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로르크 남작 남매가 치워지니 하델루스 성에 평화가 찾아왔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대공이 로르크 남작의 잘못을 묵인했다는 것.
‘아직 법안이 심사 중이라, 이거지.’
안건이 심사 중일 때에 학대 사건이 터지면 곤란해서 일부러 숨기는 것 같았다. 해서 아직은 대공이 남작가를 내버려 두고 있는 상황.
하지만 그냥 가만히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분명 대공이 남작에게 찾아가 입을 놀리는 날엔 남작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경고 정도는 해 두지 않았을까?
로르크 남작 성격에 여태 조용한 걸 보면 확실했다.
듣자 하니 로르크 영애는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대공에게 버려진 것에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변덕이 심한 대공이 3년이나 사귀었던 애인이다. 내가 시집오기 전부터 있던 애첩이기도 했다.
‘그러니 나 때문에 이렇게 쉽게 내쳐질 줄은 몰랐겠지.’
뭐, 어쨌거나 로르크 남매가 치워지니 아키드의 앞길이 조금 환해졌다.
대공이 미안했는지 그 뒤로 아키드를 은근하게 챙겼다.
오늘 아침엔 뭐랬더라.
나는 오랜만에 넷이서 함께한 아침 식사 자리에서 있던 대화를 떠올렸다.
대공은 식사 도중 무심하게 말했다.
‘다음에도 네게 함부로 하는 자가 있으면 가만히 있지 말거라.’
나는 대공비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말하는 대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공비의 안색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게 태평했다.
‘역시 어제 둘이서 뭔가 합의가 이루어지긴 했나 보네.’
아마 원작에서처럼 대공비가 광산까지는 못 받더라도 뭔가 모종의 거래는 했으리라.
아키드는 대공의 뜻밖의 말에 두 눈을 끔벅이다 딱딱하게 대꾸했다.
‘언제는 쥐 죽은 듯이 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공은 자신을 은근히 탓하는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다 낮게 일갈했다.
‘그렇다고 맞고도 가만히 있으란 건 아니었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차라리 때리거라. 맞고 오는 것보다 때리고 오는 게 훨씬 뒤처리하기 편하니.’
‘……유념하겠습니다.’
‘아주 좋은 거 가르치십니다. 우리 순둥이 아키드한테 대체 뭘 알려 주는 거람?’
나는 대공의 말도 안 되는 조언을 다시금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물론 맞고 오는 건 싫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때리는 건 너무 양아치였다.
아키드는 대공과 외모 면에서는 무척 닮았으나 성격은 딴판이었다.
대공은 자유로운 아랫도리를 가진 데다가 자기애가 아주 넘치는 사람이다.
반면 아키드는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고 자란 터라 뭐든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여주인 메이벨이랑 자주 갈등이 일었고, 결국 남주인 제로니스에게 그녀를 빼앗겼다.
‘괜찮아. 내가 있는 이상 아키드의 어린 시절이 불우할 일은 없어.’
괜히 아키드를 떠올리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 한나가 웬 꽃바구니를 들고 침실에 들어왔다.
“웬 꽃이야?”
“아, 곧 꽃축제가 있는 날이라 기분 전환 삼아 가져와 봤어요.”
“꽃축제? 이 날씨에?”
나는 바깥에서 휘이잉, 찬 바람이 부는 걸 가리키며 눈을 끔벅거렸다.
추운 계절은 지났다 해도 아직 초봄이었다.
꽃이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해도 꽃축제를 열기엔 무리인 날씨였다.
내 어리바리한 표정을 본 비비안이 풋, 웃으며 말했다.
“델루스에 하루 이틀 있으신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으응?”
“말만 꽃축제지 실은 씨앗을 뿌리는 날이잖아요.”
“씨앗을 뿌린다고?”
“어라라, 오늘따라 우리 작은 마님이 졸리신가. 왜 자꾸 모른 척하세요?”
비비안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묻자 나는 찔끔해 눈을 도르르 굴렸다. 그러자 슈리가 설명했다.
“네. 델루스 땅 자체가 워낙 꽃이 피기 어려우니까 이렇게 자진해서 씨앗을 뿌리는 행사까지 있잖아요.”
한나도 꽃을 다듬어 화병에 담으면서 말을 얹었다.
“혹시 처음 델루스에 왔을 때 귀찮은 행사라고 도망가셔서 기억 못 하시는 거예요?”
“아, 맞다. 작년에 그러셨었지. 흐음, 그렇다면 모를 만하네요.”
비비안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혀를 찔끔 내밀었다. 곁에 있던 슈리가 동조했다.
“하긴 그땐 시집온 지 얼마 안 되던 때라 더 정신없었겠네요.”
“으응. 그랬나 봐.”
나는 시녀들이 알아서 이해하는 상황에 슬쩍 말을 얹어 이 위기를 회피했다.
한나가 내게 시선을 맞추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엔 저번처럼 도망가시면 안 돼요. 또 대공비님께 호되게 혼날지도 모른다고요.”
“무, 물론이지! 나 이제 말도 잘 듣고 아내 역할도 잘 해낼 거라고.”
“어머, 정말요? 이러다 또 변덕스럽게 대공자님을 난처하게 만드시려는 건 아니고요?”
나는 비비안의 도발에 발끈해서 소리쳤다.
“아니거든! 내가 아키드 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세상에, 우리 아가씨. 이제야 대공자님을 인정하시려나 보네요!”
한나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이 밝게 말했다.
