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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33)화 (33/177)
  • #33.

    하델루스 대공 부부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것은 성공리에 끝이 났다. 왁자지껄하던 로비도 고요해졌다.

    나는 대공과 대공비의 얼빠진 표정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피켓 이벤트는 왕년에 덕질했을 때 자주 해 본 일이었다.

    대공비가 질색하면서도 피켓을 챙겼을 때는 내심 뿌듯했다. 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싫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긍정적인 반응이 아닐까, 어림짐작했다. 대공비는 아이를 좋아하니까.

    하델루스 대공은 대놓고 큭큭거리며 피켓을 챙겼다.

    서재에 걸어 두겠다나 뭐라나.

    딱 봐도 평생 놀림감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겐 전혀 타격 없는 놀림이라 끄떡없었다.

    낯 간지러운 피켓 문구를 만드는 건 내게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니까.

    만약 대상이 아키드였다면 저세상 주접을 선보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서재에 걸어 둔들 곤란한 건 내가 아니라 대공이리라. 씻고 나오니 한나가 머리를 말려 주며 말했다.

    “그런 기발한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어쩐지 방에서 내내 무언가를 만드신다 했더니.”

    “그냥, 환영해 주고 싶어서.”

    “저라도 기뻤을 거예요.”

    한나가 배시시 웃었다. 당시 사용인들이 내 아이디어를 듣고 놀랐었다. 설마 내가 대공 부부의 환대에 나설 줄은 몰랐다는 듯이.

    그래도 잘 지내기로 마음먹은 만큼 이왕이면 제대로 하고 싶었다.

    이 기회에 점수도 좀 따면 좋지 않은가?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덕분에 사용인들 분위기도 좋았다. 내가 더는 패악을 부리지 않아서 안도하는 듯했다.

    그때 곁에서 이부자리를 정돈하던 비비안이 말을 거들었다.

    “다들 아가씨랑 아키드 님만 쳐다봤어요. 어찌나 귀엽던지.”

    “화가를 대동했어야 했지 뭐예요.”

    슈리까지 너스레를 떨자 내가 허벅지에 주먹을 내리치며 동조했다.

    “그러니까! 화가라도 대동해서 아키드 님의 모습을 그렸어야 했는데!”

    ‘쭈뼛거리던 그 몸짓 하며, 움찔하는 머리통을 모두가 봐야 하는데! 대대손손 가보로 길이길이 유전되어야 하는데!’

    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자 한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작은 마님?”

    비비안과 슈리도 덩달아 나를 어리바리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아차, 싶어 시선을 내려뜨렸다. 나도 모르게 덕심을 주체하지 못했다.

    실은 아까 아키드의 쭈뼛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피켓을 뿌셔뿌셔 할 뻔했다.

    벌써부터 코비슈타인을 보내 버린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코비가 오면 꼭꼭 영상석부터 만들도록 시켜야지.’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 * *

    며칠 후, 황실 파견단이 델루스령에 도착했다. 몇몇 핵심 인사들만 하델루스 성에 머물고, 파견단은 곧장 에비스 광산으로 향했다.

    하델루스 대공은 뒤늦게 광산에서 정령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고 배가 아파 죽으려 했다.

    이미 엘레나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후라서 더더욱.

    그때 대공이 못내 아쉬운 얼굴로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새아가, 섭섭하구나. 내가 그동안 잘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에는 이런 일이 있으면 내게 먼저 말해 다오. 내가 대공비보다 더 후한 대접을 해 줄 테니.’

    아무래도 나와 엘레나와의 거래를 알게 된 모양이었다.

    하긴 편지를 주고받은 것도 알고 있는 마당에 내가 몰랐으리라고 생각할 리 없었다.

    엘레나는 그 후로 아주 방긋방긋 웃고 다녔다.

    원작에서 대공을 엿 먹일 때마다 지었다는 웃음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이야.

    부부인데도 참, 서로를 미워하는 게 한결같았다.

    여하튼 파견단이래도 황실에서 보낸 사람들이기에 연회를 연다고 한다. 그 일로 성안은 연회 준비로 북적거렸다.

    파견단에겐 본성에서 가까운 별장을 통째로 빌려주었단다. 인증만 하면 될 일인데 꽤 많은 사람이 내려왔다고.

    ‘몇백 년 만의 정령 출현이라 그런 거려나.’

    파견단의 규모가 예사롭지 않아 얼떨떨했으나 곧장 이해했다. 원작에서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웜홀의 규모가 큰 탓이었다.

    얼마 후, 나는 정령들에게서 웜홀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 너와 계약하면서 우리 흔적이 사라지지 않게 돼서 그래.

    ― 원래 계약자가 없이는 정령의 흔적이 발견되기 어려워.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흔적이 사라지거든.

    과연 헨리가 그 오랜 세월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설마 정령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가 계약자가 없기 때문일 줄이야.

    나로서도 처음 듣는 정보라서 신기했다. 아마 원작에서 로에나가 정령사로서의 자질을 발아하지 못하고 죽었기에 에비스 광산 일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정령의 가호를 받아 마석이 많이 채굴되었다, 정도로만 언급되었었으니까.

    나는 델루스 꽃을 배불리 먹고 돌아온 정령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델루스 성에는 델루스 꽃이 없기 때문에 멀리서 먹고 온다나.

