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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21)화 (21/177)
  • #21.

    ‘이 왈가닥이 웬일이지?’

    코비슈타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금덩이를 내미는 로에나를 떨떠름하게 보았다.

    본인 딴에는 자애로워 보이려 미소 짓는 것 같지만 그의 눈에는 낯설고 무섭기만 했다.

    히죽 웃는 입꼬리는 악동을 연상케 해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차라리 화를 내!’

    그녀를 몰랐다면 모를까, 갑자기 금덩이까지 쥐여 주니 덜컥 무섭기까지 했다.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을 시키려고 금까지 챙겨 주는 건지.

    혹여 범죄라도 저지르게 할까 봐 간이 콩알만 해지려 했다.

    솔직히 말해서 최근 그녀가 물에 빠져 크게 아픈 뒤로는 호출하지 않아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이대로 저를 잊어 주기를 바랐는데. 평온한 일상에 이제 막 익숙해지려는데 또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었다.

    코비슈타인은 또다시 로에나의 노예 생활을 시작하게 될 것 같아 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하지만 코비슈타인의 무서운 상상과 달리 로에나의 음성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꽃축제로 야근이 잦아 바빴다고 들었어. 힘들었지?”

    힘들었냐고? 아직 살 만하냐는 질문이 아니라?

    힘들다고 하면, 아직 잘만 걸어 다니면서 꾀병을 부린다며 일을 더 얹어 주던 그녀이지 않던가?

    한데 이런 부드러운 반응이라니!

    코비슈타인은 로에나의 격려가 적응이 안 돼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고 했어. 내가 씨앗 풍등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급하게 야근을 또 하게 된 거잖아.”

    “그야 그렇지만…….”

    사실 대공비가 갑자기 씨앗 풍등을 만들라고 하기는 했지만 업무량이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간의 업무 강도에 비하면 가려운 수준이니 더더욱 그랬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 정도 야근은 일상이라.”

    “세상에, 일상이라고?! 그럼 언제 쉬어?”

    “으음, 이곳에 온 뒤로 하루를 내리 쉬어 본 적이 없습니다. 업무가 연중무휴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럼 매일 별장에 있는 거야?”

    “예. 대공 전하께서 숙식까지 제공해 주셔서 불편함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딱히 나가 노는 걸 좋아하지도 않거든요.”

    코비슈타인은 안경을 추키며 더듬더듬 말했다.

    저가 왜 로에나에게 업무 환경을 보고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어 오니 일단 대답은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거쳐 온 숱한 직장들에 비하면 하델루스 성은 약과였다.

    단지 일이 많아서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돈은 많이 벌지만 쓸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작은 흠이었지만.

    코비슈타인은 이미 슬기로운 직장 노예 생활에 익숙해진 터라 자신이 극악의 업무 난이도를 소화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내내 잠잠하던 로에나가 돌연 테이블을 작은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아버님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악덕 사장이네?”

    “예?”

    갑자기 왜 저러지?

    코비슈타인은 화가 잔뜩 난 로에나를 얼떨떨하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코비슈타인, 자네 말은 결국 주 7일로 근무한다는 뜻이잖아. 맞지?”

    “2주마다 격주로 하루를 쉬기는 하지만 대체로 그렇습니다.”

    “말도 안 돼!”

    로에나는 아주 비정한 소리를 들은 양 울상을 지었다. 누가 보면 저가 매일 일한 줄 오해할 만큼 격한 반응이었다.

    그때 로에나가 조막만 한 손으로 코비슈타인의 손을 꼬옥 붙들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예?”

    “세상에, 손이 새하얀 것 봐. 얼마나 방 안에 처박혀 연구만 했으면 이래. 비타민D는 제대로 충전하고 있는 건가? 산책은 자주 해? 아무리 귀찮아도 산책은 해야 해.”

    그러곤 조곤조곤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반은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손이 하얀 것과 산책을 연관 짓는 게 몹시 의아하기만 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기는!”

    로에나의 불호령에 코비슈타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상하게 로에나가 제 편을 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으나 얼른 떨쳐 냈다.

    ‘그럴 리 없어. 내가 한두 번 속아?’

    자그마치 그 대공자비였다. 상대가 안 하던 짓을 하면 감동하기보다 의심부터 해야 하는 법이다.

    코비슈타인이 마음속으로 로에나의 악행을 떠올리며 의지를 굳히고 있던 것도 잠시.

    이어지는 로에나의 따뜻한 말에 그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건 한순간이었다.

    “내가 아버님께 네게 휴가를 달라고 요청해 볼게. 그동안 못 받은 휴가까지 모조리 긁어모아 줄 테니까 나만 믿어!”

    앞으로 그는 그녀를 악동이 아니라 천사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 * *

    나는 비장한 태도로 하델루스 대공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대공 부부가 외부 일정으로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니 미리 로비 계단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시위 중이었다.

