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9)화 (19/177)
  • #19.

    대공과 대공비는 예상보다 강적이었다. 초반에는 규칙을 몰라 버벅거리는가 싶더니 후반에는 금방 우리를 따라잡았다.

    아무래도 아이의 몸으로 공깃돌을 놀리려니 어른을 상대로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간발의 차로 대공 부부가 이겨 버렸다.

    나는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한숨을 폭 내쉬며 툴툴거렸다.

    “어린이를 상대로 그렇게 핏대를 세울 줄이야. 보셨죠? 이기고 엄청 약 올리시는 거.”

    나는 나를 세워 두고 으스대던 하델루스 대공의 면상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아이를 이겨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다니!

    아키드는 여전히 게임의 여운이 남았는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즐거웠어요. 저는 두 분이 그렇게 합이 맞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그러게요. 매번 싸우시기만 하더니 한 팀으로 붙여 두니 잉꼬부부가 따로 없던데요?”

    실제로 이기자마자 신나서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던 두 사람을 보았을 때의 기분이란.

    그뿐이랴? 대공이 저도 모르게 맞닿은 손에 깍지까지 끼며 붕붕 흔들었을 때 대공비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놔요.’

    ‘아, 이런. 저도 모르게.’

    대공비의 냉랭한 반응에 대공이 아차 하며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처음 만난 맞선 상대인 양 두 사람이 동시에 뒤로 물러나며 내외했다.

    ‘애인이랑 이런 식으로 노나 보죠? 경박하기 짝이 없게.’

    ‘그럴 리가요. 애인과는 더한 것도 합니다만.’

    ‘하! 기가 막혀서. 귀를 씻어 낼 수도 없고.’

    무엇에 서로 빈정이 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구 하나의 잘못인 것 같지는 않았다.

    둘 다 말이 곱지는 않았으니까. 이게 바로 오고 가는 악담 속에 싹트는 미운 정인 걸까.

    대공과 대공비는 언제 한 팀이었냐는 양 서로 으르렁거리며 흩어졌다.

    한마디로 가까워진 줄 알았던 사이가 게임이 끝남과 동시에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다는 말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두 분과 뭔갈 같이 해 본 건.”

    그때 아키드가 볼을 붉히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아키드가 이 정도 일에도 기뻐하는 것에 마음이 찌르르 아파 왔다.

    사실 13년 동안 아키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그저 우연한 계기로 하델루스 대공의 핏줄임을 인정받아 입적하게 되었다는 것밖에.

    ‘서브남인 아키드의 과거 이야기는 소설에서 그리 상세하게 다루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입적된 후에도 방치되다시피 지냈다. 대공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은 탓에 아키드가 눈치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더 많아질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나는 아키드를 위로하고 싶어 그의 손을 꼭 붙들며 약속했다.

    ‘그래. 아키드. 내가 꼭 널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13년의 상처가 없던 게 되지는 않더라도 노력한다면 조금이나마 희석될 수 있지 않을까.

    내 약속이 조금 뜻밖이었던 걸까. 아키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그 속에 비치는 내 얼굴마저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오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가운데 마차가 때마침 멈추었다.

    “도착했습니다!”

    “아, 다 왔나 봐요.”

    괜스레 민망해 손을 떼어 내며 발랄하게 외치자 아키드가 주먹을 쥐었다 펴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렇, 네요…….”

    그러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는가 싶더니 마차에서 먼저 내려 내게 손을 내밀었다.

    “조심해서 내려요.”

    “아, 고마워요.”

    나는 얼결에 그의 손을 잡고 내리며 어버버거렸다.

    방금까지 먼저 잡았던 손이건만 그가 먼저 내밀자 어쩐지 수줍어진 탓이었다.

    ‘어쩜 아키드는 매너까지 좋아.’

    작은 행동에도 크게 감동하는 건 아키드가 내 최애인 덕이리라.

    나는 살포시 손을 포개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탁 트인 하늘과 그 위에 둥둥 떠 있는 풍등을 보았을 때.

    “우와!”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장관이었으니까.

    아키드의 말대로 풍등을 띄우는 곳과 이곳은 제법 거리가 있었다. 해서 이곳까지 풍등이 넘어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탁 트인 언덕 위라 아래에 있는 델루스 꽃밭이 그대로 보였다.

    델루스 꽃밭은 꼭 무지개가 땅에 뜬 것처럼 신기했다. 미리 심어 둔 꽃은 추위에도 활짝 피어 있었다.

    무지갯빛 델루스 꽃밭이 빙 둘린 공터에는 숱한 사람들이 풍등을 띄우고 있었다.

    그 덕에 하늘엔 오색 빛깔 풍등이 두둥실 떠다녔고, 그 뒤로 해 질 녘의 노을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너무 예뻐요.”

    내가 넋 놓고 쳐다보자 아키드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무심결에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노을 옆에 있는 아키드의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왜 이 세상엔 카메라가 없을까? 마법도 있는데 영상석 같은 건 못 만드나?’

