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9)화 (9/177)
  • #9.

    한가로운 오후. 나는 마차 안에서 자꾸만 방실방실 웃었다. 아키드와 함께 꽃축제 준비를 빌미로 나들이를 나와서였다.

    그때 내 뜨거운 시선을 느낀 아키드가 물었다.

    “왜 자꾸 그렇게 보십니까?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네. 묻었어요. 잘생김이.

    당장에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아키드가 놀랄 테니 다른 말을 생각해 냈다.

    “아키드 님이 도와주신다니 든든해서요.”

    아키드는 내 대답에 두 눈을 끔벅거렸다.

    설마 내 입에서 든든하다느니 같은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제게 도움을 요청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가요?”

    “전부터 제 도움은 원치 않아 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아키드의 얼굴빛이 처연했다.

    1년간 아내에게 모진 말을 들으며 살았으니 내 행동이 어석버석한 건 당연하리라.

    일전에 로르크 남작을 치워 주었다 해도 아직 그에게 나는 불편한 아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만 여전히 나를 살갑게 대하지 않는 걸 보면 더욱 그랬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부터는 도움을 좀 받아 볼까 해서요.”

    아키드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키드와 약속 잡던 날. 나는 작년의 로에나가 꽃축제 기간에 한 만행을 세 시녀에게 전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날 해야 할 게 뭔데?’

    ‘뭘 하시든 간에 작년처럼은 안 돼요, 아가씨.’

    ‘뭐어? 내가 대체 뭘 했다고 그래?’

    ‘기억 안 나세요……?’

    나는 한나가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작년의 로에나가 뭔가 단단히 일을 그르친 것 같다는 느낌이 팍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곁에 선 비비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야 작년에 대공비 마님의 말씀도 무시하고 씨앗을 아무렇게나 준비하셨잖아요.’

    ‘그뿐이에요? 하필 골라도 발아율이 최악인 씨앗만 추려서 그해 꽃 수확이 그전 해의 80%밖에 못 미쳤잖아요.’

    슈리가 그때만 생각해도 아찔한지 몸을 떨었다. 곁에 있던 한나가 말을 보탰다.

    ‘그나마 아키드 님이 뒤늦게 제대로 된 씨앗으로 교체해 발아율을 맞추셔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수확량이 예년의 절반도 못 되었을지 몰라요.’

    ‘아키드 님이 도와줬다고?’

    ‘네. 물론 아가씨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길길이 날뛰셨지만요.’

    ‘그땐 저희가 봐도 좀 너무하다 싶…… 으음. 아니에요. 호호호.’

    한나가 찔끔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나는 아키드가 로에나를 도와주었다가 괜히 욕만 먹었다는 일화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상도 이런 진상이 또 없었다.

    나였다면 고맙다는 핑계로 뽀뽀 세례를 해 주었을 텐데! 아까워라!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하면 아키드와 같이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이 데이트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아예 아키드에게 먼저 도와 달라 청하면 되잖아?’

    그 덕에 좋은 씨앗도 고르겠다, 대공비에게 혼날 일도 없겠다.

    덤으로 아키드랑 알콩달콩 데이트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하여 얻게 된 나들이가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었다.

    그러다 보니 표정이 몹시 이상했나 보다. 날 유심히 지켜보던 아키드가 물었다.

    “작년에 그 일로 어머니께 혼이 난 것 때문에 긴장했습니까?”

    “네?”

    “아, 자꾸 입꼬리가 떨려서 물었습니다.”

    아키드가 제 입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네? 아아, 네, 뭐, 그렇죠. 맞아요. 어머님이 화나시면 좀 무섭잖아요.”

    “그렇다기엔 지난번에 어머님께 무척 살갑던데요. 볼에…….”

    아키드가 말을 멈추고 우물쭈물하자 내가 대신 말했다.

    “굿나잇 뽀뽀요?”

    “예…… 그거.”

    아키드가 멋쩍은 얼굴로 볼을 매만졌다. 나는 능청스럽게 이야기했다.

    “그야 무섭다고 마냥 무서워하기만 하면 친해질 수 없잖아요.”

    “친해진다고요……?”

    아키드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맑은 청회색 눈동자가 은구슬처럼 반짝였다.

    약한 파란이 일던 눈동자가 잠잠해지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부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척 날이 서 있었으니까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절 봐 주시면 돼요.”

    내가 담담히 말하자.

    “있는 그대로 말입니까?”

    아키드가 미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받았다. 나는 배시시 웃곤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켜 힘차게 말했다.

    “네. 지금 아키드 님 눈앞에 있는 저 말이에요. 과거의 제가 아니라.”

    브레이크 없이 뱉어진 말에 아키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 입에서 멀쩡한 말이 나와 조금 당황한 것도 같았다. 물론 아키드 한정 예쁜 말이었다.

    ‘내 아키드 괴롭히는 연놈들에겐 언제라도 자비 없는 지옥의 주둥아리로 돌아가 줄 테다.’

    그런 각오를 하고 있는데 그가 입가를 매만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가요. 제가 그간 부인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거군요.”

