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35)화 (35/177)
  • #35.

    며칠 전, 나는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내 소중한 다이어리를 산책 도중 잃어버린 탓이었다.

    그것도 아키드의 일거수일투족을 정리해 둔 내 시크릿 다이어리를 말이다.

    아마도 정령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가방에서 흘린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한나와 비비안, 슈리까지 동원해 보았으나 다이어리 모서리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 내 피, 땀, 눈물이 담긴 다이어리가.’

    다행히 다이어리에는 잠금 설정이 되어 있었다.

    내 비자금을 털어서 만든 마도구 열쇠가 아니면 열 수 없었다.

    물론 마법에 능통한 자가 억지로 해제하려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어린애 일기장을 훔쳐보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

    다이어리에 적힌 정보야 이미 머릿속에 다 있다곤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사용인들에게 나중에 찾으면 꼭 내게 가져오라고 신신당부까지 했으나 찾지 못하기를 여러 날이었다.

    그랬는데!

    ‘그게 왜 대공 손에 있는 거야!’

    나는 경악하며 대공의 손에 들린 내 핑꾸핑꾸 다이어리를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다행히 잠금장치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그 속을 들여다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분명 봤다면 나를 저리 다정하게 새아가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 속에는 아키드에 관한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생일이며 키, 몸무게, 혈액형 등등. 알게 모르게 아실을 떠보며 아키드의 정보를 알아내 차곡차곡 쌓은 내 빅데이터들!

    직접 발로 뛰어가며 모은 정보까지 하면 정말 상당했다.

    아키드에 관한 거라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적어 두었으니 남이 보면 조금 무서울 수도 있는 내용들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방긋 웃었다.

    “어,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아버님이 찾아 주셨군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다이어리를 가져가려는데 대공이 뒤로 감추었다.

    “주세요.”

    “찾은 사람이 임자지.”

    “제 거예요.”

    “이 성도 내 거야. 내 땅에서 주웠으니 이젠 내 거지.”

    대공이 억지스럽게 대꾸하곤 다이어리를 돌려주지 않았다.

    누가 성격 파탄자1 아니랄까 봐!

    아무래도 그동안 대공을 너무 얕본 모양이었다. 기회를 노리고 아이까지 이용해 먹으려 하다니.

    파렴치한 사람!

    치졸하고 못된 인간!

    차마 입 밖으론 내지 못할 욕설들을 속으로만 쏘아 대고 있는데 대공이 말했다.

    “에셀 공작이 돌아갈 때까지만이야. 내 부탁을 들어주면 다이어리를 하사하지.”

    선심 쓰듯 내뱉는 그의 제안에 나는 어이가 없어지려 했다.

    “그거 원래 제 건데요.”

    내가 불퉁하게 투덜거리자 대공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젠 내 거니까.”

    죽일까?

    나는 깊은 살의를 느끼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대공비가 너무나도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말이 안 통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대공은 대공비가 반응이 없으니 심심해서 내게로 화살을 돌린 것 같았다.

    졸지에 사이 안 좋은 부부 사이에서 희생양이 되어 버린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저 다이어리가 대공의 손에 있어선 안 되니까.

    이제 보니 디저트는 유인책이고, 진짜 미끼는 내 다이어리였던 모양이다.

    “꼭 돌려주셔야 해요.”

    “물론이지.”

    단단히 다짐을 받는 내 말에 대공이 빙그레 웃으며 다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각서까지 받고 나서야 대공의 손을 마주 잡았다.

    대공과 나의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 * *

    에셀 공작을 감시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키드를 관찰하던 거에 비하면 그리 어렵지 않은 상대라고 할까.

    특히 에셀 공작은 이번 파견단의 총책임자라서 에비스 광산을 자주 오가느라 성을 비울 때가 많았다.

    대공의 조건은 성에 있을 때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시간을 많이 뺏기는 업무도 아니었다.

    그는 주로 일을 하거나 독서나 산책을 했고, 간혹 대공비와 체스를 겨루기도 했다.

    에셀 공작이 대공비를 만날 때면 내가 끼어들곤 했는데, 옆에서 대놓고 감시하는 게 편한 것도 있지만 대공이 그러라고 시킨 탓이 컸다.

    어쩐지 그는 대공비와 에셀 공작이 친하게 지내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체스 게임에서 에셀 공작님이 이기셨어요. 이로써 2 대 2 무승부라고 할까요.”

    내가 상사에게 업무 보고를 하듯 재잘거리자 대공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체스라면 나랑도 할 수 있는데.”

    “저라도 같이 해 드릴까요?”

    내가 선심 쓰듯 질문하자 대공이 도리질하며 거부했다.

    “지면 또 성질부릴 거 다 안다. 좀 더 성장해서 승부를 신청하도록 해.”

    “아버님이 놀리지만 않으면 즐겁게 게임할 수 있어요.”

    “그러려고 게임을 하는 건데 하지 말라니.”

    대공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아키드의 얼굴로 저리 능글맞게 구니 이젠 화도 안 난다.

    ‘내가 아키드 봐서 참지.’

