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네가 말이니?”
엘레나가 가소로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얘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가, 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하지 말라는 소리는 없었다. 어디 들어는 보겠다는 것 같았다.
나는 기획안을 상사에게 검토받는 기분으로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매년 씨앗을 사 가는 사람은 많지만 막상 뿌리는 사람은 적다고 들었어요.”
“그렇더구나. 다들 뿌리는 게 일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땅을 파서 심는 게 꽤 고된데 뿌린다고 다 자라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말인데 씨앗 뿌리는 걸 하나의 이벤트로 만드는 게 어떨까요?”
나는 엘레나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엘레나는 이벤트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도 씨앗 나눔 이벤트를 하고 있는 탓이었다.
“이미 충분한 자선 행사가 준비되어 있는데 여기서 무얼 더 추가하자는 거니?”
한눈에도 괜히 일 벌이지 말라는 거절의 뉘앙스가 풍겼다.
하지만 이대로 본전도 뽑지 못하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씨앗 나눔 이벤트는 나누는 것에서 끝나지 뿌리는 것까지 참여를 이끌지는 못하니까요.”
“하지만 유구하게 이어져 온 전통이란다. 그 전통 덕에 하델루스령 꽃축제가 유명한 거고.”
“정확히는 눈 속에 핀 꽃이 절경이라서 유명한 거잖아요.”
내가 따끔하게 지적하자 엘레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
실은 씨앗 나눔 행사는 그저 보여 주기식 행사였으니까.
자고로 축제에 모이는 이유는 인생 샷 만들기와 추억 쌓기였다.
가족과 커플, 친구들이 함께 추억을 쌓을 수 있을 만한 이벤트를 역이용하면 씨앗 심기 참여율을 높일 수 있으리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니?”
“꽃을 꼭 땅에 심으라는 법은 없어요. 하늘에도 심을 수 있어요.”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니? 땅에 심지 않고 나는 꽃이 어디 있다고?”
왜 없어요?
“종이와 펜 좀 가져다줘.”
“네, 작은 마님.”
곁에서 대기하던 비비안이 종종걸음으로 나갔다가 금세 종이와 펜을 들고 왔다.
나는 엘레나의 눈초리를 받으며 열심히 풍등을 그렸다. 꽃씨를 담은 풍등 말이다.
“이건?”
“풍등이에요.”
“그건 나도 안단다. 이걸 왜 그리는지가 묻고 싶은 거지. 갑자기 장기자랑을 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그니까 이렇게 풍등에 홀씨를 담아서 뿌리게 하는 거예요. 바람에 흩날리는 홀씨들이 무척 예쁠 거예요.”
홀씨 중 하나인 민들레는 노란 꽃잎이 지면 새하얀 홀씨가 꽃처럼 둥그런 형상이 된다.
그게 꼭 별이 모인 것 같아서 새하얀 민들레 밭에 가면 시선을 빼앗기기 쉬웠다.
그뿐이랴? 새하얀 홀씨가 바람에 두둥실 하늘을 떠다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는 모습도 무척 예뻤다.
어린 시절 새하얗게 꽃피운 민들레를 후후, 불어 본 경험은 누구나 있으리라.
“마침 델루스 꽃은 홀씨라고 들었어요. 미리 개간해 둔 땅에 홀씨를 담은 풍등을 띄우게 하면 씨앗도 뿌리고 추억도 쌓고, 일석이조 아닐까요? 물론 실현하려면 가신들과 논의를 해야겠지만…….”
“흐음.”
엘레나가 그제야 관심을 보였다. 나는 용기를 얻어 말을 덧붙였다.
“마침 델루스 꽃은 무지개색이니까 풍등 색도 다양하게 만드는 거죠. 하루 이벤트로는 괜찮지 않을까요?”
“뭐,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구나. 다소 날것이긴 하지만.”
엘레나가 피식 웃으며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네가 영지를 그 정도로 아끼는 줄은 몰랐구나. 특히 델루스 꽃을 뿌릴 생각을 하다니. 다 불태우라고 난리를 칠 줄 알았더니.”
‘제가 개망나니도 아니고…….’
라고 하기엔 로에나가 그간 벌인 패악질이 너무 많았다.
“크흠! 여하튼 공간을 지정해 두면 제가 거길 안 가면 되는 거니까 괜찮아요. 모두가 사랑하는 델루스 꽃을 저 때문에 금지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 나라고 지난번과 같이 아프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델루스 꽃이 하델루스령의 상징이니까 그것에 맞춰 작은 이벤트를 하면 어떨까, 했던 것이지.
그때 엘레나가 머뭇거리다 서문을 던졌다.
“안 그래도 그 꽃 알레르기 말이다.”
“네?”
“……흠, 아니다. 일단 네 의견은 잘 들었다. 가신들과 논의해 볼 테니 그렇게 알고 나가 보렴.”
엘레나가 하려던 말을 삼키며 축객령을 내렸다.
나는 내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졌나 해서 넌지시 되물었다.
