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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22)화 (22/177)
  • #22.

    하루면 될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대공 부부는 프로즌 산 근처에서 발이 묶였다.

    폭설까지 내리기 시작해 도무지 마차가 움직일 상황이 아닌 탓이었다.

    이례적인 폭설이었다. 프로즌 산 인근에서 시작된 폭설은 곧이어 하델루스령 전체로 퍼져 나갔다.

    꽃축제 때까지만 해도 좋던 날씨가 변덕스럽게 추워지자 꼼짝없이 성안에서 지내고 있었다.

    눈이 많이 내려 길을 내는 데에도 다들 비상이 걸렸다. 갑자기 내린 눈이라 곧장 대처하기 어려웠다.

    졸지에 하델루스 성에 고립된 나는 집구석에서 놀기의 달인이 될 것만 같았다.

    “원래도 이때 눈이 이렇게 많이 왔었던가?”

    내가 소복이 쌓인 창밖의 풍경을 응시하며 묻자 한나가 수건을 개키며 말했다.

    “아뇨. 원래 이맘때면 건기가 시작해서 비도 잘 안 왔대요. 작년에도 건조했잖아요.”

    “그래서 다들 이례적이라고 하는구나.”

    하긴 이전 생에서도 뻑하면 한여름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무덥던 날씨가 잠시나마 서늘해지곤 했다.

    하여 변덕스러운 날씨에 익숙한 나와 달리 다들 이번 폭설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대공 부부가 성을 비우자 자연히 결정권이 후계자인 아키드에게 넘어왔다.

    전서구를 보내는 것으로는 소통의 한계가 있어 성에서 일어나는 긴급한 결정을 아키드에게 위임한 것이다.

    물론 가신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 해 주는 덕에 아직까지는 아키드의 결정권을 필요로 하는 일이 드물었다.

    대공 부부도 가능한 한 빨리 온다고 했으니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시간이 흐를 것 같았다. 그때 슈리가 말했다.

    “에이프릴 성에선 눈 보기가 어려웠는데 여기는 눈 내리는 게 일상이네요.”

    “그러게.”

    “정말 정령이 변덕이라도 부리나.”

    나는 정령이 한 짓이라고 중얼거리는 비비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런 말을 듣다 보면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내가 살던 곳과 달리 이곳은 정령과 마법이 공존하는 세상이니까.

    “이왕 변덕을 부릴 생각이면 축복이나 내려 줬으면 좋겠네.”

    그럼 돈이라도 왕창 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아키드가 문밖에서 말했다.

    “로에나, 들어가도 됩니까?”

    “네!”

    언제든 아키드한테는 모두 다 열려 있어요!

    나는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벌떡 일어나 손수 문을 열었다.

    그러다 아키드가 외출복을 차려입은 것을 보고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외출 사실을 알리려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어디 가세요?”

    “아, 동쪽 탄광에 일이 생겨서 확인하러 가야 한다네요.”

    “지금요?”

    “네. 다행히 탄광으로 가는 길은 눈을 다 치워서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그래도 눈길에 마차가 지나다니기 힘들 텐데.

    외출하기 전에 알려 줘서 고맙다고 하려는데 아키드가 말했다.

    “괜찮으면 같이 가실래요?”

    “저도요?”

    “네. 그동안 눈 때문에 외출도 못 하고 있었잖아요. 답답할 것 같아서.”

    “아.”

    어쩜, 아키드는 이렇게 생각이 깊을까?

    고작 열네 살임에도 이렇게 완성형 인성이라니.

    물론 원작에선 흑화해 흑막을 자처했지만 그건 원작이고, 아직은 흑막의 꿈나무 낌새도 없었다.

    사실 지루함에 슬슬 몸이 배기던 찰나라 그의 외출 제안이 반가웠다.

    “물론 싫으시면…….”

    “아뇨! 좋아요, 마침 너무 답답했거든요.”

    “다행입니다. 그럼 준비하고 로비로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키드가 돌아가자 뒤에 있던 한나와 슈리, 비비안이 부지런히 외출 채비를 돕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외출 준비를 마친 나는 그렇게 에비스 탄광으로 향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 * *

    한편 엘레나와 데미안은 때아닌 난관에 봉착했다.

    폭설과 화산 폭발로 갑자기 멈추게 된 터라 머물 만한 호텔 방이 한 개밖에 남지 않아서였다.

    스위트룸이라고 해도 거실과 침실이 모두 개방형이라 개인 공간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하필 다른 투숙객도 그대로 발이 묶인 터라 각방을 달라고 요청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형식적인 첫날밤 이후로 합방을 해 본 적이 없던 터라 첫날엔 엘레나도 다소 긴장한 채로 침실에 있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아예 호텔 방에는 들어오지도 않자 은근히 짜증이 났다.

    “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싫다는 건가.”

    애인에게는 살살 녹는 양반이 아내에게는 이토록 냉랭하다니.

    남들이 알면 흉볼 일이지만 엘레나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안 들어오면 본인만 손해지.’

    처음에나 화가 났지, 솔직히 이제는 혼자서 넓은 방을 차지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보나 마나 데미안은 임시 막사나 보좌관의 좁은 방을 차지하고 앉아서 민폐나 끼치고 있을 테지.

