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24)화 (24/177)
  • #24.

    ― 얘 좀 봐,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지?

    ― 길을 잃었나 봐. 돌려보내 줄까?

    ― 신기하게 생겼어. 귀엽게 생겼는데 그냥 여기서 우리랑 같이 살자고 하면 안 돼?

    낯선 목소리가 귀를 어지럽히자 잃었던 의식이 서서히 되돌아왔다.

    이윽고 내가 눈을 번쩍 뜨자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이 주변이 고요해졌다.

    ‘여긴 어디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아키드와 함께 있었는데 눈떠 보니 낯선 곳이었다.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순간 코끝에 감도는 꽃향기에 움찔 떨었다. 익숙한 향기이자 내겐 공포의 향기였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손에 감긴 것이 델루스 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으아아악!”

    나는 너무 놀라 엉덩이 걸음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사방이 델루스 꽃이었다.

    나는 냉큼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막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처럼 또 오감이 마비될까 봐 겁에 질려 있는데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에 의아해하던 찰나.

    ― 저기 괜찮니? 갑자기 길을 잃어서 놀랐지?

    “헉! 누, 누구세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홉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거라곤 델루스 꽃 주변을 배회하는 흰 나비들뿐이었다.

    ― 헉! 얘 우리 목소리가 들리나 봐.

    ― 으앙, 눈 동그랗게 뜬 거 봐. 너무 귀여워. 머리는 붉은데 눈이 파래.

    ― 어쩌지? 우리 때문에 놀란 거 같아. 울어 버리면 안 되는데.

    ― 저기, 많이 놀랐어?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주변에서 온갖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마치 지난번 씨앗 농장에서 혼절하기 전에 귀에 와글와글 울리던 것처럼 뇌리에 파고드는 음성이었다.

    그 익숙한 감각에 불안해졌다가 눈앞에서 배회하는 흰나비 무리를 보고 혹시나 싶어 중얼거렸다.

    “설마, 나비가 말한 건가?”

    그러자 나비들이 팔랑거리며 화답했다.

    ― 아하! 네 눈에 우리는 나비로 보이는구나.

    ― 신기하다. 이전에 만난 인간은 우리가 곰으로 보인다고 했는데.

    ― 곰 무리보다 나비 무리가 더 나을지도 몰라. 그때 그 애는 우리를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잖아.

    ― 맞아. 그래서 결국 계약도 못 하고 돌려보냈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나비들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에 어안이 벙벙했다.

    혹시나 해서 떠본 말에 저들끼리 맞장구치는 모습이 괴이했다.

    아니, 그것보다 나비가 말을 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나비가 말을 한다고?”

    ―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나비가 아니야.

    ― 정령이지!

    “정령?”

    ― 그래. 인간들은 우리를 정령이라고 불러.

    ― 우리가 보이는 인간은 너무 오랜만이야. 보통은 목소리도 듣기 힘들거든.

    ― 그러니까 여기 오래 있다가 가. 홀랑 가지 말고. 우리랑 놀자.

    나비들이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아양을 부렸다.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정령들이 사방에서 수다스럽게 종알거려 정신이 다 사나웠다.

    내가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상황을 파악하려는데 나비가 손수건에 붙었다.

    ― 그런데 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디 아파? 예쁜 얼굴 좀 보여 줘. 너 좀 귀엽단 말이야.

    “델루스 꽃 알레르기 때문에 안 돼.”

    내가 나비를 슬그머니 쳐내며 델루스 꽃을 곁눈질하자 나비들이 소란스러워졌다.

    ― 무어? 델루스 꽃 알레르기라고? 그럴 리가!

    ― 이 꽃은 우리들의 양식인데, 우리가 보이는 너에게 해로울 리가 없잖아.

    ― 그래, 맞아! 우린 이 꽃에서 나오는 델피나를 먹고살아. 그래서 일부러 주변에 이 꽃을 잔뜩 피워 둔 건데.

    “델피나? 그게 뭐야?”

    ― 델피나는 자연 속에 있는 에너지원이야. 마법사들이 흔히 말하는 마나도 실은 델피나에서 파생된 힘이지.

    ― 그래. 델피나는 마나보다도 더욱 순도 높은 힘이야. 엄밀히 따지면 마나는 델피나의 찌꺼기고. 우리가 델피나를 먹고 남은 자리에 마석이 만들어지거든. 델피나가 가장 풍부한 델루스 꽃은 우리 주식이기도 해.

    ― 우리는 델피나로 오염된 땅을 정화시키고 마른 땅에 축복을 내릴 수 있어. 멋지지?!

    어서 자신들을 칭찬하라는 양 정령들이 부산스럽게 더듬이를 팔랑거렸다.

    나는 새롭게 안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델피나라는 용어도 낯선데, 그게 마석의 구성 요소라니.

    결국 이들 말에 의하면 델피나인지 뭔지가 델루스 꽃에서 나며, 델피나의 찌꺼기가 마석이 된다는 뜻.

    ‘그래서 웜홀에 마석이 잔뜩 있었구나. 얘들이 먹성이 좋아서.’

    그렇다면 없던 웜홀이 갑자기 생긴 것도 모두 정령의 탓일 터.

    어쩐지. 하델루스령에 유독 마석이 잘 발견된다 싶었는데 모두 델루스 꽃 덕분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나비들의 말을 막으며 대답했다.

    “어쨌든 지난번에 이 꽃 때문에 기절했었단 말이야. 오감이 마비돼서 거의 죽다 살아났는걸. 그러니 손수건은 건들지 마.”

