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31)화 (31/177)
  • #31.

    얼마 후, 나와 아키드는 하델루스 성으로 복귀했다.

    헨리가 대신해 황실 파견단을 맞이하기로 한 덕이었다.

    헨리는 정령에 진심인 만큼 열의가 대단했다. 그가 협조하자 에비스 광산에서 벌어진 현상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확실히 전문가를 대동하는 게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쉬웠고, 차츰 에비스 광산에 퍼졌던 괴소문도 잦아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집사 아실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먼 길 다녀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하델루스 성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시부모님은 주말에나 도착한다고 하니 그동안은 자유의 몸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내 침실 침대에 누워 빈둥거렸다.

    호텔 침대도 편하긴 했지만 하델루스 성에 있는 침대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얼마나 뒹굴뒹굴했을까. 나는 무언가 번뜩 떠올라 가방을 뒤적거렸다.

    내 소중한 노예 계약……이 아니라 근로 계약서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성으로 돌아오기 전 헨리와 체결한 계약이었다.

    [헨리 코너(이하 ‘을’이라 한다)는 하델루스 가문의 로에나 하델루스(이하 ‘갑’이라 한다)와 아래와 같은 계약을 체결한다.]

    다소 딱딱한 구절로 시작되는 계약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내가 헨리의 정령 연구에 전폭적인 지지를 해 주는 대신 그는 최선을 다해 정령을 연구한다는 것.

    델루스령에 있는 에비스 광산에서 정령의 흔적이 발견된 만큼 헨리에게도 나쁠 게 없는 채용이었다.

    엘레나에게 미리 연구 권한도 허락받은 후라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이로써 헨리의 오랜 방랑 생활이 막을 내리게 된 셈이다.

    ‘본래라면 방랑하다 메이벨을 만나야 하지만……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임자 아니겠어?’

    나는 의도적으로 원작을 뒤흔든 것이 다소 께름칙했지만 금세 떨쳐 냈다.

    내가 요절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최대한 아는 미래를 동원해 살길을 도모해야 했으니까.

    원작에서 헨리는 정령을 찾아다니다 오염된 땅을 수습하던 메이벨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원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부터 제국에 알 수 없는 오염이 진행되어 벌어진 동료 구하기 에피소드였다.

    어차피 대륙의 오염은 예견된 일이었다.

    소설에서는 정령사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땅들이 죽었고, 전염병이 창궐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델루스령이 큰 타격을 받는다. 이후 미처 손쓰지 못한 죽은 땅을 메이벨이 수습하면서 아키드도 만나게 되었고.

    ‘아마 영지의 절반이 오염되어 버렸지.’

    그 탓에 로에나는 전염병에 걸려 요절을 면치 못하게 된다.

    물론 이건 내가 읽은 《나를 품어 주세요》 속 이야기일 뿐.

    ‘내가 있는 한 델루스령이 죽은 땅이 되는 일은 없어.’

    나는 왼쪽 윗가슴에 새겨진 나비 문양을 옷 위로 만지작거렸다.

    계약과 동시에 생긴 흰 문양은 내가 정령사가 되었음을 알려 주는 표식이었다.

    그렇다. 나는 원작과 다르게 정령사로서 각성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가진 채로.

    정령술이라면 메이벨도 막지 못한 대혼란을 막을 수 있으리라.

    나는 가진 힘을 최대한 활용해 원작에 개입할 작정이었다.

    보너스 시한부 인생이 연장 가능해졌는데, 죽음만 기다리며 손 놓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오염의 시작은 아직 조금 후의 일. 본래라면 손쓸 틈 없이 오염이 진행되어 메이벨이 활약할 발판이 될 터.

    거기에서 델루스령을 뺀다고 해서 메이벨의 활약에 방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여주랑 남주는 알아서 사랑하라고 하라지.’

    제발 부탁이니 그들의 사랑놀이에서 내 아키드와 델루스령은 빼 주기를 바란다.

    나는 의지를 다지며 당장에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일단 미래에 있을 일은 뒤로하고 현재의 윤택한 덕질 라이프를 꾸려 보자!

    “한나, 코비슈타인을 좀 불러다 줘.”

    우선 내 심복부터 챙겨 볼까?

    * * *

    코비슈타인이 짐가방을 여러 차례 확인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하델루스 성에 입적하고 처음으로 휴가를 얻은 탓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조수가 비뚜름히 물었다.

    “저를 버리고 가시면서 행복하십니까?”

    “그래. 행복해. 내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즐거워하시니 섭섭합니다.”

    조수가 앓는 소리를 하며 투덜거리자 코비슈타인이 그를 쓰윽 쳐다보았다.