    “아뇨, 오해라기보다는 일부분만 봤다는 거죠. 제가 아키드 님의 배경으로 오해했던 것처럼요.”

    “아.”

    “미안해요. 아키드 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봐서.”

    “아닙니다. 저야말로…….”

    아키드가 반사적으로 부정하곤 말끝을 흐렸다.

    무어라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기색이었다. 목소리가 묵직하니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제가 타지로 와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괜히 폐를 끼쳤어요.”

    “…….”

    “이젠 정말 잘할게요. 진심으로.”

    내가 일부러 처연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자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고 보니 소설 속에서도 그는 생각이 많아 말을 몹시 조심스럽게 하곤 했다.

    갑작스럽게 낯선 하델루스 성에 끌려오다시피 했다.

    무심한 생부와 냉대하는 계모. 거기에 그를 혐오하는 어린 아내까지.

    그들 사이에선 무엇이든 긴장하며 살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키드는 외로웠을 거야.’

    나 역시 양부모 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살던 과거가 있어 아키드의 그늘에 공감이 되었다.

    사랑받고 싶었으나 받지 못한 아이는 꼭 저렇게 경직되곤 하니까.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켜 입가에 있는 그의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아키드가 놀라 나를 불렀다.

    “부인?”

    “애써 꾹꾹 담아 놓지 말고 편하게 말해도 돼요, 아키드 님.”

    “…….”

    “이제 보니 긴장한 건 제가 아니라 아키드 님이었네요.”

    내가 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안심시키자 아키드의 눈동자가 아까보다도 더 세차게 흔들렸다.

    청회색 눈동자에 낯선 얼굴이 비쳤다. 풍성하게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칼,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꼬리와 푸른 눈.

    ‘여전히 내 미모에 적응 안 되네.’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추며 마부가 도착을 알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물리며 말했다.

    “갈까요?”

    “……예, 부인.”

    아키드가 짐짓 멍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느릿하게 대꾸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 * *

    한편 하델루스 대공에게 차인 후, 본가에서 칩거하던 로르크 영애가 오랜만에 손님을 들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마르니에 영애가 그녀를 찾아온 탓이었다. 마르니에 영애가 말했다.

    “대공께서도 참 무심하시네요. 어쩜 그렇게 장작을 패듯 싹둑 끊어 내셨을까.”

    겉으로는 대공을 탓했으나 실은 대공의 품에서 떨어져 나간 로르크 영애를 골리는 말이었다.

    그간 대공을 등에 업고 사교계에서 유세를 부렸으니 당연했다. 로르크 영애가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이제 됐어요. 남자가 어디 대공뿐인가요?”

    하지만 이어지는 마르니에 영애의 말에 평정이 뚝 끊어졌다.

    “듣자 하니 벌써 새 애인이 생겼다죠.”

    “새 애인이라고요?”

    “으음. 정확한 건 아니지만 오늘 씨앗 농장 쪽으로 하델루스가의 마차가 가는 걸 보았거든요.”

    마르니에 영애는 말을 마치고 로르크 영애를 힐끔거렸다. 역시나 얼굴이 무척 어두웠다.

    평소 하델루스 대공의 총애에 힘입어 저를 은근히 하대하던 로르크 영애가 고까운 참에 아주 재미있는 일이었다.

    ‘흥, 풀이 죽은 게 혼자 보기 너무 아쉽잖아?’

    마르니에 영애는 그리 생각하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부러 내렸다.

    그녀가 하델루스가의 마차를 봤다는 건 사실이었다.

    이곳에 오던 길에 하델루스 가문의 문장이 세공된 화려한 마차를 보았으니까.

    물론 마차에 누가 타고 있었는지까지는 마르니에 영애도 알지 못했다.

    다만 대공이 애용하던 2인승 마차인 것이 생각나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로르크 영애가 대공에게 새 애인이 생겼다는 말에 발끈하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에요?”

    “네. 그렇다니까요? 이제 곧 꽃축제이니 씨앗을 핑계로 애인과 꽃구경이라도 하려나 보죠. ……음?”

    마르니에 영애가 말하다 말고 얕은 탄성을 내뱉었다.

    로르크 영애가 교양 없이 찻잔을 요란하게 내려놓은 탓이었다.

    하지만 로르크 영애의 표정이 워낙 살벌하여 그저 헛기침만 큼큼, 할 뿐이었다.

    괜히 불똥이 자신에게로 튈까 봐 조심스러웠다. 마르니에 영애가 슬쩍 눈치를 보며 운을 떼었다.

    “원래 사내란 그런 것이랍니다. 로르크 영애가 아무리 꽃처럼 예쁘대도 자꾸 보면 익숙해지고, 새로운 꽃에 눈이 가는 건 본능이죠.”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건가요, 마르니에 영애?”

    “어머, 저는 그냥 영애께서 하루빨리 실연의 아픔을 이겨 내시길 바라는 마음뿐이에요.”

    “…….”

    “언짢았다면 사과하지요.”

    마르니에 영애의 우아한 고갯짓에 로르크 영애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새 새 애인이 생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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