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28)화 (28/177)
  • #28.

    자고로 덕후에게는 굿즈가 곧 애정도의 지표나 마찬가지.

    나는 정령 덕후 헨리 코너의 마음을 사로잡을 비장의 카드를 마련한 채 히죽 웃었다.

    이름하여 정령 굿즈!

    내 앞엔 정령과 함께 조작한 화석이 놓여 있었다.

    “이거 말고 다른 건 없어? 이건 아무리 봐도 그냥 곰 발바닥같이 생겼는데.”

    나는 발자국이 찍힌 돌을 톡톡, 건드리며 정령들을 추궁했다. 정령들이 내 주변을 빙빙 돌며 말했다.

    ― 아냐. 거기에 반짝거리는 그 가루는 우리들의 흔적이라고. 곰이랑 비교하지 마!

    “그렇다면 반짝이를 좀 더 뿌려 봐. 그럴듯하게 보여야 한단 말이야.”

    내가 살던 세상은 가짜를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이 만드는 재주꾼이 있는 곳이었다.

    자고로 보기에 그럴듯해야 속이기도 쉬운 법.

    아무리 정령의 흔적이 맞다고 해도 티가 안 나면 헨리 코너가 믿을 리 없었다.

    내가 건달처럼 무리한 요구를 건네자 정령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 왜? 아예 우리한테 실체화해서 진흙에 몸을 박으라고 하지?

    “오? 가능해?”

    ― 너무해!

    ― 예쁜 입으로 험한 말 하지 마!

    ― 머리는 빨갛고 눈은 파라면서 어쩜 그래?

    정령들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대체 머리가 빨갛고 눈이 파란 게 왜 이유에 들어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령들의 취향이려니 했다.

    반은 장난으로 한 말에 진짜로 상처받은 반응이라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장난이야. 그나저나 지금쯤 헨리 코너에게도 소식이 들어갔겠지?”

    슈리와 비비안을 통해 일부러 소문을 내었으니 지금쯤이면 그도 알았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만날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지.

    계속 호텔 안에만 있으면 헨리가 내게 접근하기 어려울 터.

    나는 아키드가 에비스 광산의 관리자와 면담을 하러 간 사이, 답답함을 핑계로 시내로 나갈 예정이었다.

    이렇게 몇 차례 정기 일정을 만들어 외출하면 헨리도 때맞춰 나를 만나러 올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세 번째 외출을 감행했을 때, 미끼를 문 헨리가 나를 찾아왔다.

    “혹시 하델루스 대공자비님이십니까?”

    잡화점에서 물건을 구경하고 있는데 웬 사내가 내게 접근했다.

    남루한 행색이라 호위 기사가 그를 막아서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헨리가 말했다.

    “저, 저는 수상한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그저 대공자비님께 여쭐 것이 있어서…….”

    기사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헨리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기사들에게 손짓해 저지하며 그를 내 앞으로 데려오라 지시했다. 그러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내 앞에 섰다.

    “누구?”

    “아, 저는 코너 남작가의 헨리 코너라고 합니다. 수상한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대공자비님.”

    “수상하게 접근해 놓고 수상하지 않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믿지?”

    내 쌀쌀맞은 반응에 헨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선을 굴렸다.

    “뭐, 코너 남작가라면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뒤이어 내가 조금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자 헨리가 반색하며 가문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했다.

    제 신원이 확실함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듣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는 뭔가?”

    “그게…… 외람된 말씀이지만 최근에 발견했다던 정령의 화석을 제가 볼 수 있을까요?”

    “어머, 그게 벌써 그렇게 소문이 났나.”

    내가 능청맞게 대꾸하자 헨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실은 제가 정령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살펴보고 싶은데요.”

    “실례라면?”

    “아.”

    헨리는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에 내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다짜고짜 보여 달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당장 드릴 만한 것이…….”

    헨리가 지갑을 뒤적거리며 금화를 꺼내려 했다. 그리고 그 찰나에 내가 노리고 있는 물건이 보였다.

    “잠깐.”

    “예?”

    “지금 그쪽 허리춤에 있는 그 회중시계. 그걸 주면 화석을 보여 주겠네. 원하면 거래할 의향도 있고.”

    “저, 정말이십니까?”

    헨리가 반색하며 허리춤에서 회중시계를 풀어냈다. 그건 그가 만든 나침판이었다.

    정령의 힘이 깃든 땅에서는 따르릉, 하고 울리도록 만든 마도구로 황실에서 특허까지 받은 발명품이었다.

    소설에서는 정령의 가호가 깃들었음을 증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했고. 나는 정확히 회중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거. 마침 시계가 필요하던 차거든. 그쪽은 딱히 돈이 있어 보이지도 않으니 그거면 충분해.”

