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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2)화 (12/177)
  • #12.

    나는 속으로 주접을 실컷 떤 후,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댔다. 그러곤 애써 다소곳이 대답했다.

    “괜찮아요. 처음엔 청후각이 다 마비돼서 엄청 놀랐는데 지금은 다행히 멀쩡하네요.”

    “…….”

    아키드는 내 대답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입술을 헤벌렸다.

    생각해 보니 괜찮다고 한 것치고 혼절할 당시 증상이 꽤 심각했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걱정했어요?”

    시선을 맞추려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묻는 말에 아키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히 질문했나 보다, 아키드가 내 걱정을 할 리 없는데.

    내가 막 그의 입을 막으려던 때였다. 그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예.”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키드가 내 걱정을 했단다.

    오늘이 며칠이지? 기념일 삼아야 하는데!

    “그랬구나.”

    나는 걱정했다는 말에 고개를 숙여 기뻐했다.

    고개를 들었다간 잔뜩 흥분한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흉한 모습에 놀란 아키드가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아픈 건 싫지만 그가 나를 걱정했다는 게 좋았다. 그것도 애정의 일부니까.

    ‘최애한테 병간호 받아 본 사람 있어? 응! 여기!’

    머릿속으로 자축하고 있는데 그가 돌연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시원한 걸 보니 아직 열이 떨어지지 않은 듯했다.

    “미열이 남았습니다.”

    “그러게요. 하긴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하루 만에 끝나는 것도 이상하죠.”

    내가 쌩쌩한 척하며 말을 받자 아키드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루가 아닙니다.”

    “네?”

    “열흘이었어요.”

    “!!”

    나는 열흘이라는 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키드는 괴로운 표정으로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걱정했냐고요? 걱정하지 않을 리 없잖습니까. 남편인데.”

    “…….”

    “열흘 동안 제가 어떤 마음으로 곁에 있었는지 부인은 모를 겁니다.”

    어떤 마음이었는데요?

    나 왜 그게 제일 궁금하죠?

    나는 콧구멍이 자유분방해지려는 걸 애써 참아 냈다. 당장에라도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분위기상 말을 걸 수 없었다.

    어쩐지 그가 몹시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아키드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인인 양 중얼거렸다.

    “부인이 너무 일어나지 않아서 혹시라도 잘못된 게 아닌가, 하고…….”

    “아키드 님.”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디에다가 사죄해야 하는지…….”

    “아키드 님!”

    나는 자꾸만 어두운 얼굴을 하는 그에게 빽, 소리치며 손을 붙들었다.

    아키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니, 비 맞은 강아지가 왜 여기 있죠?

    비에 젖어 덜덜 떠는 강아지처럼 아키드의 눈꼬리가 몹시 처연했다. 충동적으로 확 안아 주고 싶을 만큼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이성을 꾹 붙잡으며 말했다.

    “아키드 님, 저 잘못되지 않았어요.”

    “…….”

    “자, 보세요. 저 지금 눈앞에 있잖아요.”

    내가 그의 손을 내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하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는 조금 진정한 것 같았다.

    ‘혹시 내가 쓰러져서 대공님께 혼이라도 난 걸까?’

    하필 아키드와 외출했다가 쓰러질 건 또 뭐람.

    그냥 혼자 버티다 방에 돌아와서 쓰러졌어야 했는데!

    나는 괜히 아키드에게 피해를 준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왜 쓰러진 건지 궁금했다.

    “그런데 제가 왜 쓰러졌던 거예요?”

    내 질문에 아키드가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렸다.

    “이미 알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전혀요. 이유가 뭔데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더운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델루스 꽃 알레르기였습니다.”

    “네……?”

    이게 무슨 소리야?

    델루스 꽃은 하델루스령에 널리고 널린 꽃이 아닌가.

    심지어 하델루스 성 정원에는 델루스 꽃만 모여 있는 정원이 따로 있었다.

    아키드는 얼이 빠진 내게 담담히 설명했다. 어느새 표정이 굳어 있었다.

    “모른 척할 생각 하지 마십시오.”

    “…….”

    “작년에도 비슷한 일로 쓰러졌었잖습니까.”

    “아.”

    나는 작년이라는 말에 얕은 탄성을 내뱉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과거라 더욱 그랬다.

    ‘이건 정말 의외인데. 로에나는 대체 델루스에서 어떻게 버틴 거지?’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아키드는 델루스 꽃을 볼 때면 전 부인을 떠올리곤 했다.

    전 부인이 그 꽃을 무척이나 싫어해서 그들 내외가 머무는 성에는 한 송이도 피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알레르기 때문에 그렇게 극성을 부렸던 거구나.’

    예기치 못한 진실에 무어라 대답해야 하나 고심하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델루스 꽃을 선물했을 때 버리라 했던 겁니까?”

    “저는…….”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셨어야죠.”

