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1)화 (11/177)
  • #11.

    아키드가 로에나를 침대에 누이며 물었다.

    “혹시 부인에게 지병이 있었나?”

    “예? 아, 아뇨…… 원체 건강하시던 분인데…….”

    한나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떠듬떠듬 말했다.

    아키드는 로에나를 업고 오느라 땀을 쪽 뺐으면서도 차근히 말했다.

    “숨을 잘 쉬지 못해서 응급처치를 하긴 했는데…… 우선 의원에게 진단을 받아야…….”

    “꺄악! 아가씨!”

    뒤이어 자리끼를 바꾸러 갔던 비비안이 끙끙 앓는 로에나를 보곤 비명을 질렀다.

    곧장 물병을 대충 테이블에 놓고는 침대로 다가와 로에나를 살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갑자기 쓰러져서 나도 잘…….”

    아키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일 무렵이었다.

    “환자는 어디 있습니까?”

    의원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가 싶더니 서둘러 로에나의 상태를 살폈다.

    아키드는 의원이 제때 온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근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우, 다행이야.’

    그때 겨우 진정한 한나가 아키드의 상태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대공자님, 신발이…….”

    “아.”

    아키드는 한나의 말에 제 발밑을 보고 신음을 내뱉었다.

    신발 한 짝을 어디에다 잃어버렸는지 한 짝만 덜렁 신고 있었다.

    ‘그렇게 급했었나.’

    아키드는 제 귀족답지 않은 행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당황해도 뛰어선 안 된다.

    매사에 표정을 드러내지 마라.

    시정잡배처럼 등을 굽히고 걷지 마라.

    로르크 남작이 가정교사이던 시절 입이 닳도록 내뱉던 조언이었다.

    그러면서 은근하게 사생아라 귀족 태가 안 난다느니 같은 모욕을 주기도 했었다.

    조심하며 살았었는데, 로에나의 혼절에 그새 예전 본새가 나온 모양이다.

    아키드가 말이 없자 한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른 신발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아키드가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한나가 빠르게 사라졌다.

    잠시 후, 진찰을 마친 의원이 말했다.

    “다행히 응급처치를 잘해 주신 덕에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대체 갑자기 혼절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게…… 알레르기 반응인 것 같습니다.”

    “뭐?”

    아키드는 알레르기 반응이라는 말에 눈을 끔벅였다. 이에 곁에 있던 비비안이 말했다.

    “그럴 리가요. 우리 아가씨한텐 그런 병은 없었는데…….”

    “하지만 이 증상은 급성 알레르기 반응에 의한 쇼크입니다.”

    의원이 확고하게 대답하자 비비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혼잣말했다.

    “이상하네. 에이프릴 성에 있을 땐 환절기에도 잘만 돌아다니셨는데…….”

    “혹시 오늘 가루가 많이 날리는 곳에 갔었습니까?”

    의원의 물음에 비비안이 대답했다.

    “아, 씨앗을 보러 씨앗 농장에 갔었어요. 그런데 우리 아가씨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없는데?”

    아키드는 에이프릴 성에 있을 땐 괜찮았다는 말과 평소 꽃가루 알레르기가 없다는 말에 멈칫했다.

    ‘설마…….’

    아키드는 순간적으로 델루스 꽃밭에서 해사하게 웃던 로에나를 떠올렸다.

    평소보다 지나치게 볼이 붉어서 무척 좋은가 보다 했었던.

    “아무래도 하델루스령으로 오시면서 면역 체계가 약해진 듯합니다. 몸을 보신하도록 보약을 처방하겠습니다.”

    의원이 진단을 마치고 물러나려는 때였다. 아키드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혹시 에이프릴 성에 델루스 꽃이 있는가?”

    아키드의 뜬금없는 물음에 비비안이 눈을 끔벅거렸다.

    “따뜻한 에이프릴 성에 델루스 꽃이 있을 리가요. 우리 모두 이곳에 와서 처음 보았어요.”

    비비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키드는 그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 의원에게 물었다.

    “혹시 작년 이맘때쯤, 로에나가 비슷한 증세를 보였었나?”

    “글쎄요. 차트를 확인해 봐야…….”

    의원이 불량한 태도로 말을 끊으려던 때였다. 비비안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맞아요, 작년에도 아가씨가 이렇게 아프셨어요.”

    “…….”

    “그때에는 경미한 수준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처럼 볼이 무척 붉었었어요.”

    비비안이 파르르 떨며 로에나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주인의 몸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듯했다.

    아키드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물었다.

    “혹시 어머니와 나갔다가 홀로 돌아왔던 날인가?”

    “헉, 어떻게 아셨어요? 아가씨께서 비밀로 하라 했었는데…….”

    비비안이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아키드가 마른세수를 하며 의원에게 말했다.

    “델루스 꽃 때문이네.”

    “예?”

    의원이 갑자기 그게 웬 뜬구름 잡는 소리냐는 듯이 되묻자 아키드가 서늘히 답했다.