    악덕 사장의 만행에 항거하는 의지를 보이기 위한 일종의 1인 시위였다.

    지나가던 하인들이 힐끗거리며 이쪽을 쳐다보았으나 일부러 무시했다.

    나는 몇 시간 전 코비의 감격에 찬 얼굴을 떠올렸다.

    ‘가, 감사합니다. 천, 아니 대공자비님!’

    다시 생각해도 코끝이 찡해지는 대사였다.

    코비슈타인은 휴가라는 말에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했다. 말로는 다 괜찮다더니 막상 휴가가 그립기는 했던 모양이다.

    처음 그를 찾아간 건 사적인 이유에서였지만 지금은 불쌍한 가신의 극한 상황을 처리해 줘야 할 의무감까지 들었다.

    ‘불쌍한 코비. 바보 같은 코비.’

    어쩐지 전생의 소시민 시절이 떠올라 코비의 입장에 과몰입하게 되었다.

    다른 점은 그때의 나는 을이었지만 지금은 갑의 위치에 있다는 것.

    ‘멋진 갑이 무엇인지 내가 아주 제대로 보여 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의지를 다질 때였다.

    “오시면 전해 드린다니까요. 찬 데 앉아 계시면 감기 걸려요.”

    한나가 담요를 단단히 덮어 주며 잔소리를 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담요 고마워. 나 신경 쓰지 말라니까 자꾸 뭘 가져오고 그래. 아예 계단에다가 살림을 차리겠어.”

    “앓고 일어나신 지 얼마 안 돼서 걱정되어 그렇죠.”

    “됐으니까 네 할 일을 해. 여기서 담요 한 겹을 더 둘렀다간 사람이 아니라 눈사람이래도 믿을 거야.”

    내가 몸에 돌돌 말린 담요들을 눈짓하자 한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작은 마님 고집을 누가 꺾겠어요.”

    “잘 가, 한나.”

    내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축객령을 내뱉자 한나가 못 미더운 표정으로 거듭 뒤를 돌아보더니 일을 하러 사라졌다.

    드디어 혼자가 된 나는 무릎을 세워 팔로 얼굴을 괴며 문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되었을까.

    “로에나?”

    반가운 음성이 들려 고개를 들어 보니 아키드가 막 검술 훈련을 마치고 성에 들어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딱 마주친 아키드가 두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나직이 물었다.

    “왜 추운 데서 있으십니까?”

    “아, 그게…….”

    내가 막 대공의 만행을 다다다 고자질하려던 찰나였다.

    “얼굴이 차요.”

    내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온 아키드가 내 뺨을 만지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나는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벌떡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아키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검술 훈련을 막 마치고 온 탓인지 연무복을 입고 있었다. 흰색 도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려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나와 계십니까. 이러다 감기에 걸리면 어쩌려고.”

    “…….”

    “혹시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네. 맞아요.”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아니, 실은 대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그를 기다린 게 아니지만 이 모습을 보니 기다린 보람이 느껴진 탓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합리화를 하려는데 아키드가 가볍게 타박했다.

    “제가 뭐라고 이렇게 기다리십니까.”

    “뭐긴요. 내 남편이죠.”

    내가 손으로 꽃받침까지 하며 배시시 웃자 아키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볼이 붉어지는 건 바깥 온도와 안 온도가 다르기 때문일까?

    우쭈쭈, 내 새끼의 심정으로 내가 막 담요 하나를 내어 주려는데 아키드가 담요를 단단히 묶으며 말했다.

    “다음에는 그냥 저를 부르세요. 이렇게 기약 없이 기다리지 말고.”

    “헤헤. 네.”

    어쩜 이리 상냥하신지.

    나는 아키드가 내 걱정을 해 주는 게 좋아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괜히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서 방실방실 웃고 있는데 집사가 다가왔다.

    “작은 마님, 대공 전하께서 오늘은 성에 못 들어오실 거라고 하십니다.”

    “아, 그래요?”

    나 이제 그런 거 상관없는데.

    이미 아키드의 영롱한 연무복 차림을 보고 난 터라 아까의 투쟁심이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코비의 휴가는 내일 담판을 짓지, 뭐.’

    코비슈타인이 들었다면 서운해했을 법한 생각을 하며 나는 배시시 웃었다.

    아키드가 내 앞에 있는데 다른 게 무엇이 중요할까?

    그때 아키드가 집사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그게…… 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문제라고?”

    아키드가 놀라 되물었고, 그의 얼굴에 넋이 빠져 있던 나도 덩달아 두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나와 아키드가 아실을 쳐다보자 그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마차로 이동하시던 중에 프로즌 산의 화산이 분출돼서요. 당장 지대가 불안정해서 오늘은 그쪽 호텔에서 머물고 오시겠다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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