    ― 아하! 이제 보니 괜히 우리가 보이게 된 게 아니었구나. 델피나에 반응하는 인간은 오랜만이야!

    ― 엄청 예민한 영혼인가 봐. 우리랑 계약하지 않고도 델피나의 영향권에 들어갔던 게 분명해.

    ― 하긴. 보통 인간들은 델피나를 느끼지 못하는데. 너 정말 대단하다!

    ― 아마 순도 높은 델피나가 그대로 몸에 흡수돼서 아팠던 걸 거야. 하지만 해로운 건 아니야. 그건 정말이야!

    저기, 얘들아. 제발 한 마리씩 차근차근 말을 걸어 줄래?

    대답할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겠어?

    나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목소리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도통 누가 입을 여는 건지 구분할 수 없어 제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의 말이 마냥 영양가 없는 내용도 아니었다.

    “그럼 내가 델피나인지 뭔지 하는 힘 때문에 아팠었다는 거지?”

    ― 응! 너 참 똑똑하구나!

    ― 똑똑해, 귀여워, 사랑스러워!

    가만…… 내가 아키드를 볼 때의 반응과 저들이 나를 대할 때의 반응이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왠지 섬뜩해 손사래를 쳐 정령들을 쫓아내며 말했다.

    “그럼 오히려 알레르기보다 더 위험한 거 아냐? 가까이만 있어도 영향을 받으면 또 아플 수도 있잖아.”

    보통 사람들은 구분도 못 하고, 인지도 못 하는 힘을 우후죽순으로 받아들이는 몸이라니.

    하필 내가 빙의자라서 그런가, 그것이 무척이나 꺼림칙하게 들렸다.

    ‘설마 내가 로에나의 몸에 빙의해서 이쪽 세계 인간과 다른 체질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걸까?’

    죽었던 몸에 빙의한 탓에 델피나라는 힘을 튕겨 내지 못하는 거라면?

    내가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파르르 떨자 나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 어머, 귀여워라. 겁먹은 것 좀 봐.

    “아픈 건 싫으니까.”

    ― 그래서, 너 지금 아프니?

    “으음.”

    그러고 보니 델루스 꽃밭 한복판에 있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이쯤 되면 반응이 와야 정상인데 아픈 곳이 없다니.

    아니, 오히려 기운이 충만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자 정령이 말했다.

    ― 걱정하지 마. 더는 아프지 않을 거야.

    “어떻게 장담해?”

    ― 이미 델피나의 영향권에 완벽히 각성한 몸은 더 이상 델피나를 거부하지 않거든.

    “각성이라고?”

    ― 그래. 우리도 모두 그 아픔을 느끼며 정령으로 태어나. 너는 인간인데 참 특이체질이구나.

    세상에, 그럼 이제 델루스 꽃을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거네?

    아무래도 그날 씨앗 농장에서 크게 아픈 후로 각성한 모양이었다.

    “근데 각성이 뭐야?”

    ― 델피나를 인지할 수 있는 인간은 우리랑 계약할 수 있어. 넌 아예 영향권까지 들어가 봤으니 계약은 더 쉽고.

    “계약이라고?”

    ― 탐나. 그냥 우리랑 계약하면 안 돼? 그럼 너도 정령술을 쓸 수 있어!

    이게 무슨 ‘야, 너도 할 수 있어!’와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나는 다짜고짜 계약하자는 정령들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였다. 정령들이 팔랑거리며 채근하기 시작했다.

    ― 그냥 우리랑 계약하면 안 돼?

    ― 이제 보니 네 몸에 델피나가 가득이야. 이렇게 풍부한 델피나는 나도 처음 봐. 왠지 너랑 계약하면 배부를 것 같아.

    뭔가 잡아먹겠다는 경고 같아서 섬뜩해졌다. 내가 바짝 경계하며 물었다.

    “너희랑 계약하면 뭐가 좋은데?”

    ― 우리랑 계약하면 우리 힘을 너도 쓸 수 있어. 그뿐이야? 네 안의 델피나를 이용해 오염된 땅을 정화할 수도 있다고.

    “잠시만. 오염된 땅을 정화할 수 있다고?”

    그 말은 내가 정령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작금의 시대는 정령사의 명맥이 뚝 끊겼지만 과거에는 정령사가 많았다고 했다.

    그들 덕에 오염된 땅을 정화하고 마른 땅에 생기를 불어넣어 건국 초기부터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령들이 보이지 않게 되고 정령사가 사라지면서 풍요의 시대가 끝났다.

    이제는 땅이 오염되면 신성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안 되면 아예 땅을 버려야 하기도 했다.

    지금은 땅이 오염되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내가 아는 원작에 의하면 곧 오염이 시작될 거다.

    그래야만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만나게 되니까.

    ‘그래, 맞아. 원작에서 메이벨과 제로니스가 만나게 된 계기도 땅이 오염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잖아.’

    갑작스럽게 창궐한 전염병과 오염된 땅으로 제국엔 비상이 걸린다. 해서 성녀인 메이벨이 제국 수도로 올라가며 소설은 시작된다.

    상경 중에 우연한 계기로 메이벨이 오염된 땅에 갇힌 남주인공 제로니스를 구해 내면서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던가.

    원작을 되짚던 나는 한 가지 맹점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쳤다.

    ‘잠깐만, 내가 정령사가 되면 내 미래도 달라질 수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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