    눈 밑 그늘은 여전했으나 눈빛만큼은 총명했다. 휴가를 앞두고 한껏 인자해진 코비슈타인이 조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돌아올 때 기념품이라도 챙겨다 줄 테니 잘 지내고 있어.”

    “알랑으로 가신다고 했던가요?”

    “응. 마침 그쪽에 오랜 친구가 있어서 가 볼까 하거든.”

    코비슈타인이 짐가방을 들자 조수가 다른 가방을 들며 말했다.

    “알랑 지역은 숙박비가 무척 비쌀 텐데요. 게다가 지금은 성수기라 여관방 얻기도 힘들 거고요.”

    “아아, 그거라면 걱정을 덜었어.”

    코비슈타인이 방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조수가 그걸 빤히 쳐다보자 그는 며칠 전 일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대공자비가 휴가를 약속하고는 에비스 광산으로 훌쩍 떠났을 때, 코비슈타인은 휴가가 물 건너갔다고 여겼다.

    이례적인 폭설로 대공 부부의 발이 묶이고 대공자 부부까지 에비스 광산에 오래 머물게 되는 악조건이 연이은 탓이었다.

    바쁜 와중에 제 휴가 같은 건 로에나가 신경도 쓰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아버님께 네 휴가를 허락받았어.’

    로에나가 하델루스 성에 도착하자마자 코비슈타인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내가 아버님께 편지까지 써 가며 얻어 낸 귀한 휴가니까 마음껏 쉬다가 왔으면 해.’

    코비슈타인은 로에나의 등에서 날개를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릴 뻔했다.

    그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대천사임이 분명하다고 여겼으니까.

    “걱정을 덜다뇨? 갑자기 떠나게 돼서 기차표도 얻기 힘들었을 텐데요.”

    조수가 졸졸졸 따라오며 의문을 표하는 사이 그는 로비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보이는 깔끔한 마차. 딱 봐도 고급 대여 마차라 조수가 눈을 끔벅거렸다.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비싼 마차라도 대여하셨나 하고 생각할 찰나, 마차 옆에 대기하던 웬 시녀가 싹싹하게 말했다.

    “코비슈타인 님이시죠. 대공자비님께서 가시는 길 편안하시라 마차를 보내셨습니다.”

    “아니, 이러시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코비슈타인이 입술을 뻐끔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저는 말을 타고 가도 됩니다. 이미 알랑에 있는 에일 호텔까지 예약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과분합니다.”

    “그 먼 길을 어떻게 말을 타고 가나요. 사양하지 마시고 타고 가세요.”

    시녀가 손수 마차 문까지 열어 주며 재촉하자 코비슈타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짐을 마차 안으로 넣었다.

    그때 곁에 있던 조수가 넋이 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코, 코비슈타인 님,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무얼 말이냐.”

    “에, 에일 호텔이라면 오성급 호텔이잖아요. 게다가 알랑의 에일 호텔은 뷰가 좋아서 1년 전부터 예약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조수가 차마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어버버거리자 곁에 있던 시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에일 호텔은 에이프릴가 소속 호텔 중에서도 손꼽히는 숙박업소죠.”

    “아.”

    “하지만 가문의 직계에겐 매달 숙박권이 예비되어 있답니다. 그걸 드린 거니 다른 투숙객에게 피해를 끼치진 않았어요.”

    “허억!”

    조수가 너무 놀라 입을 틀어막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자비는 에이프릴가의 귀하디귀한 막내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예비된 방이라면 분명 돈이 있어도 묵을 수 없는 VVVIP 특실일 터.

    조수가 코비슈타인의 소매를 붙잡고 애원했다.

    “코비슈타인 님, 짐가방에 저 좀 넣고 가시면 안 됩니까?”

    “그걸 말이라고.”

    코비슈타인이 쌩하니 거절하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조수가 그를 부러움과 시기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코비슈타인이 시녀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비님의 하해와 같은 배려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마님께서 그간 고생한 것에 대한 답례이니 부담 갖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물론 돌아와서 시키실 일이 참 많다고 하셨어요.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시녀가 농담을 내뱉자 코비슈타인이 총명한 눈으로 대답했다.

    평소였다면 무시무시한 살인 예고라며 덜덜덜 떨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엇을 시키시든 달게 받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이 한 몸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원하시는 일을 꼭 이뤄 드리겠다고요.”

    “네. 그럴게요.”

    시녀가 키득거리며 마차 문을 툭툭, 두드려 출발 신호를 알렸다.

    코비슈타인을 실은 마차가 떠나자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나가 별장 밖에서 대기하던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마차의 커튼이 걷히는가 싶더니 붉은 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잘 보내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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