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27)화 (27/177)
  • #27.

    그 순간 엘레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데미안은 아차 싶었으나 이미 늦어 버렸다. 엘레나가 이에 반응하듯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왜요? 당신은 되고, 나는 안 되나요?”

    엘레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흥분한 무소처럼 다가왔다. 데미안이 주춤하며 해명했다.

    “안 되긴요. 편하게 만나도 됩니다.”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엘레나를 자극했다. 엘레나는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양 두 눈을 홉떴다.

    “뭐라고요?”

    “부인의 애정 문제에 제가 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원하시면 언제든 만나도 좋습니다. 다만 아…….”

    “시끄러워요.”

    엘레나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차갑게 말을 끊자 데미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엘레나의 일그러진 표정이 상처받은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양 엘레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데미안을 문밖으로 끌어냈다.

    데미안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의 표정에 이미 넋이 나간 탓이었다.

    “난 당신 같은 호색한이 아니야. 연애가 하고 싶으면 당신이나 실컷 해요. 난 관심 없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문이 쾅, 닫혔다. 철컥,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문을 잠근 것 같았다.

    그녀가 이곳에서 먼저 문을 잠근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문을 잠그지 않은 게 자신이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라는 걸 데미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했다. 문이 열려 있다 한들 그녀의 닫힌 마음 안까지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데미안은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하지 않고 그중 한 마리를 선택한 건 그 자신이었다.

    그래도 내심 저 문이 닫히지 않아서 안심했었다.

    시종이 전해 줘도 될 이야기를 직접 와서 전한 건 문이 열려 있나 확인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물론 엘레나는 그 마음을 전혀 모르고 그저 귀찮아하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데미안은 닫힌 문 앞에서 한동안 떠나질 못했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형편없는 거 같아서 자꾸만 표정이 구겨졌다.

    “병신 새끼.”

    뒤이어 스스로를 힐난하고 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문이 안쪽에서 먼저 열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에비스 광산 인근 호텔 안. 드디어 엘레나에게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답신이 도착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뜯어 속독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네가 말한 조건에 응할 생각도 있단다.

    내일 성으로 출발할 예정이니 늦어도 일주일이면 도착할 거다.

    그동안 네가 말한 그 증거를 가지고 성으로 돌아오렴.

    그렇다면 나도 네 말을 믿고 일을 진행해 보도록 할 테니.]

    이럴 줄 알았어.

    나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엘레나의 말에 골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실은 지난 편지에 엘레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이곳 에비스 광산이 곧 정령의 가호를 인정받게 될 테니, 그전에 광산을 매입하게 된다면 정보를 전해 준 대가로 이곳에서 나오는 수익의 10%를 달라고.

    어떻게 보면 되바라진 요구였으나 평소 로에나란 존재가 뭐 앞뒤 가리고 내숭 떠는 타입도 아니었으니, 그녀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을 터.

    나는 의외로 로에나로 사는 것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마치 로에나 본인이 된 것처럼.

    “일단 나랑 거래를 하기는 하겠다는 것 같은데.”

    엘레나가 내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내 설득이 제법 먹힌 것 같았다.

    하긴 소설에서 본 내용을 슬쩍 흘렸으니 엘레나가 믿지 않을 리는 없었다.

    나는 이미 소설을 통해 정령 덕후가 정령의 가호가 깃든 땅을 알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원래 인간사 모든 일은 선점한 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 법이다.

    물론 활자로만 익힌 것이라 앞으로가 문제였지만, 다행히 내게는 진짜 정령도 함께 있다.

    나는 내 주변을 둥둥 날아다니는 흰나비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실체화를 하지 않는 탓에 아무도 이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계약했던 당시의 대화를 회상했다.

    ― 사실 오염된 땅을 정화하는 건 정령사의 역량과 비례해. 고대엔 정령사 무리가 힘을 합쳐서 땅을 정화하곤 했지.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뭐든 할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더니…… 이건 사기 계약이야.’

    ― 사기라니! 나는 말 그대로 일반적인 사례를 말했을 뿐이야. 너랑은 달라.

    ― 그래. 너라면 훈련을 거치기만 해도 혼자서 충분히 가능해.

    계약하자마자 말을 바꾸는 건가, 생각했지만 다행히 정령들이 그렇게 약지는 않은 듯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정령사는 본래 땅의 정기를 받아 능력이 발현된다고 한다.

    하여 정령사의 수가 늘면 늘수록 능력이 분산되는데, 나는 현재 이 세계의 유일한 정령사란다.

    한마디로 내가 이 땅의 정기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는 말씀.

    ‘이거야말로 대박을 건진 기분이란 말이지.’

