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와아.”
엘레나와 면담을 마친 나는 내 개인 창고 앞에서 입을 틀어막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체 이게 다 얼마야?’
내 개인 창고에는 이번 풍등 이벤트에서 벌어들인 금괴 상자 세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아까 받은 것까지 하면 도합 네 개였다. 풍등 이벤트 때 씨앗이 없어서 못 팔았다더니 정말로 대흥행한 모양이다.
물론 엘레나의 말대로 창고는 널널한 편이었다.
그간 로에나 몫의 품위 유지비가 있기는 했지만 사치를 부리느라 열흘이 안 되어 탕진하기 일쑤였다니 당연했다.
그뿐이랴? 가불로 당겨 쓴 돈만 해도 엄청났다.
할부처럼 매달 일정량의 품위 유지비를 깎아 되갚는다 해도 도로 가불이 이어지니 창고가 텅텅 빌 수밖에.
‘하델루스 대공이 내가 보석을 샀다는 말에 혀를 찬 이유가 있었네.’
귀족가의 막내로 태어난 만큼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었다. 평생을 소시민으로 살았던 내게는 뜨악할 정도로.
다행히 이번 풍등 이벤트가 잘 되어 당겨 쓴 돈의 일정량을 갚을 수 있었다.
원래라면 이 금괴 상자도 없어야 했는데 첫 수확인 만큼 일부는 남겨 두었다고.
‘그런 걸 보면 하델루스 대공비도 꽤 너그러운 편이라니까.’
말썽만 부리는 며느리라 이때다, 싶어 몰수할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격려까지 하지 않았던가? 생각보다 대공가 시집살이가 고되지 않아서 조금 얼떨떨했다.
그리고 1년간 로에나가 쓴 경비 목록을 보고 뒷목을 잡을 뻔했다. 대체 사 놓고 안 쓴 물건이 몇 개인지 모르겠다.
허한 마음을 쇼핑으로 달래기라도 했던 걸까?
날 잡아서 이 물건들만 되팔아도 빚의 반은 더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평생 살 수 있을 때의 일. 어차피 곧 죽을 몸.
“후후후. 이 돈이면 호화로운 덕질 생활을 할 수 있겠어.”
나는 당장 이 돈을 어떻게 쓸까가 관심사였다. 남은 시간 알차게 덕질할 수 있게 돈까지 주어지니 금상첨화였다.
그리고 하델루스의 유구한 수수료 전통을 안 이상, 언제든지 돈을 벌 구석이 또 찾아올 것 같았다.
몸뚱이는 어린이라 해도 전생에 산전수전 다 겪은 서민이었으니까. 나는 금괴를 만지작거리다 히죽 웃었다.
‘역시 덕질엔 그거겠지?’
* * *
하델루스 별장의 한 사무실. 하델루스 가문의 수석 아티팩터인 코비슈타인은 출근과 함께 뜨끈한 홍차를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가로운 아침이었다. 그간 꽃축제를 준비하느라 연이은 밤샘 작업으로 홍차를 달일 시간도 없었으니까.
“코비슈타인 님.”
그때 조수가 코비슈타인의 단란한 티타임을 깨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본성에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코비슈타인은 본성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를 찾아올 만한 본성 사람이라곤 대공 부부뿐인데 오늘 두 사람은 대외 업무상 본성을 비운다고 들었다.
또한 필요한 일이 있었다면 그가 호출을 당했을 터.
“본성에서 말이냐? 대공 전하께서는 오늘 자리를 비우셨을 텐데.”
“아, 그게…….”
조수가 멋쩍게 뒷머리를 만지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대공자비님께서 만남을 요청하셨습니다.”
코비슈타인은 홍차를 마시다 말고 입을 쩍 벌렸다.
“대공자비님이라고?”
아니, 그 왈가닥이 나를 왜?
* * *
어젯밤, 나는 내가 가진 돈으로 어떻게 하면 알차고 행복한 덕질 라이프를 즐길 수 있을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보았다.
일단 최애랑 같은 집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덕후였지만 역시 무언가 아쉬웠다.
덕후의 욕심은 끝도 없는 법. 순간순간 보았던 아키드의 입덕 포인트를 영상으로 남겨 무한으로 돌려 보고 싶었다.
문제는 이곳에 카메라도, 컴퓨터도 없다는 것.
‘덕질엔 역시 저장이지. 이 얼굴을 나만 볼 순 없잖아. 모두가 알아야 해.’
아직 시중에 없다고 해서 그러한 것을 만들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이 세계는 카메라와 컴퓨터 대신 마법이 있는 세상이었다.
마법과 신성이 공존하는 곳에선 내가 있던 세계보다도 더 미래적인 물건을 뚝딱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뜬구름 잡는 허상은 아니었다. 이미 그 가능성을 지난 꽃축제에서 보았으니까.
나는 정자세로 내 맞은편에 앉은 코비슈타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것을 보니 만성적인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아마도 꽃축제 때 야근을 하느라 꽤 진을 뺀 모양이었다.
게다가 어쩐지 나를 보는 눈빛이 다소 불안해 보였다. 꼭 만나기 싫은 작자를 만난 것 같다고 할까.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직접 부르시지 않고.”
“아,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부, 탁이요?”
코비슈타인이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두 눈을 홉떴다.
설마 내 입에서 명령이 아닌 부탁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생경했다. 어른인 그가 나를 보고 바짝 겁을 먹다니.
