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정령들이 사라지고 얼마 후, 기사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광산 입구를 가득 메웠던 델루스 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이에 뒤늦게 입구 상황을 확인하고 온 다른 기사도 역시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진짜로 입구에 있던 델루스 꽃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정말 사라졌다고?”
아키드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델루스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고 보고받았는데 지금은 또 없어졌다니.
하지만 기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와 아키드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정말 델루스 꽃이 없었으니까.
나야 저것이 정령의 짓임을 알기에 태연했지만 아키드는 꽤 심각해졌다.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아키드가 나를 입구에 세워 두고 정찰을 시작했다. 탁 트인 곳이라 그가 움직이는 게 멀리서도 잘 보였다.
내 시선이 그를 졸졸 따라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는 저 정령들처럼.
정령들은 아키드가 재미있는지 자꾸만 우루루 따라갔다. 실체화를 푼 상태라 아키드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나비들이었다.
잠시 후, 아키드가 내게 돌아와 손을 내밀었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언제 또 델루스 꽃이 필지 모르니.”
아무래도 델루스 꽃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쪽이 더욱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네. 그래요.”
나는 시치미를 뗀 채 아키드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내 뒤로 정령들이 팔랑팔랑 날갯짓하며 따라오는 건 시선도 두지 않은 채로.
* * *
광산에서 기괴한 일이 벌어지자 아키드와 나는 잠시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웜홀을 허가해도 좋은지를 좀 더 지켜봐야 하는 탓이었다.
아키드가 내 신상의 안전을 위해 먼저 성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어차피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기에 더더욱.
아키드가 주변을 정찰하는 동안 숙소에 머물게 된 나는 엘레나의 편지를 읽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에비스 광산에 대해 발언한 부분을 곱씹고 있었다.
[에비스 광산이라, 그곳이라면 재작년부터 마석량이 현저히 줄어든 곳일 텐데.
안 그래도 다른 광산에 비해 수확량이 떨어져서 대공이 내게 팔까, 말까 고민하던 곳이란다.
마침 에비스 광산 근처에서 온천수가 나온다기에 나도 온천 사업을 해 볼까 했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이곳이 소설에서 본 엘레나의 잭팟 광산인 게 확실했다. 혹시 몰라 엘레나에게 편지를 보내 슬쩍 떠보았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수확량이 떨어져 온천 사업으로 전향하려 했다가 마석이 대량 발견되어 매출이 급등한 곳.
이후엔 정령의 가호를 받은 땅이라는 게 밝혀져 그야말로 대공이 배 아파 죽을 뻔한 노다지 땅이 바로 이곳이었다.
‘정령도 이미 활보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밝혀지겠구나.’
현재 웜홀까지 발견된 상황. 그게 정령의 서식지와 가까워서 생겨난 것이라는 건 아직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나조차도 델피나인지 뭔지 하는 에너지를 정령에게 듣고 나서야 알게 되었으니까.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들의 서식지 특성을 아는 이도 드물었다.
‘아니지. 그 사람은 알 수도 있겠다.’
나는 소설 속에 등장했던 인물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곳이 정령의 가호를 받은 땅이라는 게 밝혀진 건 그 사람이 정령의 흔적을 발견한 덕이었다.
일명 정령 덕후.
독자들 사이에서 그 사람은 이름보다도 정령 덕후로 더 많이 불렸다.
정령에 대해 얼마 없는 자료들을 모조리 섭렵해 누구보다 정령에 관한 지식이 해박한 탓이었다.
덕후들은 알지.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덕질을 해야만 하는지.
덕질도 에너지가 없으면 못 하는 일이었다. 엄청난 애정과 관심, 끈기와 집요함이 총동원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아마 그 사람이 조만간 이곳에 찾아와 정령의 흔적을 발견한 후 노다지 땅임을 인증해 포상을 받을 텐데.
나는 엘레나의 편지 내용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왕 가는 거 횡령 흔적이 있는지, 관리에 소홀한 부분은 없는지도 잘 살피고 오렴.
그 덕에 내가 대공에게 광산을 싸게 인수받으면 너에게도 아주 좋은 보상을 해 줄 테니.]
냄새가 난다. 돈이 몰려올 것 같은 냄새가.
엘레나는 성깔이 더럽고 까탈스럽지만 빈말을 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도움을 받으면 후하게 보상하는 게 엘레나였다.
마침 나도 엘레나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원작대로라면 엘레나가 로르크 남작을 처리하고 그 대가로 데미안에게 이 에비스 광산을 받았어야 했다.
한데 내가 끼어드는 바람에 에비스 광산이 여전히 데미안의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엘레나를 도와 에비스 광산을 인수하도록 하게 한다면?