    “델루스 꽃밭에서 혼절했었어.”

    “그게 왜…….”

    “에이프릴 성에 델루스 꽃이 없었다면 델루스 꽃 알레르기가 있는지도 몰랐을 거야.”

    “아.”

    의원은 그제야 맹점을 찾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키드는 의원의 안일한 태도에 팔을 붙들었다.

    “그때도 비슷한 진단을 내렸었다면 한 번쯤 정밀 검사를 했어야 하지 않았나?”

    “그게 당시엔 경미한 수준이고, 알레르기는 원인을 찾는 게 몹시 어려운지라…….”

    의원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키드는 의원의 방만한 태도에 조금 화가 나려 했다.

    애초에 하델루스 성에서의 본인의 위치는 잘 알고 있었다.

    대공 부부가 대놓고 무관심하니 사용인들까지 무관심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아키드는 그 무관심을 익숙하게 감내했다. 오히려 관심을 주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했으니 더더욱.

    하지만 로에나에게까지 이렇게 무관심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아냐. 애초에 그녀는 내 부인이니 나와 달리 잘해 줄 거라 기대한 게 잘못이었지.’

    아키드는 자조적인 헛웃음을 내뱉었다.

    작은 주인마님의 건강 하나도 세세하게 챙기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라니.

    아키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절 봐 주시면 돼요.’

    맑게 웃으며 했던 로에나의 말이 떠올랐다. 아키드는 그간 로에나를 잘 알고 있다 생각했다.

    자존심 세고, 안하무인에, 어른 공경은 절대 하지 않는 그야말로 구제 불능이라 평가했다.

    하여 그녀를 말리는 게 일이었고, 남편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에만 집중했었다.

    ‘하델루스 대공비가 될 사람이기에 델루스 꽃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가 아는 로에나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느니 일부러 패악을 부려 망치는 쪽을 선택했으리라.

    아키드는 속으로 침음했다. 어린 그녀의 철없는 행동을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 자신 역시 어리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어리다’는 이유로 묵인되기엔 하델루스 후계자의 자리는 그에게 늘 엄중했으니까.

    아키드는 스스로 화가 났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의원에게 일갈했다.

    “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네.”

    그러곤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곧장 아버지에게 갈 생각이었다.

    “대, 대공자님……!”

    의원이 당황하여 그를 뒤따라 가려 하자 비비안이 붙들었다.

    “치료하다 말고 어디 가세요!”

    * * *

    온몸이 따끔따끔했다. 슬며시 눈을 뜨니 어느새 내 방이었다. 온몸에 마비가 와서 얼얼했는데 이젠 멀쩡했다.

    머리가 여전히 띵했으나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땀을 쪽 빼서 그런지 개운한 느낌이었다. 그때 코끝으로 익숙한 향초 냄새가 났다.

    ‘어라, 이제 냄새가 맡아지네?’

    먹먹했던 귀도 어느새 사용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작은 생활 소음까지 잘 들렸다.

    ‘와, 죽는 줄 알았네.’

    나는 난생처음 느껴 본 오감이 마비되는 감각에 몸이 떨렸다.

    괜히 겁이 나서 손을 쥐었다 펴려는데 한쪽 손이 묵직했다. 꼭 누군가한테 잡혀 있는 것처럼.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아키드?”

    놀라 내뱉은 말에 그가 몸을 움찔했다. 잠시 후 탁해진 잿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평소의 청명했던 빛과는 달리 조금 퀭한 모습이었다.

    꼭 오랜 시간 병간호를 한 사람의 모습 같달까?

    ‘뭐지? 내가 꽤 오래 누워 있었나?’

    아키드는 잠이 덜 깼는지 눈을 깜박거렸다.

    그의 등 뒤로 햇살이 내리쬐는 걸 보니 아침인 것 같았다. 햇볕을 받은 아키드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아아, 사실 여긴 천국인 게 아닐까? 아키드라는 천사가 날 마중 온 거고.’

    나는 아침에 막 눈뜬 아키드의 모습에 절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세상에, 예고도 없이 자다 깬 아키드의 얼굴을 영접하는 행운을 얻게 될 줄이야.

    이런 기회가 자주 온다면 몇 번이고 혼절해도 욕하지 않을게요, 주님.

    자연히 망상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그때. 문득 아키드가 내 방에서 밤을 샜다는 것을 인지했다.

    날 밤새 간호한 아키드라니.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던 때를 떠올리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내가 했던 변명이 제법 통했나 봐.’

    나는 내가 아팠던 것도 잊고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인정받아 기쁜 나머지 해맑게 인사까지 할 정도로.

    “좋은 아침이에요. 음, 아침 맞나?”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키드가 뒤늦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자연히 잡고 있던 손도 떨어졌고, 나는 아쉬운 대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괜찮습니까?”

    아키드가 걱정 어린 음성으로 묻는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아픈 곳은요?”

    음, 심장이 아파요.

    아키드가 너무 잘생겨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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