내게 뭔가 해코지를 당한 적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큰일이네.’
앞으로 내 훌륭한 덕질 라이프를 위해선 코비슈타인의 역할이 무척 중요한데, 사이가 나쁘다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실은 그대가 씨앗 풍등을 제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찾아왔어.”
“헉!”
코비슈타인은 씨앗 풍등 이야기를 하자마자 파르르 떨더니 돌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에엥?”
나는 갑작스럽게 석고대죄를 시작하는 코비슈타인에 괴상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 지난번 다이아나를 만났을 때처럼 모르는 기억이 뇌리에 박히기 시작했다.
[로에나는 머리가 반쯤 탄 채 형형한 눈으로 코비슈타인을 노려보았다.
그가 만든 마도구로 머리를 펴다 머리가 새까맣게 탄 탓이었다.
평소 로에나는 특유의 곱슬머리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대공비의 찰랑거리는 생머리가 부러워 바쁜 코비슈타인을 닦달해 마도구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한데 그가 보낸 마도구가 그녀의 머리를 더욱 곱슬곱슬하게 만들어 버렸다.
로에나의 화가 머리끝까지 난 건 당연했다.
“대체 어떻게 책임질 거야? 머리가 다 탔잖아!”
로에나가 성질을 부리자 코비슈타인이 무릎이 꿇린 채 고개를 조아렸다.
무보수로 업무 외의 작업을 강요당한 것도 서러운데 이런 사고까지 겪게 되어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조수가 실수로 미완성본을 보낸 것 같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지금 조수 핑계를 대는 거야?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내가 귀찮게 구는 게 짜증이 나서 골려 주려 그랬다고!”
로에나의 성화에 코비슈타인이 펄쩍 뛰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대공자비님께 위해를 끼칠 수 있단 말입니까? 요 며칠 조수나 저나 밤샘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부탁하신 일이라…….”
코비슈타인이 은근 로에나를 탓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로에나는 그것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아하. 그래서 일부러 미완성본을 주셨다? 너도 내가 뒷방 대공자비라고 무시해?”
로에나가 성을 내자 사색이 된 코비슈타인이 손바닥을 비비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좀 더 주신다면 탄 머리를 복구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만들도록…….”
“내일까지 만들 수 있어?”
“예? 그, 그건 아무래도 무리…….”
“내일이 당장 무도회란 말이야! 지금 넌 내 탄 머리를 보고 모두가 비웃는 꼴을 보고 싶다는 거야?!”
“아, 아닙니다! 죄, 죄송합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코비슈타인이 부리나케 사무실로 내달렸다.
표정이 딱 ‘저 악동의 패악질을 받아 주느니 야근을 하는 게 백 번, 천 번 낫지’라고 하는 듯해 로에나의 심기가 더더욱 사나워졌다.
“흥! 다들 하나 같이 얼빠져선!”]
오, 젠장.
나는 머릿속을 채워 버린 기억에 이마를 짚었다. 전지적 소시민 시점으로 보니 악덕도 이런 악덕이 없었다.
이 불쌍한 직장인을 어찌할꼬.
상사 며느리 잘못 만나서 갖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어린애한테 머리까지 조아리다니.
내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고 당장에 품속의 사직서를 던져 버리고 싶은 상황이었다.
물론 이곳은 내 전생과 달리 신분제가 존재해 이런 악덕 기업 같은 상황이 일상인 듯했다.
해서 코비슈타인도 이 상황 자체가 문제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도 이런 관계는 정상이 아니지. 보아하니 하델루스 대공은 내가 이 사람 괴롭힌 거 모르는 거 같은데.’
나는 덕질을 하려다가 근무 환경이 개똥인 가문 상황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대로라면 코비슈타인에게 일을 맡기기는커녕 대공에게 찾아가 가신들 일 좀 줄여 줍쇼, 하고 요구해야 할 판이다.
솔직히 로에나에게 미완성의 마도구를 전달한 건 잘못이지만 그가 밤낮없이 일하던 걸 생각하면 실수를 안 하는 게 이상한 환경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원숭이라고 해도 피곤하면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다.
게다가 상사의 며느리가 무보수로 일만 시켰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 그만둔 게 용해. 잘해 줘야겠다.’
이미지는 조금 망한 상황이지만 아직 회복할 기회는 있었다.
나는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읍소하고 있는 코비슈타인을 달래기 위해 그의 어깨를 가만히 부여잡았다.
“이러지 마. 벌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예, 예?”
“나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얼른 일어나서 자리에 앉도록 해.”
“옙!”
코비슈타인이 ‘곤란하다’라는 말에 냉큼 일어나 자리에 앉아 정자세를 취했다.
무릎에 두 손을 얹은 모양새가 선임에게 불려 간 후임 군인의 모습 같았다.
한마디로 군기가 바짝 잡혀 있다는 뜻이다.
그게 또 짠해서 죽겠다. 나는 어쩐지 코비슈타인의 상황에 몰입하게 되어 결연한 얼굴로 주머니 속 금괴 한 덩이를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원래는 영상석을 만드는 조건으로 주려던 건데…….’
“이건…….”
나는 코비슈타인의 얼빠진 표정에 대고 로에나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부려먹기만 했지? 이건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야. 앞으로는 개인적으로 마도구 제작을 부탁할 때 꼭 보수를 줄게.”
그러니 부디 도망가지 말고 나와 함께해 줘. 앞으론 잘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