“설마 그동안 툴툴거린 것도 사실은 관심 있으면서 아닌 척하신 거예요? 세상에나.”
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비비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쯧쯧. 서투시긴. 대공자님 아닌 다른 분이셨으면 진즉 도망가셨을걸요? 요즘은 그렇게 짓궂게 굴면 좋아지려던 마음도 쏙 들어간다고요.”
“씨이, 비비안 너어…….”
나는 아키드가 도망갔을 거라는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그래도 지난번에 이혼해 주겠다며 도망가려던 게 생각나서 더욱 약이 올랐다.
그때 슈리가 내 등을 가볍게 도닥이며 상냥하게 말했다.
“후후후. 귀여우셔라. 비비안은 무시하세요. 쟤, 아키드 님한테 질투하는 거니까.”
“슈리, 뭐라는 거야?”
비비안이 펄쩍 뛰며 눈을 흘겼으나 아니라고 변명하진 않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하여간 여기나 저기나 로에나가 싸지른 똥이 많아서 큰일이다.
에이프릴 성에서 데려온 애들도 이렇게 믿는 둥 마는 둥 하는데 아키드가 퍽이나 내 변화를 믿겠다.
‘이거 대공가 사람들 모두 설득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어.’
괜스레 피곤해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잠시 후, 나는 다시금 꽃축제를 화제로 끌어왔다.
“그래서 내가 그날 해야 할 게 뭔데?”
* * *
아키드는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로르크 남작이 사라진 뒤, 아키드의 생활엔 안정이 찾아왔다.
더는 밤새워 가며 예습하고도 맞을 일이 없을뿐더러 새로 온 가정교사가 제법 괜찮았다.
게다가 대공이 그에게 검술 스승까지 붙여 준 상황이었다.
‘차라리 때리라는 말이 진심이셨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 테라스 너머에서 소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방인 로에나의 침실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아키드는 그 웃음소리가 로에나의 웃음소리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시녀들과 대화 중인가 보네.”
유독 맑은 웃음소리라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키드는 책을 덮고 일어나 로에나의 침실 테라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염탐이었다. 로비를 사이에 둔 침실이라 해도, 잇닿은 테라스를 통해 서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넘어가기엔 다소 거리가 있는 편이긴 했다.
창문을 열어 두었는지 두런두런 말소리가 은근하게 아키드의 테라스로 넘어왔다.
정확히 무엇을 이야기하는지까지는 명쾌하게 들리진 않았다.
단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
‘에이프릴 성에서부터 함께 온 시녀들인가.’
아키드는 로에나의 음성 이외의 것을 대충 어림짐작했다. 성에 올 때부터 저들 셋과 유독 돈독했던 로에나였다.
다른 사용인들에겐 마음을 열지 않아도 저들에겐 의지하던 그녀였다.
아키드는 사생활을 엿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되돌아가려 했다.
바로 그때, 로에나의 당찬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키드 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
아키드는 불쑥 들린 고백에 숨을 들이 참았다. 크게 외친 탓에 너무도 또렷이 들렸다.
아키드는 사레가 들려 기침이 나왔다.
“큽! 켁!”
아키드는 간신히 기침을 참아 내며 벽에 기댔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다 콩콩거렸다.
혹시나 들릴까 봐 입을 꾹 막고 숨을 골랐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아키드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로에나의 목소리였다.
한데 그 내용은 그녀의 발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뜻밖이었다.
자신이 알던 부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난 당신이 너무너무 싫어! 내 곁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입을 열 때마다 자신이 싫다고 소리치던 아내였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그를 혐오하는 티를 팍팍 내기도 했었다.
그랬는데.
‘가요, 여보.’
아키드는 로에나가 은연중에 내뱉은 애칭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르륵 뜨거워졌다.
너무 자연스럽게 내뱉어서 인지하는 데 오래 걸렸을 정도로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다시 ‘아키드 님’이라 칭했을 땐 조금 섭섭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섭섭하다니? 대체 왜?’
아키드는 제 생각의 물꼬를 흐트러뜨리며 혼란스러워했다.
그저 로에나가 자꾸만 새로운 모습을 보여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자신이 좋다고 하는 게 의아했다. 또 거짓말을 하려는 걸까?
“하아…….”
아키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무지 로에나를 이해해 보려 해도 잘 납득이 안 되었다.
그나마 전처럼 패악을 부리지 않으니 부모님 보기 면구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반대로 제게 너무나도 살갑게 군다는 것.
‘부인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자연히 아키드의 머릿속이 로에나로 꽉 들어찼다.
그러다 문득 로에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아키드 님을 싫어한 건 맞지만 제 인생까지 싫어한 건 아니었어요.’
그때의 로에나는 어딘지 말을 돌리는 듯했다.
특히 ‘아키드 님을 싫어한 건’을 말할 때는 목소리가 다 떨렸었다.
꼭 말하기 싫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눈치 빠른 아키드로서는 그녀의 변화가 의아하기만 했다.
아키드는 한참이나 테라스 쪽 벽에 기댄 채로 멍하니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터덜터덜 테이블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다시금 책을 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표지를 만지작거리며 아랫입술을 꼬물거릴 뿐.
이윽고 아키드가 작게 혼잣말했다.
“싫어한다 했으면서…….”
아키드는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누군가에게 ‘좋다’는 말을 들은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어쩐지 민망해 괜스레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자꾸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고작 그 한마디에 스르륵 마음이 녹아 버리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가슴이 얼추 진정될 무렵.
똑똑.
“아키드 님. 저예요, 로에나.”
로에나가 아키드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