“그럼 제 제안이 받아들여진 건가요?”
“아주 쓸모없진 않아.”
엘레나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부채를 펄럭였다.
뭐, 대충 좋다는 것 같아서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헤헤. 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어머님!”
“이젠 그 어머니 소리가 입에 붙었나 보구나. ……가 보렴.”
엘레나가 피곤한 기색을 띠며 손을 휘휘 저었다.
“넵!”
나는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하고 쪼르르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어쩐지 내 몫을 해낸 것 같아서 기분이 한결 좋았다.
어차피 내 아키드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선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공략해야 했다.
아키드가 원작에서처럼 아픈 과거를 안고 살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내가 아키드 생각을 해서 그런 걸까?
때마침 침실에서 나오는 아키드와 떡하니 마주쳤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아, 어머님께요.”
“어머님께는 왜……. 혹시 혼나셨습니까?”
아키드가 염려 섞인 음성으로 내뱉자 나는 얼른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그냥 이번 꽃축제 때 너무 놀기만 하는 거 같아서요. 도와드릴 게 있나, 하고 찾아갔어요.”
“그렇군요.”
“그러는 아키드 님은 어디 가세요?”
“아, 저는…….”
“아! 훈련 가시는구나. 하긴 시간이 딱 연무장 갈 시간이네.”
아키드의 일정은 다이어리뿐 아니라 내 머릿속에도 속속들이 꿰고 있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막을 모르는 아키드는 놀란 눈을 했다.
“부인께서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네? 그야 매번 이 시간에 연무장에…….”
가는 걸 창문으로 훔쳐봤으니까요.
라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뭔가 되게 스토커 같고 집착하는 거 같고 내가 아키드 덕질하고 있다는 걸 들켜 버릴 것 같아서였다.
아키드는 왜 말을 하다 마냐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냥 복장이 딱 검술 훈련 가는 복장이라서 찍어 봤어요.”
“……그렇습니까?”
“네! 그럼요. 제가 설마 막 아키드 님 가는 길을 졸졸졸 따라다니며 훔쳐보겠어요? 변태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 그쵸. 그건 너무 별로잖아요. 누구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하면 할수록 제 무덤을 파는 기분이었다. 내가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잔뜩 늘어놓자 아키드가 말했다.
“아뇨. 제 말은 부인께서 제게 그러신다 해도 변태라거나 별로라거나 감시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네?”
“하고 싶은 대로 하시란 뜻이에요. 그럼.”
아키드는 그 말을 끝으로 침실 중간 로비를 빠져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자 나는 그 자세 그대로 눈을 도르르 굴렸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 분명 기겁할 텐데.
나는 어쩐지 수줍어져 뺨을 만지작거렸다.
별 뜻 없이 한 이야기일 텐데 어쩜 내 심장을 이리도 부수는지.
아키드는 몰랐다. 내가 얼마나 그를 열렬히 좋아하는지.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이미 온갖 굿즈를 방 안에 전시하고, 매 아침과 밤을 아키드 영상과 함께 보내리라.
그뿐이랴? 팬카페에 가입해 모든 일정을 꿰고 우리 애 뭐 입는지, 뭐 먹는지, 뭘 좋아하는지까지 속속들이 알고 싶어 했으리라.
‘이참에 팬카페를 만들어?’
나는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하다 고개를 도리질했다.
지엄한 사교계에 그런 물의를 일으킬 수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이런 내 성향을 들키면 매장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사교계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훗날 내가 그런 일을 실현할 수 있게 되리라곤 이때만 해도 정말 상상도 못 했다.
* * *
축제에 맞춰 하델루스령을 찾아온 귀빈들을 위한 간단한 연회가 열렸다.
로에나에 빙의된 이후 바깥 모임에 일체 소극적이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모임에 참석했다.
기억이 없어 누가 아는 사이고, 모르는 사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탓이었다.
꽃축제는 하델루스령이 제일 따뜻할 때 열리는 축제인 만큼 영지 내 귀족은 물론 멀리서 온 귀족들이 많았다.
이미 영지 내에 있는 어린 영애, 영식들을 위한 모임도 있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나와 아키드 또래의 아이들이 하델루스령으로 많이 놀러 온 탓에 어린 영애, 영식을 위한 과자 파티가 따로 열렸다.
나는 아키드의 에스코트를 받아 파티가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아키드는 내가 에스코트해 달라고 할 줄은 몰랐는지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손이 조금 축축해지는 게 그 증거였다. 하긴 매번 따로 행동했던 만큼 함께 어딘가에 간다는 게 몹시 어색할 법도 했다.
홀에는 이미 갖가지 디저트가 놓여 있고 아이들이 신나게 먹고 떠들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일시에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그들은 내가 아키드와 나란히 오자 제법 놀란 눈치였다. 아마도 내가 아키드의 에스코트를 받고 와서인 것 같았다.
“로에나!”
그때 반갑게 미소 지으며 누군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도 모르는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