    그것보다 이제 슬슬 대공의 의중을 떠볼 차례인 듯했다. 이 기묘한 거래의 진짜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아서였다.

    ‘에셀 공작을 감시하는 건 핑계고 대공비랑 단둘이 있는 걸 말리려는 것 같단 말이지.’

    묘하게 추가되는 조건을 보면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처음 에셀 공작을 감시하는 조건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서 추가적으로 대공비와 만나면 꼭 옆에 있으라는 요구가 덧붙여졌다.

    그때 산책로에서 만나 으르렁거리던 걸 생각하면 대공은 에셀 공작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다.

    반면 대공비는 에셀 공작과 어려서부터 친했다며 친애를 표현했고.

    이게 평소였다면 그냥 또 시부모님이 기 싸움을 하는가 보다 하겠다만, 어쩐지 수상했다.

    대공비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대공만 드릉드릉 하고 있는 것 같달까.

    대공은 내가 워낙 어리니 다루기 쉽다고 여기는 것 같지만 나는 그리 호락호락한 어린이가 아니었다.

    나는 대공의 경계심이 완전히 늦춰졌을 때 슬쩍 떠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머님이랑 에셀 공작님의 사이가 무척 좋아 보였어요.”

    “좋기는. 원래 대공비는 나랑 더 사이가 좋았어.”

    정말?

    나는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델루스 성에 한 달만 살아도 대공 부부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건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예전엔 꽤 친했다니, 의외의 이야기라 나는 그를 재촉했다.

    “에이, 아닌 것 같은데. 제가 볼 때 어머님이 에셀 공작님을 더 편하게 여기시는 것 같았어요.”

    살짝 자극하니 대공이 나를 무미건조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새아가, 관찰 놀이가 즐거운가 보구나.”

    전혀요. 아키드 관찰하기도 바쁜데 일이 두 배가 되어 귀찮다고요.

    내가 순진한 척 멀뚱멀뚱 쳐다만 보자 대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어린 네가 어른들의 사정을 어떻게 알겠어.”

    그러곤 기운이 탁 빠진 사람처럼 소파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보아하니 진짜로 예전엔 엘레나와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왜 갑자기 사이가 나빠졌을까?’

    이유가 아예 짐작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일단 대공의 사사로운 연애사가 너무 복잡했다.

    자유분방한 아랫도리만 제대로 간수해도 대공비가 질색하지는 않을 텐데.

    물론 대공이 오히려 대공비의 그런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아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여튼 이 부부도 정상은 아니야.’

    나는 어울리지 않게 입을 닫아 버린 대공의 옆에서 열심히 디저트를 먹었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이들의 관계를 파 볼 궁리를 하면서.

    * * *

    “냄새가 나, 냄새가.”

    내가 꽃꽂이를 하며 중얼거리는 말에 비비안이 딴죽을 걸었다.

    “그럼 꽃에서 냄새가 안 나겠어요?”

    “아니, 꽃 말고.”

    대공이랑 대공비 사이 말이야.

    나는 뒷말을 꾹 숨긴 채 꽃꽂이에 집중했다. 귀족이야말로 취미 정복의 끝판왕인 족속들이 아니던가.

    나는 교양이랍시고 온갖 취미 생활을 향유하고 있었다.

    내 돈 안 내고 이런 고급 취미를 가질 수 있다니. 귀족의 삶, 꿀이다.

    ‘둘 사이가 내가 아는 원작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단 말이지.’

    원작은 메이벨의 서사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하델루스 대공 부부의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간혹 등장하더라도 양쪽 다 서로를 힐난하기 바빴다.

    그래서 서로 정말 싫어하는구나 싶었는데, 대공의 낌새를 보니 뭔가 숨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 하델루스 대공의 동태가 몹시 수상했다. 가만히 돌이켜 보니 에셀 공작을 대하는 태도가 연적을 대하는 것 같다고 할까.

    물론 에셀 공작은 대공비에게 사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대공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인데.

    ‘아리아 백작 부인을 떠볼까.’

    그녀는 엘레나가 황궁에 있던 시절부터 함께하던 측근 시녀였다. 결혼 후에는 하델루스 성의 시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리아 백작 부인보다는 엘레나의 측근 시녀인 메이가 더 떠보기 쉬울 것 같고.’

    내가 곰곰이 생각하며 꽃꽂이에 집중하는데 비비안이 주의를 주었다.

    “그건 가시가 있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아야.”

    그런 건 좀 미리미리 말하라고, 비비안!

    내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째려보자 비비안이 냉큼 꽃을 빼앗아 든 후 손수건으로 다친 손을 꾹꾹, 눌러 주었다.

    “어휴, 그럴 줄 알았어요. 조심하시라니까.”

    붉은 핏물이 손수건에 배었다. 여린 피부라 그런지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연고를 가져올게요.”

    비비안이 사라지고 손수건으로 손을 꾹 누르고 있는데, 때마침 기다리던 아키드가 걸어오고 있었다.

    일부러 아키드가 훈련을 마치고 지나가는 길에서 꽃꽂이하며 기다린 터라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키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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