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홀에 돌아온 나는 불쑥 주변이 수런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듣기에 또 시작이라는 듯했다.
‘무슨 일이지?’
의아함을 느끼며 가던 중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하필 그 넘어진 사람이 다이아나 리케였다.
“로에나. 흐어엉.”
다이아나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리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앞에는 아키드가 있었다.
아키드는 나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키드와 다이아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넘어진 다이아나와 당황한 아키드라니. 설마…!
나는 안 봐도 비디오인 상황이라 곧장 아키드에게 달려갔다.
“아키드 님, 괜찮아요?!”
“예?”
“혹시 다이아나가 또 괴롭혔어요?”
“아뇨, 저는…….”
나는 또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하는 아키드를 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곤 곧장 바닥에 앉아 있는 다이아나를 쏘아보았다.
감히 내 새끼를 건드려?
나는 호랑이처럼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다이아나를 쏘아붙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로, 로에나!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오히려 대공자님께서 날 넘어뜨…….”
다이아나는 내가 아키드를 변호할 줄은 몰랐는지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이 없었다.
“내 남편이 널 갑자기 밀칠 리 없잖아.”
“뭐?”
“네가 뭔가 잘못을 했겠지. 아님 너 혼자 발에 걸려 넘어졌다든가.”
그래. 우리 착해 빠진 아키드가 설마 누군가를 밀쳐서 넘어뜨릴 리는 없었다. 분명 다이아나가 모함을 하는 것이리라.
내가 당연하게 아키드의 편을 들자 다이아나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았다. 충격에 빠진 얼굴이 제법 볼만했다.
“어, 어쩜 네가 나한테!”
다이아나가 파르르 떨자 곁에 있던 그들 무리가 비호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봤어. 대공자님께서 다이아나를 밀치는 거.”
“그래! 난 거짓말 안 했어! 네 남편이 나한테 얼마나 무섭게 군 줄 알아?”
다이아나가 버럭 성을 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나는 그들의 다그침에 슬쩍 아키드를 쳐다보았다.
그가 굳은 낯으로 무어라 변명하려고 입을 열려는데 내가 도로 다이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원작 속 로에나처럼 짝다리를 짚은 채 오만하게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뭐?”
“네가 넘어진 걸 왜 나한테 하소연하는데? 네가 뭐라고.”
“어떻게 내 편을 안 들어?”
“이상한 소리를 하네. 내가 왜 가족인 아키드를 두고 네 편을 들어 줘야 해? 우린 엄연히 남인데.”
“나, 남이라고? 우린 친구잖아.”
“정확히는 친구였지.”
“……!”
“근데 이젠 아냐. 너네랑 노는 거 질렸어. 그러니까 내 남편 괴롭히지 말고 꺼져.”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친절히 문 쪽을 손가락질했다.
로에나는 애초에 변덕이 심했다. 다이아나가 그 변덕을 잘 받아 주어 오래 알고 지냈을 뿐이다.
어차피 삐걱거리던 사이를 조금 앞당겨 절교하는 건 문제가 없으리라.
애초에 평판은 망할 대로 망한 상황이라 다이아나가 아무리 뒷담화를 해도 끄떡없었다.
다이아나는 모멸감이 가득한 얼굴로 버럭 소리 질렀다.
“그래, 절교해!”
응. 바라던 바야.
내가 상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아나가 파들파들 떠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 사라졌다.
뒤따라가는 무리를 향해 나는 작별의 손짓을 보냈다.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얘들아.’
그러곤 아키드에게 빙글 돌았다.
“정말 괜찮아요? 쟤들이 아키드 님 안 괴롭혔어요?”
어쩜 치사하게 여럿이서 한 사람을 괴롭히냐.
이럴 줄 알았으면 아키드 옆에 꼭 붙어 있는 건데!
나는 아키드가 곤란했을 것을 생각해 한껏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키드가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정말 리케 영애를 일부러 밀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의 눈빛에는 다소 혼란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 내가 편을 들어 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내가 그의 손을 붙들며 배시시 웃었다.
“정말 밀었어요?”
“아뇨. 안 밀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우리 아키드가 아무한테나 행패 부릴 사람은 아니지.
내가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자 아키드가 묘한 시선을 보냈다. 그가 붙잡힌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안 괜찮았는데, 이제 괜찮아졌어요. 로에나가 내 편 들어 줬으니까.”
그 말과 함께 손을 꼬옥 잡는 게 대형견이 따로 없었다.
나는 아키드의 완벽한 미모에 넋이 나갔다가 그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 지금 뭐라 하셨어요?”
“편들어 줘서 고맙다고요.”
“아뇨, 그 앞에 저를 무어라 부르셨잖아요.”
“로에나라고 한 것 말입니까?”
그래! 그거!
나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아키드에게 입술을 뻐끔거렸다.
“지, 지금 제 이름 부르신 거 맞죠?”
“네. 맞아요, 로에나.”