    “…….”

    “하마터면 부인이 죽을 뻔했습니다. 대체 왜 숨기셨습니까?”

    아키드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화를 삼켰다.

    방금 일어난 환자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쩐지 안쓰러웠다.

    내게 화가 난 게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의 얼굴은 스스로에게 화난 얼굴이었다.

    ‘로에나는 왜 이 사실을 모두에게 숨긴 걸까.’

    심지어 데려온 시녀들에게도 숨기다니.

    사방이 델루스 꽃인 이곳에서 그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작년에 화원에서 도망친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나 보네.’

    하지만 로에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대공비에게 나쁘게 보일 법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그 일로 밉보였었고.

    ‘어린 마음에 자존심까지 세니 말하기 쉽지 않았겠지.’

    어린아이가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오지로 뚝 떨어졌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친정인 에이프릴 성에서 따라온 시녀들뿐이고, 모두가 대공자비라 칭하며 의무를 강요했다.

    근데 하필 하델루스령의 상징인 델루스 꽃 알레르기를 갖고 있다니.

    당연히 약점이 생겼다며 꼭꼭 감추려 했으리라.

    어려서 대응이 미숙했던 모양이다. 하필 그 결과가 관계를 악화시켜 버린 거고.

    ‘이를 어쩐담.’

    그때 아키드가 잡은 손을 꾹 쥔 채 중얼거렸다.

    “그런 건 숨긴다고 되는 게 아닌데도…….”

    “네?”

    뒷말이 잘 들리지 않아 되물으니 그가 시선을 맞춰 왔다. 잿빛 눈동자가 나를 올곧이 바라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내비치는 듯했다. 어쩐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빛에 자연히 입술이 벌어졌다.

    잠시 후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저 때문입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돌연 자책하는 아키드에 화들짝 놀라 반박했다. 하지만 아키드는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의 길고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상하게 눈동자가 젖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제가 좀 더 미더운 남편이었다면 부인께서 솔직하게 털어놨을까요?”

    “아키드 님…….”

    그의 울 것 같은 표정에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언젠가 그의 우는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당장 취소하고 싶어졌다.

    나는 그가 웃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를 슬프게 만든 게 나라는 사실이 속상했다.

    “죄송해요.”

    나도 모르게 울먹거리며 사과하자 아키드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눈빛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그로 인해 더욱 눈물이 나려고 했다.

    “노력하겠습니다. 부인이 저를 의지할 수 있도록.”

    “저도요. 앞으론 아키드 님에게 다 말할게요. 속이지 않을게요.”

    “네. 알겠습니다.”

    아키드가 희미하게 웃으며 내 눈가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눈물이 그의 손가락에 닿아 톡 터졌다.

    “그런데 그때 로르크 영애는 어떻게 되었어요?”

    민망한 마음에 화제를 돌리자 그의 얼굴에 금이 갔다. 생각하기도 싫은지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치는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아키드 님?”

    순간적으로 싸늘해진 얼굴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잠깐이지만 대공의 서늘한 표정을 닮았던 것도 같다.

    아키드는 나를 도로 누이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부인은 그저 회복하는 것만 신경 쓰면 됩니다.”

    “네…….”

    나는 찔리는 게 너무 많아 다소곳이 대답했다. 그 후로도 아키드는 내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 주었다.

    * * *

    “대, 대공비 전하.”

    로르크 영애가 파리해진 얼굴로 엘레나를 쳐다보았다.

    엘레나는 우아하게 다리를 꼰 채 그녀에게 앉으라 턱짓했다.

    그녀는 와들와들 떨면서도 엘레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엘레나가 직접 로르크 저택으로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베스티아가 대공 성에 자리를 깔고 지낼 때도 한 번 찾아온 적 없었는데 어쩐 일인 걸까.

    엘레나는 한눈에도 겁먹은 베스티아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도와주십시오, 어머니.’

    ‘도와 달라니?’

    ‘로르크 영애가 다시는 대공자비의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새아가가 쓰러졌다더니 로르크 영애 때문이었나 보구나.’

    ‘물론 더 큰 이유는 있었지만 로르크 영애 때문에 응급처치가 늦어졌던 건 사실입니다.’

    생전 부탁 한 번 하지 않던 의붓아들이 돌연 찾아와 도와 달라 청했다.

    그것도 사이 안 좋기로 유명한 데다 자신을 업신여기는 부인을 위해서.

    게다가 엘레나는 아키드의 눈동자가 그렇게 총명한 건 처음 보았다.

    늘 시선 하나 맞추지 못하고 기죽어 있던 모습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그래서였다, 아키드의 부탁을 받고 로르크 영애를 찾아온 건.

    ‘뭐, 나도 저 여자가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감히 분수도 모르고 대공자 부부에게 함부로 하다니.

    엘레나는 화사한 미소와 함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장 하델루스령에서 꺼져 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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