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5)화 (15/177)
  • #15.

    [아키드가 숨 막히는 파티장을 빠져나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와르르―!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아키드의 위로 얼음물이 쏟아졌다.

    “어머, 미안해요! 꽃에 물을 준다는 게. 그러게 왜 하필 거길 지나가선.”

    사과를 하는 건지, 약을 올리는 건지 모를 소리가 들렸다.

    아키드가 고개를 들자 그곳엔 로에나와 그녀의 친구인 다이아나 리케가 깔깔거리고 웃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말했다.

    “괜찮으세요, 대공자님? 에휴, 이를 어쩐담. 옷이 망가져서 도로 성으로 돌아가셔야겠어요.”

    “그래요, 대공자님. 그 꼴로 파티장에 들어왔다간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 대공 전하를 실망시키면 안 되잖아요?”

    로에나가 맞장구치며 키득거리자 아키드가 주먹을 불끈 쥐어 화를 삭이며 말했다.

    “그래야겠군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는 그 말과 함께 휙 뒤를 돌았다. 어차피 파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처럼.

    로에나는 그런 무미건조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양 입술을 짓씹으며 덩달아 뒤를 돌아 버렸다.]

    “헉!”

    나는 머릿속을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기억에 숨을 삼켰다.

    그 탓에 나도 모르게 아키드의 팔뚝을 세게 그러잡자 아키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부인?”

    이게 뭐야? 소설인가?

    아니면 로에나의 기억?

    나는 갑자기 생생하게 머릿속을 치고 들어온 기억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었다. 내가 로에나에 빙의한 이후론 아키드를 괴롭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오히려 아키드를 괴롭히는 악의 무리를 처단하면 처단했지, 내가 나서서 아키드를 곤란하게 한 적은 없었다.

    ‘그럼 이건 로에나의 기억인가?’

    나는 방금까지 생면부지였던 다이아나를 쳐다보았다.

    기억이 머릿속에 박힌 순간 나는 다이아나와 있던 일화들이 내 머릿속에 자연히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다이아나는 로에나의 친구였다. 하델루스령으로 와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자 로에나와 함께 신나게 아키드를 괴롭혔던 인물.

    갑자기 왜 과거 기억이 떠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달가운 인물은 아니었다.

    “로에나, 괜찮아?”

    다이아나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자연스럽게 나와 아키드를 떼어 내 제가 팔짱을 끼었다.

    아키드를 째려보는 걸 보니 내가 억지로 에스코트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키드가 반항도 없이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쩐지 그의 얼굴색이 좋지 못했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다이아나를 쳐내고 아키드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붙잡지 않으면 아까 그 기억대로 아키드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나가 버릴 것 같아서였다.

    “부인?”

    아키드는 갑자기 손이 붙잡히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청회색 눈동자가 얕게 떨렸다.

    “로에나?”

    다이아나 역시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네가 어떻게 그래? 하는 표정이라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보이게끔 했다.

    나는 머릿속의 기억 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로에나는 분명 아키드를 괴롭히면서 즐거워했다.

    하지만 아키드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물러나자 오히려 화가 났다.

    왜?

    기껏 괴롭혔더니 반응이 미미해 시시하다고 느낀 걸까?

    “너 왜 그래? 뭐 약점이라도 잡혔어?”

    그때 다이아나가 험악한 얼굴로 아키드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에 나는 번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다이아나를 쳐다보았다.

    “약점이라니?”

    “그야 네가 대공자님과 함께…….”

    “부부가 함께 오는 게 약점 잡힌 거야?”

    “어? 아니…….”

    다이아나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을 버벅거렸다.

    평소 알고 지냈던 로에나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라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나는 다이아나를 제쳐 두고 아키드에게 말했다. 도망갈까 봐 손을 꼭 잡은 채로.

    “어디 가려고요?”

    “예?”

    “오늘은 내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누가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래요?”

    아키드는 붙잡힌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다 이내 가볍게 대꾸했다.

    “어디 안 가요. 그냥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동안 물러날까 했어요.”

    그러며 내 손을 덩달아 꼭 잡아 주었다. 그 약한 압박감에 나는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나는 손에 깍지를 꼈다.

    “얘긴 다 나눴어요. 다이아나, 그만 가.”

    내 냉랭한 반응에 다이아나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다가 황급히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뒤따라가지 않았다.

    아키드를 괴롭혔던 친구랑 더는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생각난 기억의 태반이 다이아나가 로에나를 부추겨 아키드를 괴롭히도록 했다.

    특히 로에나가 아키드를 혐오하게 된 데에는 그녀의 공이 무척이나 컸다.

    ‘이래서 친구는 가려 가며 사귀라고 했지.’

    나는 로에나의 철없는 과거를 떨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제부터 잘하면 된다. 남은 7년 동안 아낌없이 사랑해 주면 아키드의 상처도 조금은 아물겠지.

    그때였다. 아키드가 내 손을 제게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괜찮습니까?”

    “네? 뭐가요?”

    “리케 영애를 저대로 보내도 괜찮으시냐는 말이었습니다.”

    아키드가 다이아나 쪽을 힐끔거렸다. 다이아나는 자기 무리들 사이에 끼어 훌쩍거리고 있었다.

