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0)화 (10/177)
  • #10.

    이미 로르크 영애의 두 눈은 투기로 가득했다.

    만약 대공이 곁에 있었다면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그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흥분 상태였다.

    자그마치 3년이었다. 적어도 한 달은 자중해야 하는 게 옳지 않은가?

    결국 참지 못한 베스티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마르니에 영애,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가 주셔야겠어요. 외출 일정이 있던 걸 깜박했지 뭐예요.”

    “그런가요? 아쉽네요.”

    마르니에 영애가 순순히 고개를 까닥이며 자리를 파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뭉그적거리며 로르크 영애와 하녀가 하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씨앗 농장으로 갈 거야. 마차를 대기시켜.”

    역시나 로르크 영애는 화를 누르지 못해 대공을 만나러 가려는 듯했다.

    마르니에 영애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유쾌한 걸음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로르크 영애가 대공자 부부와 마주친 건 이로부터 몇 시간 후의 일이었다.

    * * *

    씨앗 농장에 들어서자 농장주가 마중 나와선 아키드와 나를 반겼다.

    “오신다는 소식은 미리 전해 들었습니다. 이곳 씨앗 농장의 관리인인 맥이라고 합니다.”

    “반가워, 맥.”

    “갑작스럽게 찾아왔는데 환대해 주어 고맙군.”

    나와 아키드가 차례로 말을 받자 맥이 내게 말했다.

    “작년에 방문하시고 처음이시죠?”

    “음? 내가 여길 방문했었다고?”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키드 역시 금시초문인지 내게 물었다.

    “작년에 여기 왔었습니까?”

    “으음, 그런가 봐요. 가물가물하네요.”

    내가 오래돼 기억이 안 나는 척 두루뭉술하게 대꾸하자 맥이 입을 열었다.

    “아마 대공비 전하를 따라 잠깐 오셨다 가신 터라 기억 못 하시나 봅니다.”

    “으응. 그랬나 봐.”

    “그날 별일은 없으셨나요? 대공비 전하의 표정이 몹시 안 좋으셨어서 걱정 많이 했습니다.”

    “어머님이요?”

    “예. 그날 대공자비님이 말도 없이 가셔서 대공비 전하께서 굉장히 화가 나셨었지요.”

    “헐, 내가 말도 없이 갔어?”

    나도 모르게 외쳤다 화들짝 놀라 입을 막았다.

    ‘로에나 너, 정말 가지가지 했었구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도 없이 땡땡이치는 건 아니지.

    작년에 있던 일은 내가 알 수 없으니 그저 맥의 말에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대공비와 함께 씨앗을 살피러 방문 온 것은 맞는 듯했다.

    그녀의 성격상 이런 지루한 곳에 오래 있지는 못했을 터.

    ‘아마 기회를 보아 도망친 거겠지. 그 덕에 대공비는 혼자 일을 처리해야 했고.’

    거기다 그해 꽃축제를 엉망으로 만들기까지 했으니 대공비의 미움을 받는 건 당연했다.

    ‘이번엔 진짜 잘해야겠어.’

    나는 그렇게 다짐하곤 맥에게 야무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엔 시간을 넉넉히 비워 두었으니 빠짐없이 소개 부탁할게.”

    “물론입니다. 그럼 우선 재배해 둔 꽃을 보시겠습니까? 비닐하우스에 미리 시범용으로 키운 꽃들입니다. 원하신다면 중간중간 설명도 해 드리지요.”

    “오오, 설명해 주면 나야 고맙지!”

    “올해는 특히 델루스 꽃의 색이 곱게 나왔습니다. 아마 심으면 올해 중순 즈음에 활짝 핀 델루스 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마법으로 개화 시기를 앞당기는 것도 가능하고요.”

    맥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꽃이 핀 장소로 안내했다. 그가 꽃밭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꽃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이 꽃의 경우 꽃씨가 무척 가볍습니다. 간혹 끝이 둥근 것들이 있는데 불량이니 따로 빼 두셔야 해요.”

    나는 맥이 씨앗에 관해 설명할 때마다 노트에 착실히 적었다.

    아키드는 내가 눈에 띄게 열성을 보이는 것에 의아해하면서도 보폭을 맞춰 중간중간 첨언을 해 주었다.

    그도 공부를 많이 했는지 씨앗에 대해 제법 아는 바가 많았다.

    “대공자님께서 다재다능하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는데, 이런 조경에도 관심이 많으셨군요.”

    맥이 흐뭇하게 칭찬하자 아키드가 쑥스러운지 시선을 피했다.

    잠시 후 맥이 어떤 문 앞으로 안내하며 바람을 잡았다.

    “자, 여기가 바로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델루스 꽃을 재배해 둔 곳입니다.”

    나는 델루스 꽃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했다. 익히 아는 꽃이라 그랬다.

    ‘델루스 꽃이라면 아키드가 메이벨한테 처음 선물한 꽃이었지.’

    델루스 꽃은 이곳에서만 피는 희귀종으로, 하델루스의 영지인 델루스를 상징하는 꽃이기도 했다.

    그가 델루스 꽃을 선물하는 건 그저 친애를 표시하는 게 아니었다.

    ‘대공이나 대공자가 부인에게만 선물하는 꽃이니까.’

    하지만 메이벨은 델루스에 온 적이 없어 그 뜻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고맙다는 말만 듣고 끝나 버렸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맥이 비닐하우스의 문을 열었다.

    곧이어 형형색색의 델루스 꽃밭이 좌르륵 펼쳐졌다.

    “우와.”

    나는 아름다운 광경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꽃답게 색이 곱고 싱싱해 보였다.