    로에나에게 이런 능력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하긴 델루스 꽃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각성할 타이밍을 놓치고 요절하게 된 것 같았다.

    나야 아키드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해 보려다가 얻어걸린 것이지만.

    ‘그럼 내가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네?’

    ― 그래. 그러니 네가 정령사라는 걸 다른 이들이 알게 해서는 안 돼.

    ‘어째서?’

    ― 그야 네가 위험해지니까.

    ‘위험해진다고?’

    ― 인간들은 무섭고 잔악해. 선한 얼굴로 제 잇속을 챙기는 것에 이골이 난 이들이 많아.

    ― 정령사가 없어진 이유를 알게 되면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아질 거야.

    ― 난 더는 내 계약자를 잃고 싶지 않아.

    정령들은 정확히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파르르 떨며 내가 정령사라는 걸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정령에 관한 기록이 얼마 남지 않은 것과 이들의 반응이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하도 성가시게 굴어서 일단 비밀로 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엘레나에게 가져갈 증거를 구하려면 정령 덕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루빨리 정령 덕후를 찾아 거래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설득할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성공한 덕후로 만들어 주는 것!

    원래 덕후는 계를 못 탄다고 하지만 나는 그를 성덕으로 만들어 줄 능력이 있었다.

    마침 내 곁에 정령도 있으니 실물을 영접하게 해 준다고 하면 설득이고 뭐고 저쪽에서 먼저 무릎걸음으로 달려와 제발 하게 해 달라고 사정할 텐데.

    하지만 그 방법은 정령들께서 극구 말리시니 나라고 별수 있는가?

    나야 소설을 통해 정령 덕후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정령들은 몰랐다.

    나도 딱히 지금 당장 내가 정령사라는 걸 밝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대륙의 오염이 시작되기 전이라 당장 정령사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과거에 위험한 일도 있었다고 하니 조심스러웠다.

    내 앞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언제 전염병에서 다른 사고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는 거니까.

    “뭐, 설득할 방법은 다양하니까.”

    다행이라면 내가 정령 덕후와 마찬가지로 아키드 덕후라는 점이었다.

    덕후는 덕후가 제일 잘 알았다.

    무얼 좋아하는지, 무엇에 반응하고 흥분하는지 아주 잘 안다는 말씀.

    그러니 정령사라는 걸 밝히지 않고도 그를 유인할 거리는 차고 넘쳤다.

    마침 곧 그가 이곳을 지나갈 터. 나는 정령 덕후를 위한 다른 미끼를 던져 그가 물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예상대로 그가 미끼를 물었다.

    * * *

    에비스 광산 인근 주점 안. 남루한 행색을 한 남자가 들어와 돈을 치르고 밥을 기다렸다.

    그의 이름은 헨리 코너. 코너 남작가의 장남으로, 정령에게 반해 방랑병이 들어 전국을 돌아다닌 지 10년이 넘었다.

    죽기 전에 정령 한 번 보고 죽는 게 그의 소원이지만 불행하게도 서른이 다 되도록 정령의 발가락조차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정령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가족들은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정령을 찾겠다고 나선 헨리를 못마땅해했다.

    그만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편지도 뚝 끊긴 지 오래. 세상을 떠돌며 다니긴 해도 재주가 많아 그럭저럭 먹고살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정령의 존재를 확신하며 갓 나온 스튜를 한 입 떠먹을 때였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떠들썩하게 나누는 대화가 헨리의 귀에 꽂혔다.

    “하델루스 대공자 부부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며. 광산도 폐쇄되었다던데, 괜찮은 거냐?”

    “내가 뭐, 윗분들 일을 알 턱이 있냐. 그냥 간만에 생긴 휴가를 즐기는 거지. 이야, 그래도 대공가 소속 광산이라 그런지 휴가비가 꽤 쏠쏠하더라.”

    “부럽다, 부러워. 나도 에비스 광산이나 지원할 것을.”

    광부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시샘하자 남은 하나가 코를 쓱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부럽기는. 대공자비가 광산에서 실종돼서 목이 날아갈 뻔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 돋아.”

    “그래도 찾았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그나저나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다던가?”

    “말도 마. 우리가 대공자비님을 오매불망 찾는 동안 그분은 유물이나 파고 있으셨단다.”

    “유물?”

    “처음엔 그냥 돌인 줄 알았는데 감정 결과가 꽤 좋았나 봐.”

    “대체 그 유물이 뭐였길래.”

    “몰라. 정령의 발자국이 찍힌 화석이라던가 뭐라나.”

    챙그랑!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헨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여파로 숟가락이 바닥에 떨어졌으나 헨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옆 테이블에 성큼성큼 다가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정령의 발자국이라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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