“그럼 나라도 챙기고 다녀야겠다.”
네. 챙겨 주세요. 아키드가 챙겨 준다면 무릎이 양쪽 다 깨져도 좋아.
내가 별이 반짝반짝이듯 초롱초롱한 눈을 하자 비비안이 어이없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뜻 “아가씨의 변덕을 누가 말려” 하는 것을 보면 아키드에 대한 내 태도가 달라진 걸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나는 치료가 끝나자 아키드에게 말했다.
“파견단이 떠나기 전에 에셀 공작님과 주말에 활쏘기 시합을 하기로 했다고 들었어요.”
“아, 맞아요.”
“아키드 님도 참가하는 거죠?”
내 물음에 아키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벌써부터 활을 쏘는 늠름한 아키드를 볼 생각에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내 그날을 위해 미리 화가를 준비해 두었지.’
그간은 기습적으로 매력을 발산하는 통에 그림으로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대놓고 판을 벌여 주시니 나는 열심히 인생 샷을 소장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 아키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면 보러 올래요?”
“물론이죠!”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해서 황당할 지경이었다.
내가 안 가면 그 멋진 모습 누구한테 보여 주려고?
물론 아키드의 멋진 모습은 모두가 보아야 하지만, 이왕이면 내가 가장 먼저 보고 싶은 게 덕후의 심리였다.
나는 품에서 곱게 포장한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실은 이걸 주기 위해서 아키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꽃꽂이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놀이였고.
“벌써 승리를 기원하는 손수건까지 만들었는데요.”
“네? 로에나가 직접 만들었다고요?”
“그럼요. 매일 손가락을 찔려 가며 수놓은 손수건이에요.”
어린이 손으로 수를 놓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수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실패한 흰 손수건이 걸레로 둔갑한 게 여러 개였다. 그나마 볼만한 손수건을 완성한 게 어제였다.
아키드는 손수건의 자수를 가만히 살피며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게 조금 불안해서 괜히 말이 길어졌다.
“모양이야 시중에 나온 것이나 어머님이 만든 것에 비하면 볼품없지만 제 정성이니…….”
“이거 저인가요?”
아키드가 손수건의 자수를 내보이며 다소 들뜬 목소리를 내었다. 하도 말이 없길래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싶었는데 그 반대였던 모양이다.
내가 얼결에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가 눈웃음을 사르르 지었다. 순간 그의 뒤로 꽃이 팡팡, 피어나는 듯한 착시가 일어났다.
역시 저 손수건은 실패작이었다. 실물을 옆에 두고 비교하니 보잘것없다 못해 형편없었으니까.
나는 손수건을 다시 만들어 주어야겠다 마음먹고 손을 뻗었다.
“안 되겠어요. 주말 전에 다시 만들어서…….”
내가 손수건을 빼앗으려 하자 아키드가 냉큼 뒤로 몸을 물렀다.
“싫어요.”
“네?”
“제 손에 들어왔으니 이 손수건은 이제 제 거예요.”
누가 하델루스 대공의 아들 아니랄까 봐 발언이 몹시 유사했다.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물리니 그가 냉큼 손수건을 품에 숨겼다. 그러곤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직접 수놓은 손수건을 주셨으니 저도 활쏘기 시합에서 1등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아앗,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제가 좋아서 드린 건데…….”
“저도 좋아서 하는 말입니다.”
“좋, 좋아서요?”
“네. 좋아서.”
아키드의 말에 나는 아랫입술을 꼬물거리며 웅얼거렸다.
“소, 손수건이 정말 마음에 드셨구나…….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즉 드렸을 텐데.”
“꼭 손수건 때문은 아니에요. 로에나가 주었다는 게 중요하죠. 그러니 로에나는 저만 응원해야 해요?”
아키드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 모습에 넋이 빠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 이게 말로만 듣던 팬 관리구나…….’
아무래도 내가 아버님이나 에셀 공작님을 응원할까 봐서 미리 관리하는 것 같았다.
걱정도 많지. 내 눈엔 아키드밖에 안 보이는데!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우렁차게 말했다.
“물론이에요!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열심히 응원할게요!”
* * *
슉, 탁!
무언가 쏘아지는 소리와 박히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시합을 앞두고 아키드가 맹연습을 하는 소리였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무장에서 살다시피 하는지라 스승인 에단도 덩달아 연무장에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다.
에단은 하델루스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대공의 명령을 받고 아키드의 검술 스승이 되었다.
아키드가 입적한 지 근 1년 만에 신체 단련을 추가한 거라 사실 걱정이 많았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 본 적 없는 아이를 가르치는 건 노련한 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 탓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아키드는 기본기가 제법 탄탄했다.
근 1년간 교양 수업만 주야장천 했다는 아이치고는 신체가 무척 튼튼했다.
누가 하델루스 가문의 핏줄 아니랄까 봐 운동신경이며 근력이 일반인을 웃도는 수준이었다.
이대로 성년이 되어 하델루스 가문 고유의 능력까지 발현한다면 미래가 창창한 가주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지막 화살까지 명중시킨 아키드가 목을 축이자 에단이 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시합은 아키드 님이 우승일 것 같군요.”
“과찬입니다. 아버지를 이기려면 아직 부족해요.”
“하긴 대공 전하께선 어릴 적부터 활쏘기를 무척 잘하셨지요. 에셀 공작도 사냥을 즐긴다고 했으니 실력이 대단할 겁니다.”
“쉽지 않군요.”
아키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화살이 담긴 통을 응시했다. 설마하니 연습을 더 하려고 하는 건가 싶어 에단이 만류했다.
“농담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시니 시합 전에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네에.”
아키드가 아쉬움을 달래듯 손목에 묶인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언뜻 보니 삐뚤빼뚤한 자수가 눈에 띄었다.
일단 눈코입이 달렸으니 사람임은 분명한데, 또 사람이라기엔 너무 엉성한 자수였다.
에단이 손수건을 뚫어져라 응시하자 아키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게 있는 한 제가 시합에서 이길 겁니다.”
“무슨 부적이라도 됩니까?”
“부적보다 더 귀한 거죠.”
부인이 준 첫 선물이거든요.
아키드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에단이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이번 시합의 승리를 기원하며 대공자비가 손수건을 선물한 모양이었다.
‘사이가 나쁘다더니 다 헛소문이었군.’
에단은 1년 전, 최전방으로 발령되어 마수를 토벌하고 올해 복귀한 터라 로에나의 악명을 귀로만 들었다.
직접 본 적은 없어서 잘은 모르겠다만 손수건에 손수 자수를 놓아 선물할 정도면 소문처럼 아키드와 사이가 나쁘지도, 성격이 고약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자수는 성격 급한 사람이 하기에는 어려운 취미였으니까. 게다가 에단은 소문이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몸소 체감했었다.
이미 아키드에 관해서도 나쁜 소문이 돌았지만, 직접 만난 어린 주군은 소문과 딴판이었다. 그러니 대공자비의 소문도 다 헛것이리라.
에단이 씨익 웃으며 아키드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렇다면 아키드 님께서 1등을 하시겠군요.”
“예. 반드시 그렇게 할 겁니다.”
아키드의 청회색 눈동자에 총기가 어렸다. 그게 꼭 데미안의 어린 시절을 닮아 에단은 흐뭇하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