엘레나는 엘레나대로 잭팟이 터지고, 나는 나대로 후한 보상을 받아 덕질 예산이 두둑해지지 않겠는가?
이건 시간 싸움이었다. 기이한 현상으로 광산 분위기가 어수선한 이때, 아직 정령 덕후가 이곳에 오지 않은 이때가 바로 승부수를 던질 순간이리라.
나는 결심을 굳히고 펜을 들었다.
“원래 주인한테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대공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내 덕질 예산을 늘리는 게 더욱 중요했다.
* * *
프로즌 산 인근 호텔 안. 엘레나는 로에나의 편지를 보며 느른히 미소 지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극존칭과 아키드의 찬양으로 시작하는 탓이었다.
언제 이렇게 사이가 좋아진 건지.
편지의 본론은 아키드를 향한 장황한 찬양 글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됐다.
[에비스 광산에 큰 웜홀이 발생했는데, 그곳에서 마석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어요.
아직 이 일을 아는 자는 관리자 몇몇과 저와 아키드 님이 유일해요.
광산 주변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하고 있어서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거든요.]
마석량이 줄었다 싶었는데 다른 곳에 몰려 있던 모양이다.
그 큰 웜홀이 뒤늦게 발견되었다는 말에 관리자의 횡령을 의심하던 찰나, 뒤이은 내용에 엘레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저는 이 일이 정령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령이라.
엘레나는 뜻밖의 존재에 깊어진 눈으로 다음 내용을 살폈다.
읽으면 읽을수록 엘레나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가시고 돈 냄새를 맡은 냉철한 사업가의 눈빛이 흘러나왔다.
로에나는 꽤 논리정연하게 제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설명하고 있었다.
정령에 관해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았다. 엘레나가 듣기에도 그럴듯한 가설이라 더더욱 구미가 당겼다.
실제로는 정령에게 직접 듣거나 소설에서 본 내용을 짜깁기한 것이었으나 엘레나가 그것까지 알 리는 없었다.
‘정령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한 번 사업에 성공해서 그런가, 어쩐지 로에나가 돈 버는 것에 재미를 들인 것 같았다. 게다가 제안하는 내용들도 제법 알차고 기특했다.
차기 대공비로서 괜찮은 마음가짐이라 엘레나는 그녀의 변화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돈을 쓸 줄만 아는 것보다 버는 것에도 열의를 가지는 편이 가문에 훨씬 도움이 되니까.
엘레나는 편지를 두어 차례 정독하고 나서 한참이나 생각했다. 무려 정령이었다.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땅에 축복을 내려 비옥하게 만든다는.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탐나는 땅인데.’
이걸 데미안에게서 어떻게 빼앗아야 하나.
엘레나가 데미안의 약점 잡을 구석을 요모조모 궁리하던 때였다. 데미안이 노크와 함께 호텔 방으로 찾아왔다.
“오늘은 또 어쩐 일이신지.”
엘레나는 편지를 접어 레티큘에 넣고는 다리를 꼰 채 고고하게 물었다. 데미안이 문가에 선 채로 대답했다.
“내일 즈음엔 성으로 출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는 길에 눈을 치우면서 가야 해서 좀 걸리겠지만 더는 미룰 수 없으니까요.”
“드디어 감금 생활에서 벗어나겠네요. 알겠어요. 준비하죠.”
이쯤 되면 찾아온 용건이 끝난 것 같은데, 웬일인지 데미안은 돌아가지 않고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편지가 왔다고 들었습니다.”
엘레나는 데미안이 편지를 거론하자 몸을 굳혔다.
설마 로에나가 괜찮은 정보를 주고 있다는 걸 눈치라도 챈 걸까?
편지가 뜯긴 흔적은 없었다. 제 사람을 통해 전달을 받았기에 발신인이 누구인지 데미안이 알 리도 없다.
하지만 대공이 맘먹고 염탐하려면 충분히 가능한지라 엘레나는 긴장한 손을 꼭 마주 잡았다.
평소엔 그녀가 누구랑 편지를 나누든 관여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웬 관심인지.
데미안은 엘레나가 부쩍 긴장한 것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설마설마하면서 왔는데 역시 남자인 걸까.
요 근래 엘레나가 자꾸만 본 적 없는 웃음을 흘리곤 했다.
그게 저를 향한 미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데미안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서운해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그녀를 위한 선택이었다 한들 까맣게 모르는 엘레나가 그를 이해해 줄 이유는 없었으니까.
이해를 바라고 시작한 독단이 아니기에 데미안은 여기서 말을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참지 못하고 궁금했던 말을 툭 꺼내었다. 그것도 아주 퉁명스럽게.
“꽤 자주 주고받는 것 같던데. 설마 애인이라도 생겼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