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내 물음에 한나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네. 안 탄다는 걸 간신히 태워 보냈어요. 슬쩍 보니 입이 귀에 걸렸던데요?”
“후후후. 잘했어.”
나는 계획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에 흐뭇해하며 마차를 도로 본성으로 이동시켰다.
이로써 코비슈타인과 한 약속은 지킴 셈이었다.
원래는 하델루스 대공이 본성에 돌아오면 요구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그에게 편지가 와서 겸사겸사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혹시라도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대공의 답신은 흔쾌했다. 오히려 다른 부분에 은근히 집착하는 것 같았다.
[마음대로 하거라. 그나저나 답장이 아주 빠르군. 꼭 내 편지를 기다린 것처럼 말이야.]
딱히요.
나는 하델루스 대공의 어이없는 자신감에 헛웃음을 삼켰더랬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 굳이 정정하기보다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쪽을 선택했다.
본성에 도착해 복도를 걷는데 한나가 말했다.
“알랑으로의 휴가라니 정말 부럽네요. 지금쯤이면 날도 많이 풀려서 산책하기도 딱이죠.”
그러곤 감상에 젖은 표정을 지으며 과거 일을 거론했다.
“델루스령에 오기 전엔 매해 한 번씩 가곤 했었잖아요. 기억나세요?”
“그랬지…….”
나는 추억을 되새기는 한나에게 가볍게 대꾸하며 덩달아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하다. 다이아나와 코비슈타인을 마주쳤을 때 떠올린 기억들은 로에나의 기억임이 분명한데, 어떤 연유로 그 기억이 내게 주입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특정 인물을 마주치면 떠오르게 되는 걸까?’
다이아나 때도 코비슈타인 때도, 대화를 나누거나 눈이 마주치자마자 번뜩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읽은 책 속과는 사뭇 다른 기이한 느낌.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들과 관련된 일화가 머릿속에 자리 잡곤 했다.
마치 내가 로에나에게 동화되어 가는 것처럼 당시 그녀가 느꼈던 감정도 어렴풋이 느껴지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단 두 번의 경험으로 기억의 도화선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건 어려웠다.
“도련님들은 잘 계시려나. 일라이저 도련님이 조금 과격하시긴 해도 아가씨를 참 예뻐하셨는데……. 카일 도련님은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아끼셨죠.”
“그랬나.”
“그럼요. 아마 아가씰 많이 보고 싶어 하고 계실 거예요.”
한나가 에이프릴의 쌍둥이를 떠올리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코비슈타인의 숙박 건으로 에이프릴 성에 전보를 보내면서도 걱정했다.
결혼하고 처음 하는 연락이라 더더욱 그랬다.
해서 한나에게 연락하고 싶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밝혔고, 간단한 근황과 함께 에일 호텔의 숙박권을 쓰고 싶다고 연락했다.
‘그리고 거의 하루 만에 답신이 왔지.’
에이프릴령과 델루스령은 꽤 먼 거리였다. 그런 거리를 하루 만에 답했다는 건 그만큼 돈을 퍼부었다는 뜻.
듣기론 마석을 이용한 특급 전보로 보내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치 기다렸던 연락이었다는 듯이 재빠른 반응이라 몹시 당황스러웠다.
하긴 금지옥엽 막내딸이 결혼 후 소식 한 번 전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로에나는 참으로 매정했다. 가족에게 연락 한 번 정도는 할 법도 한데 단절하듯 살다니.
이제라도 에이프릴 가문에 연락하며 지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언제고 한 번은 마주칠 사람들이니까.
에이프릴의 쌍둥이는 원작에서 메이벨의 조력자이자 아키드와 같은 서브 남주 중 하나였다.
《나를 품어 주세요》는 흥미진진한 판타지적 요소는 물론이고 여주를 둘러싼 남주들의 로맨스 배틀이 짜릿했던 소설이었다.
아마 고아인 메이벨이 하필 로에나와 나이도, 생일도 같아서 눈에 띄었었지?
내가 원작에서 메이벨과 에이프릴 쌍둥이가 만나던 것을 떠올리고 있을 무렵 한나가 물었다.
“로에나 님은 도련님들이 보고 싶진 않으세요?”
나는 한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글쎄, 딱히 좋아했던 캐릭터들은 아니라 감흥이 없었다.
원작에서 에이프릴 후작가와 하델루스 공작가는 사이가 나빴다.
어린 딸이 타지로 시집갔다가 전염병으로 요절했으니 반목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특히 에이프릴의 쌍둥이는 아키드만 보면 으르렁거리다 못해 싸우고 싶어 안달했다.
아키드는 아키드대로 로에나에게 데인 게 많으니 에이프릴 후작가의 무례를 쉬이 넘기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 만나기만 하면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그래도 여주에겐 제법 다정했으니까.’
