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8)화 (18/177)
  • #18.

    “아앗! 다 잡을 수 있었는데!”

    “이번 판은 저의 승리네요.”

    “영애! 지금 돌 건드렸어요!”

    곳곳에서 공깃돌 구르는 소리와 명랑한 웃음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맥스의 선동에 어영부영 눈치만 보던 이들이 이젠 너도나도 페트라 게임에 몰입하고 있었다.

    맥스는 이미 꽁지 빠지게 도망친 후라 더는 훼방꾼도 없었다.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였다.

    나 역시 분위기에 휩쓸려 왕년에 공깃돌 좀 잡아 본 솜씨를 마음껏 뽐내 점수를 착착 따고 있었다.

    아키드는 그런 내가 신기한지 작게 중얼거렸다.

    “많이 해 본 솜씨네요.”

    “아, 제가 원래 뭐든 습득을 빨리 하는 편이라.”

    나는 아차 싶어 어색하게 변명했다. 그만 나도 모르게 너무 열심히 한 탓이었다.

    일부러 돌을 떨어뜨려 차례를 넘기자 아키드가 말했다.

    “시녀들이 알려 준 겁니까?”

    “맞아요. 이 재미있는 걸 저들끼리만 하고 있더라고요.”

    내가 한나에게 눈을 흘기자 한나가 억울한 빛을 띠면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아키드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시녀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저는 아키드 님과도 허물없이 지내고 싶어요.”

    이를테면 합방이라든가.

    나는 음흉한 속내를 쏙 숨기며 배시시 웃었다.

    지금은 각자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어서 방에 돌아가면 아키드가 무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매일 아침을 아키드의 막 깬 얼굴을 보고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 모습만 볼 수 있다면 영양제가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아키드는 뜻밖의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올 줄은 몰랐단 듯이.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는 지금보다 더 많이 아키드 님과 가까워지고 싶거든요.”

    솔직히 지금은 부부라기엔 소꿉친구만도 못한 거리감이잖아요?

    사실 나는 아키드와 나의 각방 생활에 불만이 많았다.

    아니, 결혼한 지 1년이 넘은 부부인데 어쩜 한 번을 합방을 안 해?

    물론 어린 대공자와 대공자비를 배려한 처사겠지만 이건 몹시 곤란했다.

    “그렇군요…….”

    아키드가 고개를 푹 숙이고 뜻 모를 표정을 지었다. 언뜻 귓가가 붉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세상 귀여운 표정을 지으니 더 괴롭히고 싶은 가학심이 드는 건 절대 내가 이상한 게 아니리라.

    그렇게 한창 페트라 놀이에 푹 빠져 있을 때였다.

    곳곳에 대화의 물꼬가 퍼지니 자연히 축제 이벤트에 관한 화제가 자주 거론되었다.

    “이번에는 씨앗을 뿌리는 행사도 같이 진행한다는데 가 보셨어요?”

    “개막하자마자 다녀왔어요. 씨앗을 담은 풍등이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모습이 정말 예쁘더라고요.”

    “어머! 씨앗을 하늘에 띄운다고요?”

    “신기하죠? 저는 씨앗을 그렇게 재미있게 심을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마침 씨앗 풍등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자 나는 올라가려는 어깨를 가까스로 다잡았다.

    ‘어머님이 내 아이디어를 선택하셨구나.’

    반응이 시큰둥한 것 같아서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실현시킨 모양이었다.

    직접 가지는 못해도 어쩐지 뿌듯해서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듣기론 마석을 이용해 씨앗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했다죠? 개간된 땅에 씨앗이 쏙 들어가게 하는 풍등도 있대요.”

    “과연 델루스에 마석 광산이 많다더니 이벤트 규모가 남다르네요.”

    “그뿐이에요? 그런 마도구를 만들려면 인력도 얼마나 중요한데요. 하델루스에 있는 아티팩터가 꽤 유능한 모양이에요.”

    세상에, 그걸 아티팩트로 만들었다고?

    나는 내 아이디어를 야무지게 행사 상품으로 둔갑시킨 엘레나의 행동력에 새삼 감탄했다.

    사실 아이디어만 제공한 터라 실현시킨 건 순전히 엘레나와 가신들의 노력이었다.

    ‘풍향 조절이 어려우니 아예 하늘 위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마도구로 만든 거구나.’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그만한 아티팩트를 설계하고 만든 걸 보면 하델루스 성에 대단한 돈벌이 노예……가 아니라 충신이 있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은데? 직접 확인하고 싶다.’

    나는 기쁨 반, 아쉬움 반의 감정을 느끼며 과자를 우물거렸다.

    규모가 큰 행사이니만큼 마법으로 피운 델루스 꽃이 사방에 있으리라.

    나도 모르게 신나서 테이블 아래에서 발을 휘휘 흔들며 영애들의 수다를 엿들을 무렵이었다.

    아키드도 옆 테이블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게 귓속말했다.

    “로에나도 가고 싶어요?”

    아무래도 내가 설레하는 표정을 보고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데이트 신청은 고맙지만 사지로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남은 시간 동안 건강하게 아키드 얼굴 실컷 보다가 죽는 게 인생 목표니까.

