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7)화 (17/177)
  • #17.

    과자 파티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했다.

    음악이 있다고 해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작으니 적막하게 느껴졌다.

    다이아나가 엉엉 울며 나가 버린 탓에 다들 어색하게 과자를 깨작거리기만 했다.

    하긴 나와 제일 친한 무리 중 하나가 눈물 바람으로 나갔으니 몸을 사리는 게 당연했다.

    ‘이래선 어머님한테 더 찍히겠는걸?’

    사교 모임은 안사람의 소관. 대공비와 대공자비가 합을 맞춰 손님들을 잘 접대해도 모자랄 판에 깽판을 치고 말았다.

    만약 이 소식이 엘레나 하델루스에게 들어간다면?

    ‘어쩐지 요즘 잠잠하다 싶더라니’ 하며 경멸의 눈빛을 보낼지도 몰랐다.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이 모임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해서 가방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 * *

    며칠 전.

    “그게 뭐야?”

    나는 한나와 비비안, 슈리가 까르르 웃으며 장난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뜻 보니 주사위 같았는데 일반 주사위가 6면체인 것과 달리 13면체였다.

    각 면에는 숫자가 쓰여 있었는데 옆에 있는 판을 보니 숫자마다 행동 수칙이 적혀 있었다.

    한나가 주사위를 손 위에서 굴리며 설명했다.

    “아,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주사위 게임이래요. 에이미가 알려줬어요.”

    에이미라면 마구간지기 딸의 이름이었다.

    “굴려서 나오는 숫자에 맞는 행동을 수행하는 놀이인데 제법 재미있어요.”

    “행동 수칙은 정하기 나름이라 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져요. 한번 보실래요?”

    슈리가 숫자판을 내밀며 설명을 보태었다. 나는 벌칙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앞구르기 세 번 하기, 엉덩이로 이름 쓰기, 노래 부르기, 멀리 뛴 사람한테 과자 주기, 화장실 청소 몰아주기 등등.

    뭔가 걸린 사람을 쑥스럽게 하거나 골탕 먹이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던 전생에서는 주사위를 굴려 술을 먹는 게임도 있었지.

    ‘여기라고 뭐, 다를 게 없구나.’

    전생과 달리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없지만 놀거리가 아예 없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재밌겠다.”

    내가 주사위에 관심을 갖자 슈리는 주머니에서 돌 다섯 개를 꺼냈다.

    “주사위 게임이 어려우면 이 돌을 가지고 노는 게임도 재미있어요.”

    “어? 이건…….”

    “‘페트라’라고 하는 놀이예요. 이렇게 돌을 바닥에 뿌려서 던지며 하나씩 잡는 놀이죠.”

    그래. 나도 안다. 이건 내 전생에서 ‘공기’라고 불리던 놀이였으니까.

    나는 공깃돌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귀족들의 놀이라고는 체스나 카드놀이가 전부였다.

    한마디로 머리를 잔뜩 굴리는 게임만 있지 이렇게 손으로 단순하게 하는 놀이는 없었다.

    ‘체스나 카드 게임은 어린이들이 흥미를 갖기는 조금 어렵지.’

    자고로 아이들은 뛰어놀며 크는 게 제일 좋았다. 고상하게 앉아서 머리 쓰는 게임은 커서 해도 늦지 않았다.

    ‘크기만 조금 줄이면 애들이랑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평민들의 놀이라 해도 재미있으면 장땡이다. 여기서 디자인을 좀 더 세련되게 손보면 분명 반응이 좋을 것 같았다.

    곧 있으면 꽃축제 때문에 영애와 영식들이 많이 모일 텐데 그때 가지고 놀면 되겠다.

    아예 겸사겸사 기념품으로 들려 보내면 반응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비비안, 이 페트라 혹시 여러 개 만들어 줄 수 있어? 조금 더 작게 만들어서.”

    “얼마나요?”

    “과자 파티에 오는 손님들에게 하나씩 선물할 수 있게 많이.”

    “네?”

    비비안은 대뜸 손님에게 선물하겠다는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그리고 내가 다음 말을 이었을 때―

    “이왕이면 보석으로 만들어 줘.”

    “네에?!”

    한나와 슈리마저도 큰 소리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 * *

    내가 공깃돌을 테이블 위에 와르르 쏟자 모두의 관심이 이쪽으로 쏠렸다.

    깔끔하게 세공된 색색의 보석들이 테이블 위에서 영롱한 빛을 띠었다.

    일부러 아이들의 환심을 사도록 다양한 색 조합으로 만든 터라 자연히 시선을 끌었다.

    “이번에 산 보석인가요?”

    때마침 앞에 있던 영애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건 페트라라고 하는 게임 도구예요. 오늘 오신 분들과 무얼 하면 재미있을까, 고민하다가 한번 제작해 봤어요.”

    “페트라요?”

    영애가 생소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옆에 있던 영식이 알은체했다.

    “페트라라면 평민들이나 하는 놀이가 아닙니까? 마구간 관리인이 돌을 주워 노는 걸 본 기억이 있군요.”

    영식은 한눈에도 달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평민들이나 하는 게임을 여기서 하려는 거냐는 뉘앙스가 가득했다.

    공깃돌에 관심을 갖던 이들은 영식의 발언에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개중엔 흥미가 떨어진 표정으로 옆 사람과 소곤거렸다.

    뭐야, 초장에 훼방꾼이 꼬이고 난리야.

    속으로 구시렁거린 나는 애써 웃음을 띠며 말했다.