    나와 계약했으니 더는 델루스 꽃을 먹지 않아도 되지만 입맛까지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에비스 광산 때처럼 아무 데나 델루스 꽃을 피우는 기행을 저지르지는 않으니 다행이었다.

    아직 내가 정령사인 걸 숨기는 상황인지라 하델루스 성에는 델루스 꽃이 없었다.

    내가 정령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너희가 여기저기서 델피나를 먹고 오면 그곳에 마석이 발견되는 거야?”

    ― 찌꺼기가 쌓이면 그렇겠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발견한 거네.”

    내가 히죽 웃자 정령들이 부르르, 떨며 도망쳤다.

    순진한 어린이인 줄 알았는데 속 시꺼먼 영혼이 있어서 속았다나.

    ― 에비스 광산은 우리가 오래 머문 곳이라 많은 양의 마석이 발견된 거야. 보통은 그렇게 바로바로 생기지 않아.

    ―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니. 이 욕심쟁이! 돈밖에 모르는 간악한 어린이 같으니라고.

    “그렇구나. 아쉽네.”

    나는 정령들의 힐난을 한 귀로 흘리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잠깐 행복한 꿈을 꾸었다가 사라진 기분이었지만,

    뭐, 딱히 그런 것을 바라고 한 계약이 아니었다. 그들과 계약하면 얻게 될 능력이 궁극적으로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정령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정원을 거닐 무렵이었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엘레나가 누군가의 에스코트를 받고 산책 중이었다.

    상대의 옷차림을 보니 황실에서 온 사람인 것 같았다. 게다가 머리카락 색이 무척 독특했다.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드는 머리카락 색이라 의아해하던 중 엘레나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불렀다.

    “로에나.”

    “어머님!”

    나는 언제 관찰했냐는 양 생글생글 웃으며 엘레나의 앞으로 다가가 배꼽 인사를 했다.

    요즘 이렇게 인사하면 엘레나의 입꼬리가 파도를 치는데 그게 참 재미있었다.

    “아, 대공자비로군요.”

    남자가 나를 보곤 예를 갖춰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구나. 나는 더글러스 에셀이라고 한다.”

    제법 정중한 인사라 얼결에 고개를 숙였던 나는 그의 성을 듣고 몸을 굳혔다.

    내가 익히 아는 성씨라서 그랬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엘레나가 그에 대해 부연 설명했다.

    “에셀 공작가의 수장이지. 이번 파견단의 대표로 오신 분이야.”

    “헉!”

    아, 악녀의 아버지가 여긴 어쩐 일로!

    나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악녀의 아빠에 한껏 당황하고 말았다.

    악녀, 캐서린 에셀.

    에셀 공작가의 외동딸로 로에나 못지않은 안하무인 끝판왕이었다.

    아마 로에나가 죽지 않았으면 서로 죽이 잘 맞았을지도 모를 악역 중의 악역!

    메이벨이 그녀 때문에 고생하던 걸 생각하면 절로 이가 으득으득 갈리는 터라, 에셀 공작의 등장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물론 그도 자식 농사를 잘못 지어서 고생했으니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악당의 가문과 이어져 봤자 좋을 게 없어 내 눈이 저절로 경계심을 띠었다.

    내가 엘레나의 품에 찰싹 붙어 가만히 있자 엘레나가 나를 앞으로 끌며 말했다.

    “로에나,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에셀 공작님.”

    내가 기계처럼 깍듯이 인사하고 도로 엘레나의 치마 뒤로 숨자 에셀 공작이 호탕한 웃음을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저 나이 때에 낯선 어른이 무서운 건 당연하지요.”

    “그러고 보니 캐서린은 잘 지내나?”

    “예. 요즘은 승마에 푹 빠져선 자꾸만 다치고 돌아와 큰일입니다.”

    “저런. 효과 좋은 연고를 상시 구비해 두어야겠군.”

    “역시 대공비께선 우리 캐시 마음을 이해해 주시는군요. 경험하신 게 있어서 그런가.”

    “그래도 내가 공작보단 낙마하는 일이 덜했던 것 같은데.”

    “부끄럽군요.”

    에셀 공작이 짐짓 고개를 숙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원래 알던 사이인가 보네.’

    어릴 적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보면 꽤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에셀 공작가는 황실파이니 어렸을 때부터 종종 황실을 출입했을 터였다.

    엘레나는 황족이니 고위 귀족의 자제와 교류가 많았을 테고.

    실제로 하델루스 대공도 어린 시절엔 수도에 머물렀다고 하니 어쩌면 셋이서 친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나저나 캐서린이 승마라니. 절대 안 어울리는데.’

    원작에선 몸으로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거로 기억하는 터라 다소 의아한 취미 활동이었다.

    마차가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말을 타다니 신기했다.

    뭐, 어릴 때는 좋아할 수도 있지. 다들 그럴 때이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던 찰나 에셀 공작이 말했다.

    “대공비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단다. 지난 축제 때 아주 대단한 일을 했다고.”

    “네?”

    “영특하구나. 우리 캐시가 대공자비의 반만이라도 닮아야 할 텐데. 노는 것만 좋아해서.”

    아무래도 엘레나가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에셀 공작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난번에는 며칠 만에 본성에 복귀한 대공 부부를 크게 환대했다던데. 엘레나가 어찌나 입이 닳도록 자랑했는지 모르겠구나.”

    예? 우리 어머님이요?

    내가 놀라 엘레나를 쳐다보니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입이 닳도록 자랑하지는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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