    “이왕 온 김에 천천히 둘러보고 계십시오.”

    “그럴게.”

    “저는 두고 온 키트가 있어서 얼른 챙겨 오겠습니다.”

    맥이 그 말과 함께 부리나케 사라졌다.

    나는 꽃밭 안으로 걸음을 떼었다. 델루스 꽃의 색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갯빛 향연을 보고 있자니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알록달록한 군락을 이룬 게 특이점이었다.

    “지인짜 예쁘네.”

    나는 만져 보고 싶었으나 혹시라도 상할까 싶어 눈으로만 바라보았다.

    그때 아키드가 곁에 다가오며 말했다.

    “저는 부인이 델루스 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요?”

    “기억 안 나십니까? 작년 축제 때 선물한 꽃을 쓰레기통에 버리라 했었습니다.”

    “…….”

    “그래서 꽃을 싫어하시는 줄…….”

    “안 싫어해요!”

    나는 화드득 놀라 변명했다. 아무래도 아키드가 준 선물이라 질색하고 버리라 한 것 같았다.

    “그으…… 미안해요. 그땐 제가 너무 지나쳤어요.”

    나는 싹싹 빌고도 모자랄 상황인지라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아키드가 맑은 청회색 눈을 깜박거리는가 싶더니.

    “싫어한 게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자상한 위로와 함께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일순 그의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진짜 이 세상 미모가 아니다.’

    나는 헤벌쭉하며 아키드를 응시했다. 여전히 내가 그의 아내가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때 아키드가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마음에 드는 꽃이 있다면 말씀하세요. 부인의 방으로 보내라 하겠습니다.”

    “앗, 저는 그럼 델…….”

    선물을 주겠다는 말에 신나서 델루스 꽃을 고르려던 차였다.

    “잠깐만요, 영애! 지금 이쪽은 손님이 와 계셔서 들어가시면……!”

    저편에서 소란이 이는가 싶더니 낯익은 여인이 한껏 치장한 채로 들이닥쳤다.

    “로르크 영애?”

    나는 뜻밖의 인물에 어안이 벙벙해져 작게 읊조렸다.

    로르크 영애가 도끼눈을 하고 이리저리 살피는가 싶더니 나와 아키드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대공은 어디 계시죠?”

    “무례하군.”

    아키드가 나를 뒤로 물리며 로르크 영애에게 낮게 말했다.

    하지만 평소 아키드를 무시해 왔던 베스티아는 그의 경고에도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는 자식까지 암막용으로 사용하시나 보죠?”

    “그게 무슨 뜻이지?”

    “바른대로 말씀해 주시죠. 지금 여기에 대공께서 계신다는 걸 듣고 왔으니까요!”

    베스티아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난데없이 나타나 아키드에게 소리치는 그녀를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흐음, 내가 나설 차례인가.

    결심한 내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내 주특기인 말발로 그녀의 기를 꺾어 주려던 참이었다.

    ‘어라?’

    갑자기 눈앞이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곧이어 귀에 이명까지 들려서 아키드와 로르크 영애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왜 이러지? 뭘 잘못 먹었나?’

    나는 갑작스러운 몸의 이상 신호에 당황스러웠다.

    누군가 말을 거는 것처럼 와글와글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코가 마비된 것처럼 꽃향기가 더는 나지 않았다.

    나는 현기증이 일어 아키드의 등에 얼굴을 기대었다.

    “부인?”

    아키드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아, 아키드 님…….”

    가까스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찰나였다. 몸이 크게 휘청이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쓰러지는 나를 아키드가 붙들며 소리쳤다.

    “부인!”

    “꺄악! 대공자비님!”

    로르크 영애를 말리던 점원이 비명을 내질렀다.

    “부…… 정신……!”

    아키드가 내게 무어라 소리쳤으나 뚝뚝 끊겨 들렸다. 이윽고 그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뭐야, 로에나 이렇게 죽는 거야?’

    혹시 내가 로에나의 영혼이 아니라서 몸이 거부 반응이라도 일으키는 걸까?

    원작에서는 전염병에 걸리기 전엔 건강하기만 하던 로에나였는데, 혼절이라니.

    나는 정신을 차리려 눈에 힘을 주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시야로 다급하게 무어라 소리치는 아키드와 사색이 된 로르크 영애가 언뜻 스쳤다. 그 뒤론 암전이었다.

    * * *

    아키드가 로에나를 업고 하델루스 성에 도착했다.

    “아실!”

    아키드의 다급한 외침에 집사 아실이 부리나케 나왔다.

    “대공자님, 무슨 일로…… 헉!”

    아실은 쓰러진 로에나를 보고 사색이 되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아실, 의원을 불러 줘. 지금 당장!”

    아키드는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듯이 짧게 명령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아실이 횡설수설하며 종을 울려 의원을 찾았다. 아키드는 곧장 로에나의 침실로 향했다.

    로에나의 호흡이 무척이나 거칠었다. 몸은 불덩이였고, 식은땀을 자꾸만 흘렸다.

    ‘농장에 가기 전부터 몸이 안 좋았던 건가?’

    아키드는 로에나의 혼절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전혀 아픈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처음으로 한 데이트다운 데이트였고, 분위기도 무척이나 좋았었다.

    게다가 델루스 꽃밭에서 연신 탄성을 내뱉으며 볼을 붉히던 로에나는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갑자기 왜? 무엇 때문에?’

    아키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면서 막 방문을 열었다.

    “대공자님?”

    한나가 침구를 정리하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아가씨!!”

    그녀가 괴성을 지르며 쓰러진 로에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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