나야 아키드빠라서 두 사람이 아니꼬웠지만 연재 내내 제법 팬층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남들에겐 개차반인데 메이벨의 말이면 끔뻑 죽는 모습이 입덕 포인트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눈엔 그저 비뚠 애정으로만 보였다. 그들은 틈만 나면 메이벨에게서 여동생의 모습을 보려고 했으니까.
결론은 내게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온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 고로 굳이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저쪽에서도 먼저 연락한 적 없는데 내가 굳이 연락을 이어야 할까?
나는 연락하고 지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떨쳐 냈다.
솔직히 하델루스 대공 부부에게 잘 보이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쌍둥이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글쎄. 뭐, 알아서 잘 살고 있겠지.”
* * *
하델루스 대공 부부가 돌아오는 날이 다가오자 본성은 주인을 맞이할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으로 돌아오지 못한 지가 수일이었다.
혹시라도 돌아왔을 때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있으면 큰일이기에 더더욱 만반의 준비를 하는 듯했다.
나는 사용인들이 평소보다도 열심히 청소하는 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들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고 안달이 난 것 같아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내 눈엔 깨끗해 보이는데.’
하지만 깔끔한 성격의 엘레나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터.
다들 열심히 제 할 일을 하니 나도 뭔가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회에 대공 부부의 호감도를 상승시킬 수 있지 않을까?
보통 주인 맞이는 형식적으로 진행된다고 들었다. 사용인들이 2열로 줄지어 서서 맞이하는, 뭐 그런 거.
하지만 그건 조금 딱딱하지 않은가. 오히려 긴장감만 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내 머릿속을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역시 환영엔 그거지.’
나는 뭔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배시시 웃었다.
* * *
주말 오후, 데미안과 엘레나가 탄 마차가 하델루스 본성 안으로 진입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호텔 생활이 불편했던 두 사람이라, 얼른 성에 들어가 씻은 후 안락한 침실에 눕고만 싶었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추었고, 익숙하게 나갈 채비를 했다.
그리고 마차의 문이 열렸을 때, 엘레나와 데미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님, 어머님! 무사 귀환을 경축드려요!”
로에나가 명랑한 음성으로 환대하자 주변에서 꽃가루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뿐이랴? 다들 손에 꽃가지를 들고 흔들고 있었다.
마치 결혼식의 버진 로드를 연상시키는 환대에 엘레나와 데미안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로에나의 손에 들린 피켓으로 시선이 가 닿았다.
형형색색의 크레파스로 칠한 것 같은 피켓은 한눈에도 화려했다. 대체 글자마다 색은 왜 저렇게 깔별로 조합했는지.
엘레나가 대수롭지 않게 피켓의 내용을 읽다 입을 헤벌렸다.
[우유 빛깔 엘레나!
어디 갔다 이제 와요.
여신이 사라졌다고 천사들이 찾고 있잖아요.]
‘이, 이게 무슨?’
엘레나가 경악하며 뒤로 주춤했다. 엘레나라면 그녀 자신이었다.
로에나는 저런 황당한 문구를 적은 피켓을 든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아키드가 쭈뼛쭈뼛 꽃다발을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다 기어들어 가는 음성을 보아하니 로에나가 시킨 모양이었다.
뒤에서 데미안이 폭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언뜻 “여신이래” 하며 키득거려서 엘레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벤트를 준비한 걸까.
심지어 너무 정성스러워서 당황스러웠다.
이걸 만들려고 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꼬물꼬물했을 걸 생각하면 가슴 언저리가 찌르르한 것 같기도 하고.
엘레나가 황당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그때였다.
로에나가 피켓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고, 이번에는 엘레나가 폭소했다. 피켓 뒤에 또 다른 내용이 숨어 있던 탓이다.
[출구 없는 데미안.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질 못해요.
이제 입구 좀 닫지 그래요?]
“풉.”
엘레나가 웃음을 터트리자 이번엔 반대로 하델루스 대공의 웃음이 뚝, 멎었다.
아키드가 뒤이어 데미안에게도 꽃다발을 내밀며 환대했다.
“어서 오세요.”
“…….”
데미안이 얼결에 꽃다발을 받자 돌연 사용인들이 박수를 쳤다.
“환영합니다! 주인님! 주인마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살다 살다 이런 환대는 처음이었다. 특히나 로에나와 아키드가 이런 걸 준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엘레나가 꽃다발 틈에 있는 아키드의 작은 쪽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돌아오셔서 기뻐요.]
로에나만큼의 파급력은 아니지만 환영하는 마음은 전해졌다. 이 정도면 아키드도 많이 노력한 것 같다.
엘레나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로에나와 아키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곤 두 사람을 가만히 끌어당기며 귓속말했다.
“고맙지만 다음엔 이러지 말렴.”
남들 보기 겁나는구나.
작게 중얼거리는 엘레나의 속삭임에 로에나가 방실방실 웃었다.
전혀 알아들은 얼굴이 아닌지라 엘레나는 도로 픽, 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