    선심 쓰듯 이야기하자 헨리가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아, 그런 거라면 제가 다른 시계를 드리겠습니다. 이건 보통 시계처럼 시간을 알리는 도구가 아닌지라.”

    이런 쓸데없이 선한 사람!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어린 대공자비에게 가짜 시계를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갑자기 도로 시계를 허리춤에 차려는 헨리의 손목을 붙들었다.

    “줬다 뺏는 게 어디 있나?”

    “예? 하지만 아직 드린 적이…….”

    “난 그게 마음에 들어. 안 그래도 원하는 디자인의 시계가 없어서 여러 번 허탕을 쳤다고.”

    내가 고집스럽게 이야기하자 헨리가 차분히 설명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건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쓰이는 시계가 아닙니다.”

    “그럼?”

    “정령의 가호가 깃든 땅을 판별해 주는 일종의 판별기이죠. 이렇게 이쪽 버튼을 누르면…….”

    따르르릉!

    헨리가 시계의 버튼을 누르자 갑자기 시계가 울렸다. 헨리가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 역시 갑자기 그가 시계의 버튼을 누를 줄은 몰랐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시계는 정령이 가까이 있음을 알려 주는 도구이자 정령의 흔적을 발견하는 탐지기였다.

    그런 시계가 갑자기 소리를 울리니 헨리가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헨리는 시계가 오작동했다고 여기며 혼잣말했다. 사실을 아는 나로서는 그저 웃음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어, 어라. 이게 왜 갑자기 울리지. 고장이 났나.”

    그거 고장 아니야.

    네 옆에 정령들이 날아다니고 있어.

    나는 헨리의 옆에서 시계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나비 무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정령들은 시계 주변을 배회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 이거 신기하다. 시계 안에 델루스 꽃가루가 들어 있어. 아니다, 꽃을 말려서 빻은 건가?

    ― 헤에, 맛있겠다! 가루로 만든 델루스 꽃은 무슨 맛일까?

    정령들이 순수할 거란 생각은 버려라. 오로지 식탐과 수다로 점철된 생명체들이니.

    정령들이 헨리 곁에 있는 이유가 그리 순수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모른 척하고.

    나는 버튼을 거듭 껐다 켰다 하며 어리둥절해하는 헨리에게 말했다.

    “그래서 내게 줄 텐가, 말 텐가.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코너가의 아드님.”

    “아, 알겠습니다. 드리겠습니다.”

    헨리가 버튼을 끄고 내게 시계를 건넸다. 아무리 말려도 달라고 떼를 쓰니 그냥 주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냉큼 주머니에 넣었다.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는 또 만들면 그만일 시계이지만 내게는 꽤 필요한 물건이었다.

    “좋아. 따라와.”

    시계를 품에 잘 갈무리한 내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헨리가 뒤따라왔다.

    마차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헨리는 초조한지 두 손을 연신 손수건에 훔치고 있었다.

    하긴 오랜 시간 찾아 헤맨 존재들의 흔적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오죽 긴장될까. 나는 헨리를 쳐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정령에 관해 관심이 많은가 봐. 그런 시계를 들고 다니는 걸 보니.”

    “아, 실은 그 시계는 제가 제작한 발명품입니다. 정령의 위치를 알리는 도구이죠.”

    “그렇다기엔 아무 때나 울리던데.”

    “아.”

    “그럼 이 시계 안에 있는 가루는 뭐지? 색이 특이하네.”

    정령들이 델루스 꽃을 말린 거라고 했음에도 모른 척하며 질문했다.

    내가 제 발명품에 관심을 보이자 헨리가 눈을 빛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그건 델루스 꽃을 말린 겁니다. 제가 발견한 기록에 정령이 꽃을 좋아한다고 되어 있었거든요. 생김새가 델루스 꽃과 비슷해 그 꽃을 활용해 시계를 만들었습니다.”

    신나서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델루스 꽃가루? 이게 델루스 꽃이란 말이야?”

    “예. 기록에 꽃이 무지갯빛으로 물들었다고 되어 있었거든요. 추위에도 강한 생명력을 보인다고도 했고요.”

    “이상하네. 자네 말이 맞다면 왜 알레르기 반응이 전혀 없을까. 시계를 만지자마자 올라와야 정상인데.”

    내가 흘리듯 중얼거린 말에 헨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레르기 반응이라뇨?”

    “실은 내가 델루스 꽃 알레르기가 있거든. 하필 대공령의 상징인 꽃이라 불편한 게 여간 많은 게 아니야.”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에 헨리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본의 아니게 나를 위험에 빠뜨린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그에게 죄책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내 곁에 붙여 둘 구실을 흘리기 위해 한 말이었다. 나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광산에 갑자기 델루스 꽃이 피었다가 도로 사라지는 기현상까지 나타나서 바깥 외출도 조심스럽다니까.”

    이 말을 들은 헨리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월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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