    “아뇨. 분명 델루스 꽃이 천지에 널려 있을 텐데 가면 고생할 거예요.”

    “꼭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어요.”

    아키드는 내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안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다정히 말을 덧붙였다.

    “제가 델루스 꽃씨를 띄우는 곳을 멀찍이서 구경할 수 있는 곳을 알아요.”

    “아.”

    “그냥 멀리서 보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아키드는 혹여라도 내가 거절할까 싶어 조마조마한 눈빛을 보냈다.

    사이가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내 거절이 두려운 눈빛이었다.

    물론 그건 아키드가 나를 잘 몰라서 하는, 그야말로 괜한 걱정이었다.

    나는 그가 여기서 앞구르기 하며 방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수치심을 무릅쓰고 신나게 바닥을 구를 준비가 되어 있는데 말이다.

    “원치 않으시면…….”

    “아뇨, 좋아요!”

    나는 아키드가 번복할세라 냉큼 손을 붙들며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갈래요. 아키드 님이랑.”

    * * *

    “갑자기 보석을 잔뜩 사들였다 해서 비즈공예라도 하려나 했더니 파티장에서 괴상한 기념품을 들려 보냈다더구나.”

    오찬 자리에서 하델루스 대공이 나를 기이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디저트로 나온 레몬 셔벗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괴상한 기념품이 아니라 페트라라고 하는 게임이에요.”

    “페트라?”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인데 재미있어요.”

    “이상하구나. 평민들은 보석을 살 돈이 없을 텐데.”

    데미안은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평민으로 살아 본 적 없는 그가 어찌 알까. 나는 그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보통은 보석이 아니라 자른 나뭇조각이나 작은 돌을 모아서 놀죠.”

    “돌로도 놀이를 할 수 있다니. 대단하군.”

    데미안이 떨떠름하게 한마디 하자 엘레나가 거들었다.

    “반응이 좋더군요. 보석으로 만들어서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좋을 것 같고요.”

    “그렇습니까? 흐음, 네가 제법 센스 있는 선물을 만들었구나.”

    데미안은 엘레나의 말에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엘레나가 괜찮다고 하니까 그렇구나, 하는 것 같아서 느낌이 오묘했다.

    “네가 남을 위한 선물에 그리 공을 들일 줄은 몰랐는데.”

    “저라고 뭐, 제 입에 들어가는 것만 신경 쓰는 줄 아세요?”

    “그럼 아니냐.”

    이보세요, 아버님. 아버님이 그렇게 반응하면 제가 뭐가 됩니까?

    나는 당연하게 뼈를 때리는 하델루스 대공을 흐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긴 로에나는 그간 사치 부리기만 할 줄 알았지 남한테 선물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보석을 샀다는 말에 대번에 사치를 떠올렸겠지.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아무 말이 없자 데미안이 말했다.

    “이왕 할 거면 더 크게 만들 것이지. 보석이 성에 없는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배포가 작구나.”

    아무래도 이 아버님, 내가 보석이 아까워 작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침 주머니에 넣어 둔 페트라를 꺼내 테이블에 뿌리고 줍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잘 보세요. 이 정도 크기가 저 같은 어린이에겐 잡기 쉽다고요.”

    누굴 수전노로 아나.

    이제 내 깊은 뜻을 알겠냐는 듯이 눈을 흘기자 데미안이 눈만 껌뻑이는가 싶더니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그런 한 줌도 안 되는 손으로는 보석 다섯 개를 다 쥐기도 어렵겠구나.”

    그러곤 흥미롭다는 듯이 페트라를 손안에서 굴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던 그가 엘레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엘레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전 안 해요.”

    “그렇습니까?”

    대공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곤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하는 거지?”

    “그건…….”

    신나게 규칙을 알려 주려 입을 열던 내 시선이 문득 옆에 있는 아키드를 향했다.

    아키드는 그저 나와 대공 부부의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나는 냉큼 아키드의 팔을 끌었다.

    “아키드 님이 알려 줄 거예요.”

    “저요?”

    아키드가 놀란 표정을 짓자 대공도 덩달아 입술을 달싹였다. 서먹서먹한 부자답게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래. 이 부자는 너무 대화가 없어.’

    나는 냉큼 아키드를 대공 쪽으로 끌며 배시시 웃었다.

    “이참에 저랑 아키드 님, 아버님과 어머님이 각각 팀이 돼서 내기하는 게 어떨까요?”

    “너희랑 우리가 말이냐?”

    대공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고 엘레나는 “나는 안 한다니까” 하고 발을 빼려 했다.

    ‘오호라.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하지만 나는 저 두 사람을 내기에 참여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아주 잘 알았다. 내가 얄미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라? 지금 두 분이 질까 봐 그러는 거예요?”

    “…….”

    “하긴 어린이한테 지는 것보다 승부를 피하는 게 낫죠. 호호호.”

    교묘하게 승부욕을 자극하는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대공이었다.

    “하지, 내기.”

    뒤이어 엘레나가 페트라를 손에 쥐며 말했다.

    “나중에 울지나 말렴.”

    “와아, 신난다!”

    내가 키득거리며 규칙을 설명하자 대공 부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의외로 끌어들이기 쉬운 타입들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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