    “맞아요. 평민들이 개발한 게임이에요. 주로 돌을 주워서 논다고 해요.”

    “그런 걸 왜 가지고 온 겁니까? 여기엔 체스판도 있고 카드도 있는데요.”

    “맞아요. 굳이 평민들의 놀이를 우리가 할 필요는 없지요.”

    영식이 주도하자 다른 이도 하나둘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예상하지 못한 바가 아니었기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누구 하나만 걸리면 반응은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 게다가 이건 그냥 놀이 차원에서 가져온 게 아니니까.

    “흐음, 역시 그런가요? 아쉽네요, 특별히 제작한 건데.”

    한 명만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일부러 잔뜩 주눅 든 표정을 짓자 맨 처음 말을 걸었던 영애가 말했다.

    “저는 해 볼래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러곤 공깃돌을 집어서 도륵도륵 굴리며 노는 게 아닌가?

    한눈에도 규칙을 모르는 티가 났다. 내가 막 규칙을 설명하려던 때였다.

    “저도 하겠습니다. 예전에 해 본 기억이 있어요.”

    아키드가 덩달아 하겠다고 나서 주었다.

    “앗! 그럼 설명하기 더 쉽겠네요.”

    세 명이면 시범 놀이를 하기에 적당한 인원이었다. 한 번 놀이를 시작하면 주변에서도 관심을 가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좋아요. 원래 네 명이서 두 명씩 팀을 먹고 하는 게 재미있지만 세 명이니까 개인전이 좋겠…….”

    그렇게 내가 막 페트라 규칙을 간단히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대공자비님께서 웬 해괴한 놀이를 즐기시나 했더니 대공자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양이군요.”

    맨 처음 평민 놀이라며 불만을 보였던 영식이 미간을 좁히며 아니꼬운 기색을 풍겼다.

    아까 통성명을 했을 때 도널드 백작가의 맥스라고 했던 것 같았다.

    맥도널드인지, 도널드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키드의 출신을 가지고 대놓고 무안을 주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이죠?”

    나는 대뜸 저격성 멘트를 날린 영식을 쏘아보았다.

    아키드가 13년간 평민처럼 살았다는 걸 알고 딴죽을 건 게 분명한 탓이었다.

    영식은 내가 날카롭게 반응하자 너스레를 떨며 시치미를 뗐다.

    “아, 저는 그저 귀한 보석을 그런 놀이에 쓰는 게 너무 아까워서 드린 말씀입니다.”

    이게 어디서 아닌 척이야?

    맥스는 내가 과민 반응한다는 듯이 여유롭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시선에서 나와 아키드를 얕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 지옥의 주둥아리는 청산하려고 했는데, 내 아키드를 건드리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을까?’

    자고로 날 건드리는 건 참아도 아키드를 건드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턱을 쳐든 채 맥스를 쏘아붙였다.

    “도널드 영식, 설마 지금 하델루스 가문이 이깟 보석도 아까워할 정도로 형편이 어렵다고 비꼬시는 건가요?”

    “예? 아, 아뇨!”

    맥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설마하니 내가 하델루스를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그가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저,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대공자님께서 페트라를 잘 아는 눈치라서…….”

    “그 말은 제 남편의 출신을 비꼬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내가 직접적으로 꼬집어 말하자 맥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귀족들이 주로 직접적인 표현보다 완곡한 표현을 선호하는 것과 전혀 다른 화법이라 당황한 것 같았다.

    역시나 로에나가 지옥의 주둥아리로 유명하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이 정도면 약한 수준인데 지레 겁을 먹는 걸 보니.

    “도널드 영식이 걱정해 주지 않아도 하델루스 성엔 이런 보석이 차고 넘쳐요. 그리고 내 남편은 그러한 보석보다 더 귀한 하델루스 대공가의 후계자이죠.”

    “죄, 죄, 죄송합니다. 절대 저는 그런 뜻이…….”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제가 괜한 말로 영식을 몰아세운다고 하실 게 아니라면.”

    내가 냉랭하게 반응하자 영식이 쩔쩔매며 사죄하기 시작했다.

    나는 또다시 냉각되는 분위기에 한숨을 폭 내쉬며 설명하듯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단순히 평민들이 노는 시시한 놀이를 하자고 이걸 가져온 게 아니에요. 한나, 그걸 가져와.”

    “네, 작은 마님.”

    곁에서 대기하던 한나가 공손하게 내 지시에 대답하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한나가 작은 상자가 가득 쌓인 이동식 트롤리를 끌고 들어왔다.

    상자에는 하델루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맥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기에 내가 상자 중 하나를 열었다.

    상자에는 보석으로 세공된 페트라 한 세트가 액세서리처럼 들어 있었다. 그것도 하델루스의 인장이 음각된.

    각각의 공깃돌에는 월계수 잎이 새하얀 눈송이를 양 날개처럼 감싼 문양이 음각되어 금으로 채워져 있었다.

    세공에 공을 들여서 한눈에도 고급져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나는 그것이 잘 보이도록 각도를 조절하며 상큼하게 웃었다.

    “보시다시피 오늘 오신 귀빈들께 제가 드리는 선물이었답니다.”

    “이, 이 보석을 이곳에 있는 전부에게 말입니까?”

    “당연하죠.”

    맥스가 말을 더듬자 나는 콧방귀를 뀌며 화답했다.

    “물론 평민들이나 하는 놀이라고 업신여긴 도널드 영식에겐 필요 없어 보이네요.”

    그 말에 맥스의 얼굴이 돌처럼 굳는 건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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