    이곳엔 추억을 저장하는 개념이 없는 것 같았다.

    마법이 발달했다 해도 아티팩트의 제작은 숙련된 기술과 높은 비용을 요구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굳이 돈 들여가며 영상석을 제작할 생각을 못 하는 거 같았다.

    그러느니 화가를 대동해 그리는 게 낫다고 여기는 거겠지.

    하지만 그건 ‘영상물’을 접해보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였다.

    ‘마침 가문에 유능한 아티팩터가 있는 거 같던데…….’

    내가 아키드를 빤히 쳐다보며 어떻게든 가문 소속 아티팩터를 달달 볶을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집요한 시선을 느꼈는지 아키드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췄다.

    청회색 눈동자가 노을 때문에 붉은빛을 띠었다. 그가 내 시선이 민망한지 뺨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도르륵 굴렸다.

    “왜 그러세요?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네. 잘생김이 묻어 있어요. 그것도 덕지덕지.

    나는 입으로 튀어나오려는 주접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곤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이번에는 아키드 쪽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탓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결국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왜요?”

    “저도. 아무것도.”

    그러자 아키드가 피식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놀리는 것 같았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그 후로도 우리는 한동안 그 언덕 위에서 풍경을 구경했다.

    * * *

    꽃축제가 성공리에 끝이 났다. 그렇게 다시 평화로운 델루스 생활을 하는가 싶던 차에 엘레나의 호출이 있었다.

    갑자기 웬 호출인가 싶은 마음으로 테라스로 향했다. 도착하니 테이블 위에 디저트와 우유가 놓여 있었다.

    그것도 델루스에서 귀하다는 딸기가 가득 든 딸기 쇼트케이크가!

    “와아.”

    내가 딸기를 정신 놓고 쳐다보자 엘레나가 앉기부터 하라고 턱짓했다.

    홀린 듯이 의자에 앉아 포크를 집으려는 찰나, 시녀가 웬 묵직한 상자를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예요?”

    식전부터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니 엘레나가 새침하게 쳐다보았다.

    “열어 보렴.”

    “케이크부터 먹고 보면 안 돼요?”

    “열어 보면 그 생각이 달라질 텐데.”

    엘레나가 거듭 성화를 부려 하는 수 없이 포크를 내려놓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엘레나의 예상을 뛰어넘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헉!”

    에구머니나, 이 영롱한 금빛은 뭐야?

    그것은 금괴였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양이 든 금괴 상자.

    보물섬에서 발견한 상자 못지않은 양인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침을 흘리고 볼 뻔하다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갑자기 웬 금괴예요?”

    설마 금괴를 자랑하려고 보여 주는 건 아닐 테고. 내가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금을 만지작거리자 엘레나가 말했다.

    “네 거란다.”

    “제 거요?”

    혹시 오늘 제 생일인가요? 아닐 텐데.

    뇌물이라고 하기엔 엘레나가 나에게 잘 보일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뇌물을 써야 하는 건 밉보인 나이지 않는가?

    그렇게 이 수상한 금괴와 엘레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때였다.

    엘레나가 부채를 펄럭이며 금을 준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 씨앗 풍등 아이디어를 낸 것에 대한 수수료란다. 앞으로도 풍등 이벤트가 열릴 때마다 네 몫을 떼어 줄 생각이고.”

    “네?”

    뭐요? 수수료요?

    나는 나도 몰랐던 수수료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자 엘레나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네가 대공자비로서 할 일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 몰랐겠구나.”

    “몰랐다뇨?”

    “원래 하델루스는 공에 관해서 철저하게 보상해 주거든. 누구든 아이디어나 사업안을 제시하면 하델루스에서 일정 비율의 개인 수수료를 제공한단다.”

    “그 말은 평생 수수료를 받게 된다는 건가요?”

    “그래. 풍등 이벤트가 열리는 한 매번 네 몫을 제공받을 거란다.”

    야호! 세상에 그런 좋은 제도가 있다고요?

    나는 갑자기 떼돈을 벌어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 했다.

    엘레나에게 잘 보이려 시작한 일인데 돈까지 들어오다니. 횡재가 따로 없었다.

    으흐흐, 이게 다 얼마야?

    내가 금괴를 만지작거리며 히죽거리자 우스꽝스러워 보였는지 엘레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보면 이만한 돈은 구경 못 해 본 줄 알겠구나.”

    죄송한데 전생에선 금괴도 구경 못 해 봤어요.

    내가 어색하게 웃자 엘레나가 말했다.

    “네 개인 창고에 금괴 상자가 몇 개 더 들어가 있을 텐데 그걸 보면 기절이라도 할 생각이니?”

    “제 개인 창고요?”

    그런 게 있었어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짓자 엘레나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그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래. 네가 사치 부리느라 텅텅 비었던 그 창고가 이제야 쓸모가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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