아키드가 싱긋 웃으며 내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기뻐 보이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뭐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로에나라고 부르는 거지?
부인이라는 호칭도 좋지만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어쩐지 짜릿했다. 뭔가 인정받은 기분이라고 할까.
이름은 남에게 불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들 했다. 아키드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온 것에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내가 감격에 아무 말도 못 하자 그가 상체를 기울여 시선을 맞추더니 눈을 슬쩍 내리깔며 물었다.
“혹시 기분 나쁜가요. 부르지 말까요?”
깨갱,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나는 냉큼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 아뇨! 불러 주세요! 부인도 좋고, 로에나도 좋아요.”
혹시라도 더는 부르지 않을까 봐 호들갑을 떨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네, 로에나.”
심장에 해로운 미소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 * *
한편 귀부인들은 하델루스가의 별장에서 체스 게임에 심취하고 있었다. 엘레나가 막 비숍으로 킹을 쓰러뜨리려던 찰나였다.
“으헝, 엄마아!”
다이아나 리케가 울먹거리며 리케 백작 부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리케 부인이 체스를 하다 말고 다이아나의 얼굴을 감싸며 물었다.
“다나! 얼굴이 왜 이러니? 누가 괴롭혔어?”
“흐어엉. 로에나가…… 대공자님께서…….”
다이아나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엘레나는 체크메이트를 앞두고 난입한 다이아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의 입에서 로에나와 아키드가 거론된 탓이었다. 리케 부인이 엘레나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다이아나의 입을 막았다.
“얘가 어른들 다 있는 데서…….”
“무슨 일 있었니?”
엘레나가 상냥한 미소를 띠며 다이아나를 채근했다. 다이아나가 그녀를 알아보고 딸꾹질을 했다.
“딸꾹!”
“이런, 많이 놀랐나 보구나. 메이, 아이에게 물을 가져다줘.”
“네, 마님.”
곁에서 엘레나를 보좌하던 시녀가 컵에 물을 따라 다이아나에게 내밀었다. 다이아나가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그래. 그래서 무슨 일이길래 대공자 부부 이야기를 했을까?”
“신경 쓰지 마세요, 대공비 전하. 아이들끼리 싸울 수도 있는 거고.”
리케 부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만류했으나 다이아나의 입이 열렸다.
“로에나가 저랑 노는 게 지겹다고, 꺼지라고. 흑.”
다이아나는 제게만 유리하게 이야기했다. 이를 알지 못하는 리케 부인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뭐?”
곱게 키운 딸에게 꺼지라고 한 것에 기분이 언짢아진 게 한눈에 보였다. 엘레나가 비숍을 쥔 채 가만히 중얼거렸다.
“난 또 뭐라고.”
그러곤 별일 아니라는 듯이 리케 부인의 킹을 비숍으로 톡 쓰러뜨렸다.
“체크메이트네요.”
곁에 있던 시녀의 말에 엘레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케 부인이 말했다.
“대공비 전하, 이대로 가시는 건가요?”
“방금 애들끼리 있다 보면 싸울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지만 교육을 위해서…….”
“애들 싸움에 어른까지 끼는 건 너무 구질구질한데.”
엘레나가 감흥 없는 표정을 짓자 리케 백작 부인이 좀 더 강경하게 말했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훈육해 두지 않으면 방만하게 자라기 쉽습니다. 아무리 애들 일이라지만 예의에 맞지 않는 언사를 한 건 따끔하게…….”
“리케 백작 부인.”
엘레나가 겉옷을 입다 말고 리케 백작 부인과 다이아나를 훑었다.
다이아나는 엘레나의 눈부신 백금발에 울던 것도 멈추고 입을 헤벌렸다.
황가의 피가 흐른다고 하더니 저 백금발은 꼭 태양같이 눈이 부셨다. 엘레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충고는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하는 거예요.”
“…….”
“방만하게 구는 건 오히려 리케 백작 부인 같은데.”
“대공비 전하.”
“이만 파하도록 해요. 체스 상대가 너무 시시해서 더는 못 있겠어.”
그 말을 끝으로 엘레나가 우아한 걸음으로 문가로 향했다.
그러길 잠시, 문 앞에서 멈춘 엘레나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뒤를 돌았다.
“아, 리케 백작 부인.”
“네. 대공비 전하.”
리케 부인이 굴욕감을 참고 대답하자 엘레나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새끼들은 내가 알아서 해요. 그러니 리케 백작 부인은 그쪽 새끼의 입단속을 먼저 시키는 게 어떨까?”
“뭐라고요?”
리케 부인이 못 참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엘레나는 이미 방을 나간 뒤였다.
“딸꾹!”
다이아나가 너무 놀라 멈췄던 딸꾹질을 다시 했다.
제 엄마의 눈빛이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 잡아 죽일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리케 부인의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그 불똥이 다이아나의 등짝으로 향했다.
“그놈의 딸꾹질, 그만 못 그치겠니!”
마치 모든 게 다 딸꾹질 탓이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