    보나 마나 나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겠지.

    원래 어린애들 사이에선 친구가 전부였다.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무리수를 던지는 게 아이이니까. 아마도 아키드는 그것을 염려하는 것 같았다.

    로에나는 친구가 적었다. 일단 외지인이기도 하고 성격이 그리 유순한 편이 아니라 붙어 있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개중에 로에나에게 살갑게 굴던 게 다이아나 무리였다. 기존 무리에 로에나는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다.

    그 방법은 뒷담화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들을 향해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어차피 쟤들이랑 더는 친구 할 생각 없었어요.”

    이미 시동이 걸렸는지 부리부리한 눈으로 보는 몇몇 행동대장이 눈에 띄었다.

    그래 봤자 대공자비인 나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해 준다면 고마웠다. 아예 싹을 잘라 내 악랄하게 되갚아 줄 테니까.

    ‘흐흐흐. 내 새끼 괴롭히는 건 절대 못 참지.’

    내가 그런 각오로 상대의 노려봄에 응수하고 있을 때였다.

    “부인께선 정말 변하셨군요.”

    아키드가 나직이 속삭이는 게 귓가를 간질였다. 그게 마치 신호라도 된 양 몸에 힘이 탁 풀렸다.

    어쩜 목소리까지도 이리 좋은지.

    귓가가 간지러운 기분에 슬쩍 고개를 옮겨 그와 시선을 맞추다 깜짝 놀랐다.

    “……!”

    눈앞에 청회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거리가 가까웠다.

    하긴 귓속말을 하고 있었으니 가까운 건 당연했다.

    아키드는 내가 갑자기 고개를 돌릴 줄 몰랐는지 굳은 채로 쳐다보았다.

    그게 꼭 놀란 토끼 같아서 나는 콧구멍이 벌렁거리려는 걸 빈약한 의지를 총동원해 참아 냈다.

    “미, 미안합니다.”

    아키드가 뒤늦게 뒤로 물러났다. 귓불이 발그레해진 게 저도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귀, 귀여워!’

    나는 주먹 울음을 뱉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이후로는 다가오는 다른 이들로 인해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나와 아키드를 묘하게 쳐다보는 다이아나 무리의 시선은 쌩하니 무시한 채.

    * * *

    파티가 한창일 때, 로에나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아키드의 앞에 다이아나 무리가 찾아왔다.

    다이아나가 까탈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아키드를 몰아붙였다.

    “로에나에게 무슨 짓을 하신 거죠?”

    한눈에도 로에나가 자리를 비우기를 내내 기다린 눈치였다. 아키드는 다이아나를 무표정하게 쳐다보며 대꾸했다.

    “꼭 내가 부인께 무슨 짓을 한 사람처럼 이야기하는군.”

    “그야 로에나가 평소랑 너무 다르니까 당연히……!”

    다이아나가 평소처럼 다다다 쏘아 주려는 때였다. 아키드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당연히 내가 약점이라도 잡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 그건…….”

    다이아나가 화를 내려다 말고 제가 하려던 말을 해 버린 아키드를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아키드의 차가운 표정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평소 보아 왔던 유약한 대공자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꼭 그동안 초식동물 사이에서 송곳니를 숨기고 다녔던 맹수처럼 아키드의 눈빛엔 따스함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늘따라 그의 회색 눈동자의 푸른빛이 서슬 퍼런 날같이 느껴졌다.

    다이아나가 위압감에 뒷걸음질 치자 아키드가 한 걸음 다가왔다.

    아키드가 또래보다 키가 큰 탓에 다이아나는 그를 한참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키드가 서늘하게 말했다.

    “내가 리케 영애를 그간 두고 본 건 그대가 로에나의 친구이기 때문이었어.”

    “저, 전 여전히 로에나의 친구예요!”

    “부인께선 아니라고 하던데.”

    “뭐, 뭐라고요?”

    다이아나가 벌게진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아키드의 입가에 선명한 비웃음이 걸린 탓이었다.

    어쩐지 그게 섬뜩해서 다이아나는 손끝이 떨렸다.

    ‘뭐, 뭐야. 내가 알던 대공자가 맞아?’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이아나는 전처럼 쉽게 아키드를 몰아붙일 수 없었다.

    “그간 영애가 날 무시하며 은근히 우월감을 느끼고 있던 거, 누가 모를 줄 알았나?”

    “저, 저는 그런 적이 없……!”

    “그런 적 없다고.”

    아키드는 다이아나의 말을 뚝 끊으며 고압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 대공자인 나를 탓하려는 건가?”

    감히?

    다이아나는 아키드가 낮게 뇌까리는 음성에 파드득,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제 드레스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잡아 줄 수 있는 거리임에도 아키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콰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다이아나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잔뜩 겁에 질린 다이아나를 본 아키드가 피식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러곤 상체를 기울여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대의 무례함을 참는 건 이번뿐이야. 그러니 부인이 오기 전에 꺼…….”

    그때였다.

    “무슨 일이야?”

    등 뒤로 로에나의 음성이 구세주처럼 들려왔다.

    다이아나가 불쌍한 표정과 함께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뒤를 돌아보았다.

    “로에나. 흐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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