    그러니 오히려 걱정해야 할 건 난봉꾼 남편이 아니라 성을 지키고 있을 아들 내외였다.

    엘레나는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로에나와 아키드만 성에 남아 있는 것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작년이었다면 이렇게 눈에 밟히지도 않았을 텐데.

    최근 들어 로에나와 제법 대화를 해서 그런가, 유독 그 포슬포슬한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아른거렸다.

    ‘나 없다고 도로 말썽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던 와중에 로에나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머님, 아버님. 옥체 강녕하신가요? 저희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갑자기 발이 묶인 어머님과 아버님이 너무 걱정되어 소녀는 밤마다 기도를 올리고 있어요…….]

    엘레나는 편지를 읽다 말고 피식 웃었다.

    옥체 강녕이라니.

    로에나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한 극존칭이었다.

    “아부가 늘었다니까.”

    그래도 싫지는 않은지 엘레나의 입가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성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아키드 님이 잘 꾸리고 있어요.

    지난번에는 눈 때문에 마구간이 폭삭 무너졌는데 시종들과 함께 도망친 말을 모두 되찾아 왔어요.

    그것뿐인가요? 아버님이 맡기신 일도 척척 해내고 있어서 가신들의 칭찬이 자자해요.

    어쩜,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토록 듬직한지. 정말 대단하지요?

    틀림없이 신께서 아키드 님께 모든 능력치를 몰아준 게 분명해요.]

    “허어, 지 남편 자랑하려고 편지했나.”

    엘레나는 편지의 절반이 아키드의 미담이라 기가 찼다.

    언제는 싫다고 허구한 날 바락바락 소리만 지르더니 하루아침에 달라진 며느리가 영 적응이 안 되었다.

    그래도 사고를 치느니 사이가 좋은 게 오히려 더 나았다.

    아이답지 않아 조금 꺼림칙하기까지 했던 아키드도 로에나 앞에서는 그 나이대 소년처럼 행동하곤 했다.

    특히 아키드를 학대하던 교사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엘레나는 몹시 분개했었다.

    로에나가 그렇게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면 아마 저가 로르크 남작을 고자로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딴 놈은 자식 낳아 봤자 패기밖에 더하겠냐 싶은 마음으로다가.

    한참 로에나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때였다.

    벌컥―!

    한 번도 열리지 않던 문이 벌컥 열렸다. 엘레나는 심드렁하게 문가를 응시했다.

    “웬일이세요?”

    “제 방에 오는 것도 허락을 맡아야 합니까?”

    “한 번도 걸음 하지 않길래. 내 방인 줄 알았지.”

    엘레나가 콧방귀를 뀌자 데미안이 움찔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양 느른히 웃은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서 말입니다.”

    “무엇이 그리 억울했길래 노크도 없이 들어와요.”

    엘레나가 심드렁히 대꾸하자 데미안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적어도 한 번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바깥에서 지내기 힘들지는 않은지, 추운 곳에서 고생하지 말고 따뜻한 방으로 오라든지 같은.”

    솔직히 일부러 피한 건 대공 자신이 맞았다. 하지만 정말 엘레나가 그대로 발 쭉 뻗고 편하게 잘 줄은 몰랐다.

    남편이 냉골에서 자는데 걱정도 안 되는 건가. 아무리 비즈니스 부부라지만.

    데미안은 무심한 아내가 야속했으나 엘레나도 할 말이 많았다.

    “싫다고 제 발로 나간 사람을 찾아 주길 바라는 건 억지 아닌가요?”

    그녀라고 그를 찾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보좌관에게 물어보니 아주 잘 지낸다고 해서 관심을 끊었을 뿐.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데미안에게 구구절절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럴 사이도 아니고, 그런 걸 기대하지 않게 된 지 오래라서 그랬다.

    “매정하시군요.”

    “매정하다고요?”

    엘레나는 데미안의 말에 꾹 눌러 둔 감정의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대번에 따졌다.

    “따지고 보면 남들 보는 눈은 생각하지 않고 제 방에 오지 않는 당신이 더 배려 없는 게 아니신지요.”

    “…….”

    “아예 광고를 하지 그래요? 하델루스 대공 부부는 실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며, 심지어 부부로서의 의무조차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사이라고요.”

    “저는 그저 대공비께서 불편할 것 같아 나간 겁니다.”

    “불편?”

    엘레나가 피식 웃으며 데미안의 넥타이를 붙잡아 제 코앞으로 끌었다.

    당장이라도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데미안이 숨을 꾹 참았다. 그 모습을 본 엘레나가 이죽거렸다.

    “불편한 건 당신이겠지.”

    “…….”

    “그날 날 두고 나간 건 당신이잖아. 누가 알겠어요. 대공비가 첫날부터 소박맞았다는 걸.”

    그 누가 알겠는가. 눈앞의 난봉꾼이 아내 앞에서는 얼음이 되어 도망친다는 걸.

    “그러니 내 탓은 그만둬요, 데미안.”

    “…….”

    “아니면 지금이라도 증명해 보시든가요.”

    멀리 갈 것도 없잖아요?

    엘레나가 침대를 힐끗하며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데미안이 흠칫, 떨며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얼굴이 새빨개진 데미안이 횡설수설하며 방을 나가 버렸다. 엘레나가 냉소적으로 이죽거렸다.

    “이거 봐. 불편한 거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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